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만사 인생사]


우리 부부가, 5년이 지나면 기필코 도시를 떠나리라 마음먹은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이를테면 공기가 나쁘다든가, 아파트 생활이 진력난다거나, 인간의 온정이 그립다거나 하는 따위가 그것인데 사실 까놓고 말하자면, 매우 창피하게도, 그런 것들은 공허하다 못해, 배부른 도시인의 게트림 같은 얘기라고 지탄 들어 마땅한 이유에 불과하다.

그 무엇보다도 그런 어설픈 이유로 시골에 들어가서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불가하다는 것을 나는 잘 안다. 말하자면 딱히 도시를 떠나야 한다는 당위성이 우리 부부에게는 없다. 그런데 우리는 정말 도시를 떠나고 싶다. 진심으로 그렇다. 진심으로 도시를 떠나고 싶기에 우리는 우리가 그래야 하는 이유를 찾기로 했다. 그리고 너무나 쉽게 그 이유를 찾았다.

아파트 값이 떨어진다고들 한다. 그리고 그것은 최소한 몇 년은 지속될 거라고도 한다. 바로 이거다. 우리는 아파트 청약을 받지 말아야 한다. 그랬다가는 거지꼴 난다. 세대주가 된 이래 20년 동안 단 한번도 내 앞으로 된 집을 가져본 일이 없는 나는 (게다가 수십 개월의 두툼한 이력이 들어 있는 청약통장까지 있는 나는) 보나마나 1순위다. 아파트 청약에 당첨될 확률이 단연 발군이다. 마누라는 바로 그것 때문에 대출을 받아서라도 내 집을 장만하자는 꿈에 부풀어 있었고 작년까지는 그렇게 하려고도 했었나 보다. 그러나 MB 정권의 본말이 전도된 경제정책 덕분에 우리는 깨끗하게 그 꿈을 단념할 수 있었다.

그렇다. 우리는 도시에서 살 수 없다. 대출을 받아 그 원금과 이자를 갚느라 등골이 휘는 것보다는 벌어들이는 모든 돈을 쓰임새 좋게 쓰는 것이 대세라는 것에 우리는 이견 없이 합의했다. 말하자면 우리는 ‘아름다운 항복’을 하고 시골로 내려가는 것이다. 우리 부부는 바로 전화를 했다. 누구에게? 장호원이라는 멀지 않은 곳에 펜션과 농원을 지어 솜씨 있게 농사를 짓고 계신 우리 마누라의 제자에게 말이다. (제자라고는 하나 그 분은 60이 다 되신 분이다)
그리고 그분은 단박에 우리를 호출하셨다.

“시골에 오려면 배워야 합니다. 마침 메주를 빚으려고 하니 친구 분들과 내려오세요. 가구당 메주콩 한 말씩 준비하겠습니다.”

먼저 가신 운태형의 미망인 글라라 형수를 모시고, 귀농에 관심이 있는 후배 안토니오와 프란체스코 부부를 대동하고 드디어 우리는 메주를 빚으러 갔다.

“메주는 말이야, 콩을 어떻게 삶는가가 가장 중요하지.”
“어허. 자네는 뭘 모르고 있구만. 절구질을 적당히 하지 않으면 건더기가 없어진다구.”
“토마스 메주 만들어 봤나봐?”
“이 사람이 남편을 뭘로 보고... 이 사람아 나 농촌 출신이야..”
“10살까지밖에 안 살았다며.”
“다 기억나. 이거 왜 이래...”

이윽고 목적지에 도착했고 친절한 제자님은 이미 콩을 불려서 가마솥에 안쳐놓고 계셨다. 가마솥은 무진장 컸고 날씨는 엄청나게 추웠다.

“아이구 오셨네요. 일단 남자 분들은 콩 좀 저어 주시고요. 자매님들은 비닐하우스로 들어오셔서 몸을 좀 녹이세요.”

여자들이 비닐 속으로 사라지고 남자들만 남았다.

“뭘 저으라는 거야 형?”
“뭘 젓기는 콩을 젓는 거지.”
“콩을 왜 저어?”
“아 이 사람아 바닥에 눌어붙어서 타면 안 되잖아.”
“오케이. 오.... 형 진짜 잘 아는 모양이네..”
“거럼..”

나는 슬그머니 작업 감독으로 군림했고 두 후배들은 그 추위에 땀을 뻘뻘 흘리면서 콩을 저었다. 그때까지는 좋았다.

“콩 다 됐는데요. 이제 절구에 넣고 빻아야 하지 않겠어요?”
(미소를 지은 제자님) “앞으로 한 시간은 더 해야 하는데요.”

후배들의 입에서는 마치 겨울 들판의 황소처럼 거친 입김이 뿜어져 나왔고 동시에 그들의 눈은 붉게 충혈 되어 원망스럽게 나를 째려보기 시작했다.

“한 시간 지났는데요. 이제 절구에 넣고...”
“콩 네 말을 절구로 치대려면 몸살 나요. 저기 기계 있으니까 거기서 하세요.”
“그래도 절구로 해야...”

그때였다. 충혈된 눈을 치뜨며 안토니오와 프란체스코가 나의 팔을 나꿔챈 것은...

“형. 조용히 안 해?”

기계로 한다고 하지만 참으로 힘겨운 작업이었다. 갈아진 콩을 다시 갈고, 또 갈고.. 떠지지도 않는 찐득한 콩 뭉치를 퍼내느라 힘들고 허리를 숙이고 하느라 힘들고... 틀에 넣고 밟아 대느라 욕보고... 어찌어찌 해서 메주를 만들고 이제 짚으로 그것들을 묶을 차례가 되었다.

“다른 것은 몰라도 내가 새끼는 잘 꼬니까 나를 따라 하라구...”

나는 후배들에게 본을 보였고 우리는 열심히 메주에 새끼를 걸으려고 애썼다. 바로 그때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제자님이 오셨다.

“안되겠어요. 달아매는 것은 제가 해야 되겠어요.”

사실 전 과정을 다 그분이 해주셨다. 우리는 그분의 야무진 손놀림을 보면서 마치 견습생이 도공의 기술을 침 흘리며 바라보듯 프로와 아마추어의 깊은 심연을 체험해야만 했다. 그날 저녁, 술 한 잔 하면서 시종 말이 없다가 안토니오가 한마디 했다.

“그래도 형이 새끼 꼰 거.... 몇 개는 합격했잖아.”
“하긴.... 메주를 어떻게 만드는지는 배웠으니까 이제....”

참... 배울 일이 산더미다. 그런데.... 왜 그런지 기분이 좋다. 좋아 죽겠다.

 

변영국/ 토마스 아퀴나스, 서울 수송국민학교를 졸업했으며 희곡 쓰고 연출하는 연극인인 동시에 주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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