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은 오늘을 말한다 - 11]

“어떤 부자가 있었는데, 그는 자주색 옷과 고운 아마포 옷을 입고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살았다. 그의 집 대문 앞에는 라자로라는 가난한 이가 종기투성이 몸으로 누워 있었다. 그는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러나 개들까지 와서 그의 종기를 핥곤 하였다.” (루카 16,19-21)

이런 일이 벌어질 때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물론 라자로에게 사랑을 베풀어야 할 것이다. 매일매일 그럴 수 있을까? 누가 할 수 있을까? 라자로 같은 사람이 한두 사람이 아니라 무수히 많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웃을 사랑할 때, 그 이웃은 누구일까?

“개별 행동을 재촉하는 사랑의 역할 뿐만 아니라, 현대 세계의 문제들에 새롭게 접근하는 방식을 가르쳐 줄 수 있고 사회 구조들과 사회 조직, 법적 체계들을 내부로부터 쇄신할 수 있는 사랑의 힘을 보여 주도록 하여야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사랑은 사회적 · 정치적 애덕이라는 특징적인 형태를 띤다.” (간추린 사회교리, 207항)

지난 5월 16일 프란치스코 교종은 몇몇 신임 대사들 앞에서 자신의 의무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교황은 부자건 가난하건 똑같이 모두를 사랑합니다. 그러나 교황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부자들에게 가난한 사람을 도우라고 재촉해야 할 의무, 가난한 사람을 존중해야 할 의무, 가난한 사람을 북돋워야 할 의무를 갖고 있습니다.”

여기서 가난한 사람과 부자를 단순하게 경제적인 차원에서만 이해해서는 곤란하다. 오늘날 삶의 모든 분야는 밀접하게 결합,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경제적으로 가난한 사람의 경우, 정치적으로는 약자일 수밖에 없으며, 문화적으로는 배제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교황이 말한 가난한 사람은 ‘사회적 약자’라고 이해해야 한다. 부자 역시 마찬가지다. 단순히 돈을 많이 갖고 있는 사람이라기보다는 ‘사회적 강자’ 쯤으로 이해해야 한다.

여기서 ‘사회적’이라는 수식어를 붙이는 이유는 바로 모든 사람이 그 본성으로 갖고 있는 ‘사회성’ 때문이다. 게다가 그가 사회 안에서 약한 처지에 놓여있으며, 그 원인에는 자신의 탓(무능, 게으름, 운)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요인도 작용했기 때문이다.

원인이 개인에 있든 사회에 있든 그 많은 ‘사회적 약자들’이 희망을 가질 수 있는 근거는 이른바 ‘사회적 이동’이 가능하다는 믿음 때문이다. 아무리 사회적 불평등이 심화되었다고 하더라도 열심히 일하면 이 사회 안에서 사회적 강자가 될 수 있다는 희망에 대한 믿음 말이다. 그런데 그나마 남아있는 희망과 믿음이 소멸되고 있다.

약자에 대한 냉소, 강자에 대한 선망…
불평등 심화시키는 자양분 아닐까

우리의 태도를 솔직하게 성찰해야겠다. ‘약자’를 향한 우리의 시선에는 ‘사회성’이 담겨있는가? 경제적으로 가난한 사람을 보면서 혹시 게으름이나 무능의 당연한 결과라고 보는 것은 아닌가? 혹은 그런 부모에게서 태어난 것 자체를 ‘불운’으로 치부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정치적으로 혹은 문화적으로 소수자인 경우, 곧 다른 사상을 갖고 다른 가치를 추구하는 소수의 사람을 보면서 혹시 걸러내야 할 불순한 ‘이물질’ 쯤으로 보는 것은 아닌가?

거꾸로 힘센 사람, 강자를 대할 때는 어떤가? 경쟁력을 갖추고 능력이 출중하기 때문에 당연한 것이며, 혹은 부모를 잘 만난 행운 때문이라 여기며 부러워하지는 않는가? 혹은 그 힘에 편승하기 위해, 혹은 힘센 이들의 눈에서 벗어나지 않기 위해 충실히 부역하지는 않는가? 그것이 내가 살아남는 길이라고 받아들이고 있지는 않은가?

우리의 그 같은 이중의 태도, 약자에 대한 냉소와 강자에 대한 선망이 혹시 사회적 불평등을 심화시키는 자양분이 되지는 않을까? 더 나아가 힘센 사람들이 사실은 사회 구성원 모두의 것인 사회자원을 독점했거나, 정치 영역에 자기들에게 유리하도록 영향력을 발휘해서 제도와 법과 질서를 만들고, 그것을 거의 독점적으로 이용하여 강자의 자리에 오르거나 그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럼으로써 사회적 불평등이 심화, 또 심화되는 것이 아닌가?

백번 양보해서 사회적 불균형이 불가피하다고 인정하더라도, 상식의 사회는 그 불평등을 개선하려 하지, 심화시키지는 않을 것이다. 사회적 불균형을 개선하려는 일은 당연히 구성원 모두의 책임이며 의무이겠지만, ‘사회적 불균형’의 ‘세계화’ 시대에 그 책임과 의무는 무엇보다도 사회와 공권력에 있다. 그 일을 하라고 모든 시민은 권력을 몰아준 것 아닌가!

그런데 만일 정치와 사회가, 그리고 공권력이 불균형을 개선하려 총력을 기울이기보다, 불평등을 심화시키는 데 충실히 봉사한다면……. 예를 들어, 성장을 위해 자본에는 세금을 낮추고, 노동에는 세금을 높인다면……. 보통 사람에게는 무슨 말인지도 잘 모를 ‘페이퍼 컴퍼니’니 ‘조세피난처’에 대해 유전무죄, 부채에 허덕이는 서민은 무전유죄라면……. 공정거래를 내세우지만 사실은 약육강식의 승자독식을 정당화한다면……. 그럴 때 공권력(公權力)은 진짜 공권력일까? 특정 계층을 위한 사권력(私權力)일까?

교황의 말을 조금 바꾸면, 국가의 공권력은 “부자건 가난하건 똑같이 모두에게 봉사해야 한다. 그러나 공권력은, 그 권력의 원천인 국민의 이름으로, 부자들에게 가난한 사람을 도우라고 재촉해야 할 의무, 가난한 사람을 존중해야 할 의무, 가난한 사람을 북돋워야 할 의무”를 갖고 있는 것 아닐까?

동물의 세계는 약육강식의 법칙을 따른다. 아무리 그래도 동물은 먹을 만큼만 사냥한다. 포식의 서열에서 위계가 올라갈수록 그 개체수가 적고 아래로 내겨갈수록 개체수가 많은 이유도 그 때문이다. 사람이 사는 사회는 공생의 법칙을 따라야 한다. 아무리 사회적 약자라도 함께 사는 사회가 사람이 사는 사회다.

“의심할 여지없이 사랑의 행위, 자비의 행위를 통하여 인간은 바로 지금 여기에서 자기 이웃의 실재적이고 절박한 필요에 응해야 한다. 그러나 자기 이웃이 가난에 빠지지 않도록 사회를 구성하고 조직하고자 애쓰는 사랑의 행위도 마찬가지로 반드시 필요하다.” (간추린 사회교리 208항)


박동호 신부
(안드레아)
서울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 신정동성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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