[교회비평 - 경동현]

무너지는 가정! 아버지들의 귀환?

성모순례지로 주말마다 신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감곡성당은 내가 유년 시절을 보낸 곳이다. 5대째 내려온 천주교 집안의 분위기 탓일까, 할아버지, 큰아버지를 뵐 적마다 교회와 관련된 이야기 하나씩은 꼭 빠지지 않았다. 집안의 일상은 물론이고, 신앙의 중심은 할아버지의 할아버지로부터 출발해 할아버지로, 다시 할아버지에서 큰아버지와 아버지의 8남매 형제한테로 이어졌다.

그러나 전통적인 가족 모델이 무너지는 시기와 때를 같이하면서 내 또래의 아래 세대로는 제대로 이어진 집안이 많지 않다. 나는 감곡에서 중학교 졸업할 때까지 복사를 했다. 오랜 교우촌인 이곳에서 복사단은 여느 아이들과는 다른 대접을 받았다. 지금도 그러는지 모르지만 해마다 교구 행사로 치러진 성체거동이 있는 날이면 복사들은 학교의 배려(?)로 수업도 빼고 행사에 참석하곤 했다. 그땐 복사들만 누릴 수 있는 특권이란 생각에 꽤나 목에 힘을 줬던 기억이 난다.

이런 대접에 부응하느라 그랬던 것인지 복사단은 군기가 셌다. 복사단 일원이 되려면 꼬박 6개월 동안 매일 미사에 참석해야했고, 매주 복사단 회합에서는 한 주간의 활동에 대해 형들로부터 훈계를 듣거나, 가끔은 기합을 받기도 했다. 지금은 추억이 됐지만 성당 종탑 바로 밑, 복사 회합실은 동생 복사들에게는 가고 싶지 않은 장소였고, 형님 복사들의 모습은 엄한 아버지의 기억으로 남아있는 곳이다. 그런데 최근 내가 기억하는 형님 복사들의 이미지로 나 자신이 후배들에게 기억되고 있다는 말을 듣고는 적잖이 당황한 적이 있다. 복사단 안에서도 가부장적 권위가 강조되었던 걸 보면 당시 우리 집안뿐 아니라 교우촌 대부분의 가정에 익숙한 문화였던 모양이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아버지의 권위를 억압으로 인식하고 그 억압에서 벗어나 자기 자신도 권위를 만들고 싶은 무의식 차원의 욕망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이다. 이런 콤플렉스에 기대어 가부장적 문화는 흔들림 없이 이어져오고 있다. 고향이나 뿌리로 인식되는 아버지는 때로는 든든한 보호망이지만, 때로는 가장 친숙한 지배자로 인식되기도 한다. 권위주의적 특성이 강한 공동체일수록 더욱 그렇다.

교회 역시 예외는 아니다. 아버지의 권위를 기반으로 형성된 가부장적 가족제도는 근대의 이상적 가족 모델이자 교회가 오랫동안 ‘하느님의 질서’ 혹은 ‘창조의 질서’로 이해해온 모델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가족 모델이 흔들리고 있다.

경쟁의 정글이 된 사회를 자위하듯 이태백, 삼팔선, 사오정, 오륙도와 같은 표현은 가정의 생계를 책임진 아버지들의 불안한 상황을 여과 없이 보여주고 있다. 살아남아야 한다는 절박함으로 앞만 보고 달려온 아버지들에게 돌아온 시선은 그들의 연륜에 대한 존경은 고사하고, ‘돈 벌어다 주는 기계’, 대화가 되지 않는 ‘꼰대’의 이미지만 덧씌워졌다.

이러한 아버지 위기담론을 잘 포착해 1990년대 중반 개신교의 가정회복운동 그룹이 추진한 ‘아버지 학교’는 가히 폭발적인 반응을 얻었다. 처음에는 주로 개신교 신자들이 참여하다가, IMF 이후 아버지들의 위기가 사회 전반으로 일상화하면서 지금은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한 ‘열린 아버지 학교’가 더 큰 호응을 얻고 있다. 새로운 선교 운동을 넘어서 대안적 사회운동으로까지 부상하는 듯하다.

아버지들의 위기에 대한 가톨릭교회의 반응은 상대적으로 늦었다. 2005년에 수원교구 가정사목연구소 주최로 ‘성 요셉 아버지 학교’가 처음 시작된 이래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1박2일로 운영하는 청주교구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교구에서 ‘성 요셉 아버지 학교’라는 이름으로 5주 혹은 6주 프로그램이 운영되고 있고 반응도 점차 확산되는 추세다.

일터는 물론 가정에서조차 설 곳이 없는 이 땅의 아버지들에게 지지와 격려는 꼭 필요한 일이다. 그들의 권위를 찾아주기 위한 성 요셉 아버지 학교가 한국 교회 가정 성화 운동의 중요한 역할로 자리매김하길 바라며 유행이 돼가는 아버지 학교의 가족 판타지에서 교회가 놓쳐서는 안 될 몇 가지 사항들을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가정 문제에 관한 한국 교회의 시각

교구별로 아버지 학교를 주관하는 곳은 가정사목 담당 부서다. 이는 아버지 학교의 기획이 가정 문제에 관한 한국 교회의 관점에서 자유롭지 않음을 말해준다. 한국 교회 공식 기관지였던 <사목>(2007년 폐간)에 폐간 전 10년간 실린 가정 관련 글들을 살펴보면 주로 가정폭력, 부부 관계, 혼인과 이혼, 혼인 전후 교육, 가정 공동체, 가정 안에서의 전례, 가정 사도직, 낙태 문제 등에 관한 것이다.

가톨릭교회가 가정 문제를 보는 관점은 개인, 생명 문제와 관련이 깊다. 현재 교구마다 가정사목을 전담하는 부서의 전신이 ‘행복한 가정운동’, ‘선택’, ‘주말’ 등 과거 생명 중심의 사도직 단체들이 그 중심이었던 점도 큰 이유 가운데 하나다. 달리 말하면 이는 개인과 가정 문제로 생명 개념의 폭을 좁힌다는 말이기도 하다.

주교회의에서 발표하는 생명과 가정 관련 문서들을 보면 현대 사회에서 낙태와 이혼 증가로 가정의 정체성이 심각하게 침해되고 있으며, 이러한 ‘죽음의 문화’의 뿌리에 낙태가 있다고 말한다. 따라서 “가정은 죽음의 문화라고 불리는 것에 반대하여 생명 문화의 중심을 이루며, 가정의 기본 임무는 생명에 봉사하는 것”이라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말을 인용해 강조한다. 한국 교회에서 가정 문제를 다룰 때 늘 “생명” 문제가 따라 다니는 것은 이런 관점 때문이라고 봐도 크게 틀리지 않는다.

따라서 가정 문제는 사회적이고 구조적 시각보다는 ‘생명-나-가정-교회-사회-세계’라는 단계론적 인식을 바탕으로 한다고 보인다. 이 논리대로면 교회와 사회의 모든 문제는 가정에서 나오고 가정 내 모든 문제는 낙태와 같은 반생명적 행태에서 나오니,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개인의 도덕적 · 종교적 회개’를 해야 하는 것이다. 결국 아버지를 구심점으로 하는 가정의 회복을 통해 사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믿음은 사회구조적 악과 아무런 관계 설정을 하지 않음으로써, 가정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실천도 사회구조적 대응보다는 개인의 도덕적 차원에 머물게 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예수의 가족 이해

중산층을 기반으로 하는 핵가족 모델이 무너지고 1인 가정, 이혼 가정, 조손 가정, 다문화 가정, 비혈연 가정의 비율이 많아지는 것을 과연 ‘위기’로 볼 것인지, 아니면 가족에 대한 새로운 정의가 필요한 것인지에 대하여 활발한 논의가 진행 중이다. 그런데 교회는 부부와 자녀로 구성된 이른바 ‘정상 가정’의 신화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정상 가정이라는 이상형에 현실을 맞추다 보면 상당수의 비정상 가정은 가정 이야기에서 소외될게 분명하다.

가정의 건강성을 좌우하는 것은 가족 형태가 아니라 가족 관계의 질과 소통을 중시하는 삶의 과정이어야 한다. 우리는 예수 자신이 전통적 의미의 가족을 더 좋아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성서에서 본다. 그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그를 보러 왔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는 대답한다. “누가 내 어머니며 내 형제들입니까?” 그리고 당신 주위에 둘러앉은 사람들을 돌아보시며 말씀하셨다. “보시오. 이들이 내 어머니요 내 형제들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받들어 행하는 사람이야말로 내게는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입니다”(마르 3,33-35).

루카 복음서(루카 11,27-28)에서 예수가 자신의 어머니를 축복한 것은 생물학적 어머니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녀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것을 지켰기 때문이다. 예수는 혈연 가족이나 가까운 친척의 한계를 넘어 하느님 나라의 보다 확장된 가족이 되기를 원했다.

부드러운 가부장을 넘어

민주화의 결실로 상명하달의 복종 문화와 권위주의는 극복 대상이 되었다. 개인들의 다양한 차이를 무시하고 공동의 목표를 향해 돌진하던 시대의 ‘국민’은 개인의 자율성에 기초한 주체인 ‘시민’으로 대체되었다. 아버지의 형식적인 권위만이 인정되던 권위주의 시대와 달리 아버지 학교에서는 자녀 양육과 가사노동, 도덕적 판단자의 역할을 직접 수행하도록 하면서 부드러운 아버지상을 훈련한다. 참가자들에게 부여되는 과제들은 부드러움을 몸에 익히는 데 유용한 장치들이다. 이러한 노력의 이면에는 아버지상을 새롭게 구성해 추락한 아버지의 권위를 다시 세우려는 변함없는 의지가 담겨있다.

“아버지의 권위가 실추되었다”, “아버지들에 대한 대우가 예전 같지 않다”는 푸념은 사실 “요즘 애들은 싸가지가 없다”는 말만큼이나 시대를 불문하고 되풀이되어 왔다. 아버지 위기 담론은 새로운 아버지상(남성상)이 요구될 때마다 아버지인 남성권력이 취한 반복된 반응은 아니었는지 돌아볼 일이다. 예전의 권위만 회복할 수 있다면 엄하고 냉정하고 무심했던 이전 모습에 대해 회개하고 새로운 모습으로 거듭나겠다는 욕망의 또 다른 표현이어서는 안 된다.

혈연적 가족이 아니라, 대안적 관계 맺기를 통한 관계적 가족들이 대안운동, 공동체운동의 현장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전통적인 가족의 눈으로 보면 이상한 가족, 비정상 가족인데 예수께서 말한 확장된 가족의 모습은 이렇게 준비되고 있는 게 아닐까? 내 가족의 경계를 넘어서는 가족의 기쁨과 슬픔, 타인의 기쁨과 슬픔이 나와 무관하지 않다는 감각을 갖는 일, 이러한 신앙 감각을 나누고 공감하는 곳으로 아버지 학교가 자리매김하길 바란다.
 

경동현 (안드레아)
우리신학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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