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고리 원전에서 삼척까지 도보 순례에 나선 성원기 교수

▲ 고리 원전에서 삼척까지 탈핵 순례에 나선 성원기 교수 ⓒ한수진 기자

“모든 게 신비예요. 마치 예정된 길을 걷는 것 같아요.”

성원기 교수(강원대학교 전자정보통신공학부)가 전날 순례길에서 우연히 만난 시인의 시집을 배낭에서 꺼내며 말했다. 성 교수는 17일간 부산 고리 핵발전소부터 신규 핵발전소 건설이 예정된 삼척까지 총 243㎞를 도보로 순례하며 핵발전의 위험을 알리고 있다. 시인은 공교롭게도 성 교수가 재직 중인 대학을 졸업했고, 자신도 강정마을 평화순례에 다녀온 적이 있다고 반가워했다. 그의 배낭에 꽂힌 깃발에는 한반도 그림 위에 그와 동행했거나 길에서 마주한 이들의 서명이 여정에 따라 적혀있었다.

성 교수는 6월 6일 부산 기장 길천성당을 출발해 포항 구룡포성당까지 1차 순례를 마치고, 6월 28일 다시 구룡포성당에서 2차 순례를 시작했다. 영덕과 울진을 거쳐 7월 9일 삼척 성내동성당에 도착할 계획이다. 29일 포항 대해성당에서 성 교수를 만나 ‘탈핵희망 국토도보순례’ 7번째 구간을 동행했다.

성당에서 시작해 성당에서 마치는 순례는 성 교수가 2011년 5월 부인과 함께 걸었던 스페인의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순례 중에 각기 다른 나라에서 온 20명의 사람이 천 년 전에 지은 작은 성당 기도 방에 모였어요. 신부님은 각자 자신의 언어로 기도를 하자고 했지요. 서로 말이 통하지 않아도 눈빛만으로 마음이 전해지더라고요. 매일이 은총의 시간이었어요.”

성 교수는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쉬엄쉬엄 하루를 걷고, 기도하고, 해 지면 잠자리에 드는 40일을 보내며 순례하는 법을 몸으로 체득했다. 그는 “천국을 미리 살아보는 경험을 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그가 기억하는 순례는 “자신을 비우고 적게 가지는 것의 의미를 알아가는 과정”이었다. 순례길의 단순한 생활과 기도는 그동안 자신이 무엇에 얽매어 복잡하게 살아왔는지를 깨닫게 했다. 불필요한 삶의 무게를 과감히 던지자, 하느님이 창조한 사람의 모습으로 되돌아가는 길이 보였다. 성 교수는 “사람은 기본적으로 하느님을 향하게 되어 있다”면서 “물질에 눈과 귀가 가려져 하느님 안에 살지 못하는 것뿐”이라고 말했다.

순례가 주는 기쁨을 알게 된 성 교수는 스페인 여행을 마치면서 언젠가 한반도를 걷겠다고 결심했다. 그가 굳이 순례 장소로 한반도를 택한 이유는, 여행에서 만난 외국인들이 그에게 ‘북쪽이냐, 남쪽이냐’를 물을 때마다 그동안 일상으로 받아들여 인식하지 못했던 분단이 현실로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그는 육로로 국경을 넘나드는 대륙의 사람들과 달리 배나 비행기를 타고 탈출하듯 국경을 건널 수밖에 없는 분단국가의 답답함을 넘어서고 싶었다. 국경보다 높고 두터운 휴전선을 건널 수는 없어도 갈 수 있는 데까지 가보자는 생각이었다.

몇 달 뒤, 성 교수는 ‘땅 끝 마을’ 해남에서 국토순례를 시작했다. 순례를 하는 동안 기도의 지향은 ‘통일’로 정했다. 한반도 끝에서 끝까지 걸을 수 있는 날이 빨리 오게 해달라는 염원을 담은 기도였다.

“제가 하느님께 기도할 수 있는 존재인 것이 참 좋았어요. 걷는 동안 하루 종일 묵주기도를 바치는데, 지팡이를 짚고 걷느라 묵주를 손에 쥘 수 없으니 묵주 알 대신 오른손 손가락을 짚으며 기도를 바쳤어요. 30일쯤 걸어 보성에 도착하니 오른쪽 장갑의 손가락 끝부분이 헤져있더라고요.”

▲ 순례를 시작하기 전 포항 대해성당에서 성체조배하는 성원기 교수 ⓒ한수진 기자

▲ 순례길에 들른 포항 죽도성당에서 주임사제 원유술 신부가 성원기 교수와 순례자들에게 안수하고 있다. ⓒ한수진 기자

2년 만에 다시 시작한 국토순례의 일정은 아예 성당에서 출발해 성당에서 마무리하도록 짰다. 기도의 지향을 ‘탈핵’으로 정하고, 핵발전소가 있는 부산 · 경주 · 울진과 핵발전소가 건설 중인 울산, 예정지인 삼척을 중심으로 지도에서 성당을 찾았더니 예상치 못한 훌륭한 순례길이 완성됐다. 성당과 성당을 잇는 순례 일정은 성 교수의 평소 일상과도 맞닿아 있다. 그는 집에서 학교가 있는 삼척시까지 12㎞ 거리를 자전거로 출퇴근하면서 매일 성체조배를 한다. 성 교수는 “성체조배로 시작해 성체조배로 끝나는 탈핵 순례가 바로 한국판 산티아고 순례길”이라며 웃었다.

성 교수는 이번 순례길을 걸으면서 “하느님과 함께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게 아닌, 실제로 그분이 함께하고 계심”을 느낀다고 했다. 순례 둘째 날, 오후 4시밖에 안 됐는데 더 이상 걷기가 힘들었다. 조금 더 걸어도 마땅히 머무를 지역이 지도에서 보이지 않아 고민이 됐다. 어찌해야하나 고개를 드는 순간, 길 건너편에 성당 표지판이 보였다. 성 교수는 곧장 성당에 들어가 성체조배를 하고 근처에 잠자리를 얻었다.

“순례자들은 그런 믿음이 없으면 못 걸어요. 혼자 어떻게 걷겠어요? 나중에 생각해보면 하느님이 그날 필요한 것을 다 마련해 주시더라고요.”

그는 순례길에 만나는 사람들에게서도 하느님의 감사함을 느꼈다. 성 교수의 성체조배를 위해 휴일에 성당 문을 열어주고 음료수까지 쥐어준 사제, 같이 기도하겠다고 응원해준 교우, 순례에 동참하러 찾아온 이들을 맞이하면서, 그는 모두가 하나의 존재 안에 있음을 느꼈다. 그리고 “세상이 함께 선을 향해 나갈 수 있음”을 확신했다.

“제가 어느 날 갑자기 벌떡 일어나 걸은 건 아니에요. 그렇다고 계획을 미리 세워 떠난 것도 아니었죠. 저를 도구로 쓰시려는 부르심에 그저 응답한 거였어요. 그걸 누구한테 드러내고 싶지 않아 혼자 시작했던 거고요. 그래서 늘 감사기도를 해요. ‘저를 하느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에 불러주셔서 감사합니다.’”

성 교수는 이 시대에 하느님의 뜻은 “당신의 자녀들을 핵의 위험에서 벗어나게 하시는 것”이라고 강하게 말했다.

“핵이 왜 위험한지는 모든 사람이 알고 있어요. 핵은 사람의 수명이 10만년 쯤 돼야 감당할 수 있는 물질이에요. 하지만 사람을 비롯해 모든 생명체는 불과 100년을 못 살잖아요. 창조질서가 바로 여기서 멈추는 거예요. 후쿠시마는 하느님이 인간에게 보여준 경고였어요. 그럼에도 인간이 그런 끔찍한 경고에서 교훈을 얻지 못한다면, 도대체 뭘 어떻게 해야 할까요?”

성 교수는 핵발전을 나무와 비교했다. 나무는 불을 붙이면 재가 돼 자연으로 돌아가 순환하지만, 인류는 핵발전소에서 나오는 핵물질의 처리법을 아직 찾아내지 못했다. 방법을 모르니 처리 비용과 시간이 얼마나 들 지는 아무도 모른다. 성 교수는 “핵은 원천적으로 인간의 영역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1945년 미국이 일본 히로시마에 투하한 우라늄의 양은 800g이었다. 당시 8만 명이 사망했고, 그 이후 사망한 숫자는 14만 명에 이른다. 그런데 원자로 1기가 1년에 만들어내는 핵물질의 양은 무려 1,215㎏이다. 핵발전소를 10년 가동하면 히로시마에 떨어진 양의 1만 5,000배의 핵물질이 남는다.

▲ 7번째 날 순례에는 2차 순례 전 일정에 참가하는 김용하 삼척핵발전소반대투쟁위원회 대표와 최승국 삼척환경시민연대 대표를 비롯해 포항환경운동연합 활동가와 회원 등 8명이 동행했다. ⓒ한수진 기자

핵발전의 위험성을 생각하면 성 교수의 머릿속에 그려지는 삼척의 미래는 암울하다. 핵발전소 건설 예정지에서 삼척 시내는 반경 10㎞ 안에 들고, 그가 가르치는 학교는 13㎞ 안에 든다. 핵발전소에서 나오는 방사능은 반경 30㎞까지 암 발생 등의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삼척에 핵발전소가 들어선다면, 다른 지역에 갈 형편이 되는 사람들은 모두 떠날 거예요. 대학교도 이전하게 될 거고요. 그러면 농민이나 가난한 사람만 삼척에 남게 되겠죠. 청정지역이라 불리는 삼척과 강릉의 해수욕장들도 더 이상 사람이 갈 수 없는 곳이 될 거예요.”

그럼에도 핵이 안전하고 값싼 에너지라고 홍보하는 정부나, 가정용보다 싼 값에 산업용 전기를 이용하고 그 비용을 서민들에게 전가하는 대기업들에 성 교수는 답답함을 토로했다.

“핵으로 만드는 전기가 싸다고 하지만, 여기엔 핵물질 처리비용이 포함되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게다가 산업용으로 책정된 전기료는 가정용보다 낮고, 생산비용보다도 10% 이상 낮아요. 거기에 가정용은 누진제까지 적용하잖아요. 결국 국민들이 기업의 전기사용료를 내주는 거죠. 그런데도 기업들은 전기료를 올리자고 하면 경제가 무너질 것처럼 호들갑을 떨어요. 제품 원가에서 전기료가 차지하는 비중은 1~2%에 불과한데도 말예요.”

이미 많은 이들이 알고 있다. 정부와 기업이 핵발전소를 지으려는 이유를, 주민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강하게 밀어붙이는 이유를, 성 교수와 같은 이들이 뜨겁게 달궈진 아스팔트 위를 걷는 이유를. 그럼에도 이 왜곡된 고리를 쉽사리 끊지 못하는 이유는 각자의 크고 작은 욕심이 실타래처럼 얽혀있기 때문이다. 어디서부터 풀어야할지, 인간의 능력으로는 찾기 어려운 문제인지 모른다. 그래서 성 교수는 하느님에게서 답을 구하고 있다. 그분이 하시는 대로 꾸준히 가다보면, 언젠가 그분이 원하시는 대로 이루어지리라. 성 교수는 굳게 믿고 있다.

* 페이스북 ‘삼척평화’ 페이지(www.facebook.com/samcheok.peace)에서 ‘탈핵희망 국토도보순례’ 소식을 볼 수 있다. 순례에 동행할 참가자도 모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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