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캄보디아 선교 일기]

지난 2012년 말 대선 전에 농업협동조합이 금융기관으로 전락해 부정부패가 속속 드러나 조합의 이미지를 흐렸고, 쌍용자동차에서 불법정리해고를 당한 노동조합원 중 24명의 노동자와 그 가족이 목숨을 잃어 노동조합이 죽음의 이미지로 점철되었다. 지금껏 노동자들은 대기업 안에서 노동조합을 결성하지만 열악한 환경에서 간신히 목숨을 연명하는 임금으로 허리띠 졸라매면서, 환율이 어쩌니, 나라 경제의 위기가 저쩌니 하는 거짓 뉴스들에 겁먹어, 대기업 이익만을 챙겨주는 경제정책을 묵묵히 감내해왔다. ‘조합’이라는 말을 꺼내기가 무색하다.

가끔 그런 공상을 한다. 노동자들이 부당해고를 당해 죽음으로 내몰리기 전에, 한 날 한 시에 모두 대기업만 살찌우는 종노릇을 때려치우고 당당하게 사퇴를 하고 나오면 어찌될까? 정말 할 일이 없어 모두 굶어 죽을까? 노동 구조가 바뀌지 않을까? 기쁘게 열심히 일하고, 일한 만큼 정당한 몫을 받는 삶은 단지 보랏빛 꿈일까?

선교사 신혼부부가 캄보디아에 공동체를 일구기까지
가난하지 않았으면 겪지 못 했을 체험과 은총

몇 해 전 선배 신부가 “선물 받은 건데 너 입어라” 하고 셔츠를 내밀었다. 꼬리표에 적힌 ‘고엘 공동체―지속 가능하고 자립적인 공동체 운동’이라는 글귀를 보는 순간 가슴이 뛰었다. 곧바로 프놈뻰 남서부 벙뚬뿐에 있는 작업장으로 찾아갔다. 한정민 선교사는 나에게 마당 한 켠에서 천연염색을 하는 과정을 보여주고, 건물 1층 한창 재단을 하고 미싱을 돌리는 봉제작업장을 지나, 2층으로 이어진 계단을 올라 전시방을 보여주었다. 벽 한 면에는 빼곡히 원단들이 쌓여있고, 다른 세 면은 부인이 직접 디자인한 옷과 인형들이 진열된 방. 그 마룻바닥에 나를 앉히더니, 한 선교사는 천연염색, 원단, 옷 이야기가 아니라 사람 이야기를 했다.

캄보디아에 처음 왔던 때, 가난한 캄보디아 농민들이 자립하도록 돕고 싶었다는 자기 이야기부터, 고엘 공동체가 만들어지고 자리를 잡을 때까지의 힘든 시간을 함께 견뎌온 아내, 그리고 그 힘든 시간 속에 태어난 딸 ‘사랑이’ 이야기, 그리고 함께했던 프놈뻰과 따깨오의 캄보디아 사람들 이야기를. 그 이야기를 들으며 난 이 선교사 부부로부터 참 좋은 기운을 느꼈고 고엘 공동체 운동에 매료되었다. 그 뒤로 여기 저기 입소문을 냈고, 지인이 찾아오면 직접 데리고 가서 내 사도직인양 자랑스레 소개를 하기도 했다.

▲ 고운 색 물들이는 가족, 2013, 프놈뻰 ⓒ김태진

“여기 앉아서 저 천연염색 원단을 볼 때마다 ‘하나님께서 살아계신다’라는 느낌을 받아요.”

얼마 전 선배 신부님 두 분과 한국에서 오신 수녀님 한 분을 모시고 찾아갔을 때 한 선교사는 그렇게 말을 시작했다. 그는 처음부터 천연염색을 하려 하지도 않았고, 그쪽에 지식이나 경험이 있지도 않았다. 캄보디아에 처음 와서 무너져가는 농촌을 보면서 그저 그들이 재정적으로 힘을 갖고 되살아나기를 바랐을 뿐이다.

캄보디아 농민들은 대부분 쌀농사를 짓는다. 캄보디아 남쪽 ‘따깨오’ 도(道)는 전국에서 두 번째로 쌀 생산이 많은 도다. 쌀농사를 빼면 다른 작물 재배는 1%도 안 된다. 사람들이 채소를 먹지만 그 채소들이 어디서 오는지 아무도 모른다. 캄보디아 남동부의 다른 도들인, 쁘레이벵, 스바이리엉도 별반 다르지 않다. “논 갈고, 씨 뿌리고, 모 자라면 모내기해주고, 벼 자랄 때 조금 신경써주고, 놔뒀다가 벼 베주면 끝이에요. 1년 중에 8주에서 10주 정도만, 많이 쳐도 석 달만 농사짓고 나머지 9개월은 일 없이 그냥 놀아요.” 이모작도 근처에 저수지가 있거나 수로가 지나가야 할 수 있고, 대부분의 논은 빗물이나 비로 늘어난 강물이 넘쳐 들어오기를 기다리는 천수답이다.

2003년 처음으로 혼자 캄보디아에 가겠다고 했을 때 어머니도, 친구들도 만류했지만 그는 딱 3년만 하느님께 봉헌하겠다는 마음으로 왔다. 온지 얼마 되지 않아 다른 교회에서 캄보디아로 비전트립을 나온 젊은이들 중 지금의 아내인 서윤정 선교사를 만났다. 그 뒤 서로 이메일을 주고받으며 책을 나누고 마음을 나누다가 결혼을 하고 함께 캄보디아로 들어왔다.

“여기 제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요. 빈손으로 시작했거든요. 처음에 결혼하고 캄보디아 올 때 담임 교회의 부목사님은 결혼한 신혼부부가 무슨 선교냐고 만류하셨고 우리가 극구 가겠다고 우기니, 그럼 선교에 대한 부담 없이 그냥 지내는 게 좋으니 후원 받지 말고 그냥 가라고 하시더군요. 그래서 대신 어머니께 부탁을 드렸어요. ‘저희들 후원도 없으니, 부조 들어온 돈, 저희들 주세요’ 하고.

이러저러해서 한 천오백만 원을 모아왔어요. 그 돈을 하나님처럼 모시고 살았어요. 한 1년이라도 쓸 줄 알았는데, 7개월 만에 다 나가더군요. 하나님께서 어떻게든 빨리 없애게 하시더라고요. 그 돈이 다 떨어지고 나니까 하나님이 보이는 거예요. 거짓말 안 보태고 그 전까지는 돈 천오백만 원밖에 안 보였어요.”

수중에 아무것도 남지 않았을 때 한 선교사는 가난한 사람의 심정을 알게 되었다. 무너지는 농촌 공동체를 일으켜 세우는 구체적인 방법을 찾느라 2년간 고민을 했고, 결론은 농한기에도 그들이 할 수 있는 일거리, 바로 천연염색과 베 짜기였다. 캄보디아의 전통 기술로 캄보디아의 전통 공동체성을 회복하려는 시도였다.

‘고엘’이라는 공동체의 이름도 이 염원을 잘 담은 말이다. 고엘은 구약성서에서 볼 수 있는 히브리 전통 개념으로 ‘가장 가까운 친족으로서 어려움 당한 자를 구해 줄 의무와 권리가 있는 자’를 말한다. 캄보디아 전통 사회에도 마을마다 어려운 일이 생기면 서로 돕는 풍습이 있었다. 지금은 젊은이들도 도시로 다 떠나고, 예부터 내려오던 공동체 정신도 사라졌다.

한 선교사는 재정적 어려움뿐 아니라 이런저런 이유로 그 뒤로도 몇 년 힘든 시기를 보냈다. 천연염색한 천은 쌓여 가는데 뭐라도 해봐야 되지 않겠는가 해서 옷과 인형을 만들기 시작했다. 아내인 서윤정 선교사는 그래픽디자인을 전공하기는 했지만 의류 디자인이나 제작은 경험이 전혀 없어, 처음 하는 일이 마음대로 되지 않아 많이 울기도 했단다. 그 시간 동안 이 부부는 캄보디아 동료들과 함께 가난하지 않았으면 절대 경험할 수 없었고, 일어나지도 않았을 많은 일들을 겪었다. 한 선교사는 그 시련의 기간을 직원 서른여섯 명이 함께한 체험이자 함께 받은 은총으로 회상한다.

▲ 물들이고 베 짜고, 연도 미상, 따깨오 ⓒ한정민

도시로 떠났던 젊은이들이 돌아오는 공동체

이제 고엘 공동체는 자리를 잡았다. 현재 서른여섯 명의 직원 중 일부는 천연염색을 하고, 일부는 마을에서 베 짜기를 가르친다. 따깨오 주 여러 마을에 흩어진 140 가정이 고엘 공동체의 직물 제작 담당이다. 80 가정이 매달 일거리를 받아 하고, 돌봐야 할 아이들도 많고 베 짜는 실력도 그리 좋지 않은 나머지 60 가정은 두세 달에 한 번씩 일거리를 가져간다.

그래도 젊은이들이 마을로 돌아오는 걸 보면 희망은 있다. 고엘 공동체에서 일하는 약 80 가정 중에서 서너 가정의 자녀들이 대도시 공장에서 일하다가 고향으로 돌아오기도 했다. 매달 일을 받아가는 이 80 가정 중 20 가정은 베틀 실력도 좋을 뿐 아니라 계량 베틀을 쓴다. 일반 가정들이 일반 베틀로 하루에 3~4미터 짤 때 고엘 공동체의 가정들은 5~6미터를 짠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 가정에 임금을 무턱대고 더 많이 줄 수는 없다.

“우리가 고엘 공동체 가정의 임금을 마을에서 일반적으로 주는 임금보다 지나치게 더 많이 줄 수는 없어요. 그 마을들이 천 년 넘게 베틀질을 해 온 곳이고 그들 나름대로의 체계가 있는데 우리만 너무 많이 주면 그 오랜 체계가 무너지거든요. 임금을 많이 주다가 마을과 뭐가 잘 맞지 않아 고엘 공동체가 그 마을에서 철수하게 되면, 마을 체계만 무너뜨리는 꼴이 되요.”

고엘 공동체에 속한 가정들은 많게는 한 달에 150~200불 정도 수입이 생긴다. 캄보디아 농민수입 기준 상위 10~15%의 소득이다. 그러기에 딸들이 베를 짤 줄 아는 집에서는 도시 공장에 일하러 나간 딸을 고향으로 부르기도 한다. 천연염색이나 베 짜기의 노동 방식은 전통 방식인데 도시의 기계화된 공장에 다니는 것보다도 오히려 수입도 좋고 마을이 살아나니 고향으로 젊은이들이 조금씩 되돌아오고 있다. 한 선교사는 젊은이들의 귀향이 계속 이어지기를 희망한다.

한 선교사는 현재 고엘 공동체의 140 가정이 한 마을에 모여 있는 게 아니라 17개 정도 마을에 흩어져 있어 힘이 분산된다며 아쉬워한다. 만일 한 마을의 150 가정이 공동체에 가입하고, 그런 마을이 두세 개 모여 힘을 발휘할 수 있으면, 그런 곳에 한두 군데 정도 작업장을 마련해 앞으로 남은 선교 기간 2년 반 사이에 고엘 공동체의 기반을 다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모두 500 가정 정도 되어 공동체 사업이 안정되면 순이익 중에서 25%는 고엘 직원들 즉 주주, 조합원의 몫으로, 25%는 베틀로 직물을 짜는 가정들에게, 10%는 복지사업에 사용하고, 나머지 30%는 고엘 공동체 회사 미래 투자를 위한 몫으로 남기는 분배를 할 수 있어요. 그렇게 계산하면 1년에 30만 불 정도가 마을의 베 짜는 사람들에게 돌아가게 되지요. 그러면 젊은 사람들이 많이 빠져나간 농촌 마을에, 마을 이장님과 상의해 공동으로 필요한 트랙터나 이앙기 같은 기계를 마련할 수 있지요. 공동체의 수익이 농민들에게 힘을 실어주는 기반을 마련하는 일, 마을 공동체를 살리는 일에 종잣돈으로 투자되었으면 해요.”

한 선교사의 이런 바람은 당장 실현되지 않을 수도 있다. 마을 이장님들이 지금 당장 먹고사는 게 힘들다고 하시면 수익을 사람 수대로 나누어 분배를 하게 될 수도 있다. 공동체 수익이고 그들에게 권리가 있기 때문이다. 함께 일을 하면서 공동체 회복의 중요성에 대해 설명하고, 미래를 위한 공동 투자를 제안하는 데 최선을 다하지만 양성이나 신뢰의 부족 혹은 경제적 여건의 이유로 마을 사람들이 그냥 인원수대로 나누어 갖자고 하면 그렇게 갈 수 밖에 없다. 그때가 고엘 공동체 운동이라는 선교의 결실을 평가하는 시간이 될 게다.

캄보디아인들의 주체적이고 지속 가능한 운동이 되기를 바라며

재정적으로 독립은 했지만 아직 남은 일이 있다. 한 선교사는 오랫동안 함께 일해 왔던 현지 전수자 한 명을 1년 전 쯤에 활동 지역에 작업장을 마련해 파송했다. “제 기대가 너무 컸었어요. 처음에는 함께 일하는 가정이 140 가정이나 되니 별 문제 없이 잘 꾸려나가겠다 싶었는데 그 가정들을 챙기기는커녕 작업장에서 함께 일하는 직원들조차 꾸려가지 못하더군요.” 현지인에게 책임을 맡겼을 때 공동체를 이끄는 지도력과 조직 관리능력이 부족해서 문제들이 생겼다.

하지만 한 선교사는 언제까지 자신이 이끌고 갈 수는 없다고 말한다. 그는 2003년부터 1차로 6년 선교를 했고, 1년 쉬고 다시 2차로 6년 만기 선교를 하고 있다. “앞으로 2년 반이 지나면 제 6년 기한 선교가 끝나요. 그때는 지금의 이 공동체가, ‘고엘 공동체’라는 이름으로 계속되건, 아니면 공동체 정신을 살려 다른 이름으로 다른 형태의 사업을 꾸려가건 모두 이 캄보디아 사람들의 몫이지요.”

한 선교사는 서서히 현지인들에게 넘겨줄 채비를 한다. 주체적이고 지속 가능한 캄보디아 사람들의 운동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고엘 공동체 이후의 계획을 물었다. “하나님께서 저하고 아내에게 같은 마음을 주시면, 면화를 재배하든지, 누에고치를 치든지, 직접 농민들하고 함께하며 조금 덜 가공된 원재료로 일하고 싶어요. 그때가 진정한 협동조합으로 가는 시간이 되겠지요.”

그의 마음은 여전히 농민들과 함께 있다. 어디서 무슨 재료로 일을 하건 그와 그의 아내는 시골 마을 사람들의 삶에 고운 물을 들이며 살아갈 게다.


김태진 신부
(프란치스코)
예수회, 캄보디아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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