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은의 신학 오디세이아]

내가 사는 지역은 여름에도 시원하기로 유명하다. 마크 트웨인은 샌프란시스코에서 여름을 보내고, 내 생애 가장 서늘한 여름을 보냈다고 할 정도니까. 하지만 올해는 사정이 좀 다르다. 갑자기 6월에 비가 내리는 이변을 보이기도 하고, 7월부터 무척 덥다. 물론 한국의 땡볕 더위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겠지만, 이곳은 에어컨 같은 장치가 전혀 없기 때문에, 그리고 내가 사는 집에는 선풍기조차 없기 때문에 이 더위가 몹시 어색하다. 더위에 전혀 대책이 없는 카페들은 너무 더워서 앉아 있기조차 어렵다.

그러고 보니 미국에서 공부하면서 여름을 느껴본 적은 거의 없는 것 같다. 시험, 논문을 편안한 마음으로 준비하는 시간은 주로 긴 여름방학이었기 때문이다. 책을 보호한다는 이유로 우리 학교 도서관은 정말 너무 시원했다. 그래서 나는 늘 담요를 싸가지고 다녔고, 히팅패드를 가지고 덜덜 떨면서 공부했다. 그런데 갑자기 이렇게 더운 날씨를 대하니 대략 난감해지면서, 학생 때만큼 부지런히 도서관에 가지 않는 게으른 나를 발견한다.

여름 미사 복장, 어떻게 입어야 합당할까?

이렇게 더운 여름을 보내다 보니 사람들의 옷차림을 유념해서 보게 된다. 반팔 옷을 입어 본 적이 거의 없던 나도, 반팔을 꺼내 입고 하루 종일 지내고 보니 정말 시원한 옷이 좋다는 생각을 한다. 어제는 도미니칸 대학에서 여름 학기 수업을 가르치는 친구를 위해서 3시간짜리 특강을 해 주었다. 마침 학생들은 모두 가톨릭 신자였는데, 쉬는 시간에 더운 날씨의 옷차림 이야기가 나왔다.

50대인 한 여학생은 이런 더운 날에 반바지 입고 미사에 참례하면 화를 내는 자기 본당의 신부님이 정상이 아닌 것 같다고 이야기했다. 하느님은 아무렇지도 않으신데 그게 무슨 문제냐며, 왜 자기의 반바지 차림은 문제가 되고 자기 남편의 반바지는 문제가 되지 않느냐고 반문했다. 미국 성당에서 옷차림을 가지고 이야기하는 경우는 정말 드문데, 이 학생의 경우 굉장히 보수적인 신부님을 만난 것 같았다. 미사 참례하는 우리 학교 여학생들의 옷차림을 보면, 가슴을 살짝 드러내 보인다든지, 어깨를 내놓는다든지 하는 일은 다반사다. 어느 때는 복사를 서는 여학생의 복장도 탑에 핫팬츠인 경우가 허다하다.

▲ “기온은 올라만 가고 열대야까지 있는 요즘에 성당에 오는 옷차림은 어느 정도여야 합당한 걸까?” 사진은 서울 시내 한 의류 매장에 전시된 여름 옷들의 모습 ⓒ문양효숙 기자

여름은 아무래도 옷차림에 대한 논란이 있는 계절인 것 같다. 어느 해 여름, 내가 아직 한국 수도회에 적을 두고 있을 때 수도복을 입은 나를 보고, 지나가던 어떤 사람이 “저 수녀님 보니 더 덥다”고 했던 말을 나는 아직도 기억한다. 나도 성당 갈 때는 깨끗하고 단정한 옷을 입어야 한다고 배우고 들었다. 엄마는 여름이면 정성껏 풀을 먹이고 다린 하얀 모시 한복을 입고 미사에 참례하시곤 했다. 그게 엄마의 신심이었고 신앙이었다. 점점 온난화 현상으로 기온은 올라만 가고, 열대야 현상까지 있는 요즘에, 성당에 오는 옷차림은 정녕 어느 정도여야 합당한 걸까?

지난 여름, 한국에 있을 때, 친구 수녀님이 집으로 와서 이야기를 하다 우리는 긴 산책을 했다. 세검정을 지나 체부동을 거쳐 청계천의 시원한 물에 발도 담그고, 그렇게 명동까지 걸어갔다. 그날이 주일이었는데 그 수녀님이 미사를 드려야 하기 때문에, 나는 새벽에 미사를 드렸지만 다시 한 번 더 드리기로 했다. 아니, 정확히는 성찬을 함께하고 싶었다. 그러나 성당 문을 여는 순간, 나는 실수했음을 깨달았다. 그 한여름 날의 산책길에 내가 입은 옷은 소매가 없는 원피스였기 때문이다. 아, 그냥 밖에 어디 카페에 가서 책을 읽으면서 기다려야 했나? 하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세상에서 가장 치명적인 총이 눈총이라는 것쯤은 잘 알지만, 이건 정말 식은땀이 흐르는 지경이었다.

성당 밖의 기온은 30도를 웃도는데, 성당 안에는 아주 화려한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자매들이 안내를 하고 있었고, 나를 보는 눈빛이 곱지 않음을 느꼈다. 나는 순간 ‘그래, 내가 민소매 원피스 입는 것이 적절한 드레스 코드가 아니지만, 이 삼복더위에 한복을 너무도 잘 차려입은 그 자매들은 또 무슨 오버인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물론 성당 안에 에어컨이 빵빵 나오니 땀이 흐를 것은 걱정할 필요가 없지만.

성체 영하러 어떻게 나가나 걱정이 되어서 미사 중 나 같이 소매가 없는 옷을 입은 자매들이나 반바지를 입은 자매들이 얼마나 되는지 살펴보았다. 제법 여기저기 짧은 소매나 반바지를 입은 자매들이 보여서 약간 안심이 되었다. 요즘 유행하는 짧은 바지를 입은 젊은 여성들을 보면, 발랄하고 상큼한 분위기에 정말 나까지 기분이 좋아진다. 더구나 가만히 보면 여성 신자들이 막무가내로 벗은 것이 절대 아니다. 혹시 자신의 몸이 보일세라 예쁜 스카프로 단정하게 가리고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강론 시간에 신부님이 여성들의 복장을 거론했다. 그날 신부님은 여름이 되니 창세기의 장면이 재현된다고 하며, 옷차림 좀 신경 쓰고 미사에 오라고 장황한 설교를 늘어놓았다. 도대체 얼마나 거슬리기에 복음을 선포하는 강론 시간의 벽두에 여성의 복장을 이야기하는지 당황스러웠다. 미사 후 공고 시간에 이야기했어도 심기가 심하게 불편하지는 않았을 것 같다.

짧은 옷이 문제일까, 보는 눈이 문제일까

나는 이런 엉뚱한 의문이 들었다. 이 상황에 대한 과잉반응은 저 젊은 사제의 문제일까, 아니면 여성들의 문제일까? 사실 그 강론의 요지는 여성들의 몸이 문제니 좀 가리라는 이야기인데, 아름다운 여성의 몸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는 눈의 문제는 아닐까? 여성들의 깜찍한 여름 복장을 보면서 창세기의 장면을 연상하는 것은 그 사람의 자유 혹은 한계이지만, 있는 그대로 창조하시고 “보시니 좋았다” 하신 하느님의 눈으로 보지 못하는 그분의 안목은 가히 섭섭했다. 또한 사제가 미사를 집전하는 주인이지만, 내가 교만하기 때문인지 쉰이 넘은 나이에, 젊은 사제의 옷차림에 대한 거창한 강론은 무척 불쾌했다.

사실 여성의 몸, 그리고 복식은 페미니즘적인 시각으로 볼 때 참으로 중요하고, 또 예민한 사안이다.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여성은 영원한 타자다. 타자로 산다는 것은 자기의 정체성이 남의 시각에 의해 정해지는 삶을 의미한다. 노출이 너무 심할까봐 신부님이 이야기한 것에 대해 뭘 그러느냐고 할지 모르겠지만, 여성 신자도, 아니, 그 누구도 자신의 상황과 상태에 맞추어 옷을 입을 수 있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왜 아름다운 것이 아름다운 것으로 보이지 않는지, 자신의 내면을 바라보지 않고 타자를 몰아세우는 것은 사회가, 혹은 교회가 가지는 슬픔이다.

이 시점에서 억눌린 정서가 주는 폭력성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자신의 잣대로 타자를 판단하고 단죄하는 것은 폭력적이다. 그 순간 나는 우리 학교 미사가 그리웠다. 내가 너무 미국식이 되어서 그런지는 모르지만, 자기의 아름다움을 그대로 하느님 앞에 봉헌하는 그런 전례가 나는 자연스럽고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날은 점점 더워지고, 지구는 온난화 현상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물론 미사에 경건한 복장으로, 잘 준비된 마음으로 오는 것은 당연하며 아름다운 일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사람들, 혹은 그렇지 못한 사람들, 그 틀 안에 있지 않는 사람들도 편하게 기도할 수 있는, 좀 더 자유로운 전례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지울 수 없다.

고백하건대, 나는 더운 여름밤, 명동 리어카에서 예쁜 5천 원짜리 귀걸이를 찾으면 숨겨진 보물을 찾은 듯 신나고, 맘에 드는 티셔츠를 2~3천 원에 사면 일주일이 행복한, 거룩하지 못한 수녀로서, 예쁜 반바지를 입고 미사에 오는 자매들의 패션 감각을 하느님께서도 기뻐하실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박정은 수녀 (소피아)
홀리 네임즈 수녀회. 1990년대 후반부터 미국에서 연구하며, 이방인이자 경계인으로 살아가는 자기 정체성에 대한 물음을 신학적으로 해석하고자 시도했고, 지구화된 세상에서의 '이주' 문제, 동양 종교의 몸 수행에 관한 책을 써 왔다. 현재는 캘리포니아 소재 홀리 네임즈 대학의 영성학 교수이며, '여성의 원'이라는 피정도 지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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