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30일 (연중 13주일) 루카 9,51-62

오늘 복음에는 우리가 이해하기 어려운 말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는 사마리아 사람들을 하늘로부터 불을 내려오게 하여 그들을 불살라 버리자고 합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라고 말하자 예수님은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 기댈 곳조차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아버지의 장례를 치른 후 예수님을 따르겠다는 사람에게 예수님은 “죽은 이들의 장례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고, 너는 가서 하느님의 나라를 알려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또 식구들과 먼저 작별 인사를 하고 와서 따르겠다는 사람에게 예수님은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고 말씀하시기도 합니다.

이해하기 어려운 말들입니다. 복음서들은 예수님을 따르던 초기 신앙인들이 한 새로운 체험을 보도합니다. 복음서를 기록한 사람들은 구약성서를 잘 아는 유대인들입니다. 그들은 구약성서에 있는 표현들을 자유롭게 활용하여 그들이 한 새로운 체험을 기록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은 “하늘에 올라가실 때가 차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려고 마음을 굳히셨다”는 말로 시작하였습니다. 예루살렘은 그분의 죽음이 기다리고 있는 곳입니다. 예수님은 그 죽음을 향해 앞장서 가셨고, 그것은 그분이 하늘로 올라가시는 길이었다는 초기 신앙인들의 해석입니다. 구약성서(2열왕 2,1)는 예언자 엘리야의 죽음을 하늘에 올라간 것으로 표현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은 또한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루살렘으로 가는 예수님을 맞아들이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제자들이 분노하여 “하늘에서 불을 불러내려……” 운운하는 이야기는 구약성서 열왕기 하권(1,10.12)에서 가져왔습니다. 사마리아의 왕이 엘리야를 잡으러 군사를 보냈더니 엘리야가 하늘에서 불을 내려 그들을 삼켜버리게 했다는 고사(故事)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말을 하는 제자들을 꾸짖으십니다. 구약의 예언자들은 복수하고 벌하시는 하느님을 가르쳤지만, 예수님은 그런 가르침을 꾸짖으셨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면서 병자를 고쳐 주고, 죄인을 용서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아버지라 부르신 하느님은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고 사랑하며 그들의 잘못을 용서하십니다.

오늘 복음은 이어서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에게 요구되는 마음가짐 몇 가지를 제시합니다.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 기댈 곳조차 없다”는 말은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생활 조건이 개선되는 것도 아니고, 경제적 혹은 사회적 수준이 격상되는 것도 아니라는 뜻입니다. 많은 종교들이 인간의 소원성취와 부귀영화를 약속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그런 것을 얻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고 오겠다는 사람에게 예수님은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고, 너는 가서 하느님의 나라를 알려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아버지의 장례도 외면하는 패륜아(悖倫兒)가 되라는 말씀이 물론 아닙니다. 여기서 죽은 이는 하느님의 나라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같은 루카 복음서에서 아버지를 버리고 멀리 떠나갔다가 폐인(廢人)이 되어 돌아온 아들을 맞이한 아버지는 말합니다. “나의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15,24). 아버지이신 하느님과 함께 있는 것이 살아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가르친 하느님의 나라는 하느님과 함께하는 삶입니다. “죽은 이들은 죽은 이들에게 맡기고 가서 하느님의 나라를 알리라”는 오늘의 말씀은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죽음을 위한 대책이 아니라, 하느님과 함께하는 삶에 대해 깨닫고, 그것을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집에 있는 식구들과 작별 인사를 하고 오겠다는 사람에게, 예수님은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사람이 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식구들과 작별 인사도 하지 않고 떠나가는 분별없는 사람이 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나라, 곧 함께 계시는 하느님에 대해 깨달은 사람은 자기의 과거에 얽매이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과거의 자기 공적에서 보람을 찾지도 않고, 과거에 받은 상처로 괴로워하거나 사람을 미워하지도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과거에 얽매여 행동하는 것은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어리석은 일입니다. 하느님이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체험한 사람에게는 새로운 내일이 열립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신앙인은 그 내일을 향해 불쌍히 여기고 용서하는 실천을 합니다.

오늘의 복음은 예수님이 구약성서의 예언자들처럼 하느님의 무서운 심판을 선포하지 않으셨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고, 그 하느님은 불쌍히 여기고 용서하신다는 사실을 가르쳤습니다.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것은 예수님 덕분으로 재물이나 지위를 얻어 이 세상에서 부귀영화를 누리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후광으로 삼아 사람들 위에 군림하거나 행세하는 것도 아닙니다. 신앙인은 머리 둘 곳조차 없었던 예수님을 따라 이 세상의 부귀영화를 탐하지 않고, 소박하게 또 자유롭게 삽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에게는 재물이나 지위가 삶의 보람이 아닙니다. 신앙인에게 중요한 것은 함께 계시는 하느님입니다. 은혜로우신 하느님의 일을 자기 주변에 실천하여 사람들이 은혜로우신 하느님 안에 살게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함께 계신 사실은 죽음 후의 일이 아닙니다. 신앙은 사람이 죽어서 좋은 데 가기 위한 대책이 아닙니다. 인간은 모두 하느님 안에 삽니다. 그 사실을 자각한 신앙인입니다. 신앙인은 하느님이 하시는 일을 실천하며 그분의 자녀로 삽니다. 불쌍히 여기고 용서하시는 하느님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자기의 공로를 생각하지 않습니다. 아버지이신 하느님이 하시는 일을 자기도 실천할 따름입니다. 신앙인은 자기의 과거를 생각하고 통회(痛悔)하는 사람이 아니라,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시는 하느님의 자비를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 안에 우리는 하느님의 생명이 하시는 일을 봅니다. 그분이 실천하신 하느님의 자비를 우리도 실천하면서, 그 자비가 우리를 거쳐 이웃에게 흘러들어 하느님이 함께 계시게 합니다. 하느님의 것은 우리 안에 고여만 있지 않습니다. 이사야 예언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늘에서 쏟아지는 비, 내리는 눈이 …… 땅을 흠뻑 적시어 싹이 돋아 자라게 하듯이 ……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나의 뜻을 성취한다”(이사 55,10-11).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가 우리를 흠뻑 적시면, 그 자비와 용서가 주변을 위한 우리의 실천들 안에 그 모습을 드러냅니다.

하느님이 자비로우셔서 우리에게 열리는 내일이 있습니다. 하느님이 예수님 안에 살아 계셨듯이,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의 새로운 실천들 안에도 그분은 살아 계십니다.
 

서공석 신부 (요한 세례자)
부산교구 원로사목자. 1964년 파리에서 사제품을 받았으며, 파리 가톨릭대학과 교황청 그레고리안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광주 대건신학대학과 서강대학교 교수를 역임하고 부산 메리놀병원과 부산 사직성당에서 봉직했다. 주요 저서로 <새로워져야 합니다>, <예수-하느님-교회>, <신앙언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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