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 칼럼 - 강한]

포르노그래피. 그것은 ‘남성’, 더구나 ‘천주교 신자’로서 종종 고민이 깊어지는 주제다. 우리는 그런 시청각적인 자극과 쾌락을 추구하는 것이 주말에 영화를 보러 멀티플렉스를 찾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시대에 살고 있다. 어떨 때 보면 하드코어 포르노물보다 포털사이트의 연예 뉴스나 광고물이 더욱 시선을 사로잡는다는 생각마저 든다. 영상 기기들의 발달과 더불어 포르노도 진보를 거듭하고 있다. 동영상이 주류인 오늘날의 포르노는 시각과 청각을 자극하지만, 머지않아 우리는 촉각과 후각까지 자극하는 포르노를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

어느 선까지가 사회적으로 지탄받고 금지되어야 마땅한 포르노그래피일까? 단정 지어 말하기 어렵지만, 각양각색의 포르노는, 몸서리 처지게 싫어도 좀처럼 없어지지 않는 ‘바퀴벌레’처럼 우리 곁의 음지에서 우리가 흘린 음식물을 먹고 사는 것만 같다.

포르노그래피의 역사를 되짚은 다큐멘터리를 본 적이 있는데, 그 이야기는 까마득한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고대 로마에서부터 시작된다. 세상의 음지에 널리 퍼져 있는 온갖 종류, 온갖 내용의 포르노를 두루 섭렵한 사람이라면 프랑스 작가 사드(Sade)가 18세기 후반에 쓴 <소돔 120일>을 읽어보면 흥미로울 것이다. 220여 년 전에 쓰인 그 소설에 당신이 본 모든 것이 다 들어 있을 테니까. 포르노란 인류 문명의 역사와 궤적을 함께해 온 것인가?

방금 포르노를 바퀴벌레에 비유했지만, 포르노는 어린 시절부터 뒷골목이나 부모님이 외출하고 없는 빈 집에서 사소한 비행을 저지르며 함께 자란 ‘친구’ 같은 존재는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컴퓨터로 손쉽게 볼 수 있는 포르노가 봇물 터지듯 쏟아진 1990년대 후반에 청소년기를 보낸 개인적 경험에 비추어보아 하는 얘기다. 이러한 표현이 꽤 많은 남성들에게 적용되지 않을까 하는 짐작도 조심스레 해본다. (혹시 나만 그런 사람이었나? 아니면 나의 표현이 너무 편파적인가? 그렇다면 우리는 헌법상의 ‘행복을 추구할 권리’나 ‘언론 · 출판의 자유’와 관련해 포르노그래피에 대한 조금 더 ‘균형 잡힌’ 시각을 가져야 하나?)

몰아내자, 야한 뮤비?

알다시피 포르노그래피에 대한 가톨릭교회의 태도는 단호하다. <가톨릭교회 교리서> 2354항은 포르노에 대해 “정결을 모독하는 것”으로 “이 일에 관계된 모든 사람들(배우, 상인, 대중)의 품위를 크게 해친다”며 “중죄”라고 규탄한다. 이러한 가톨릭교회의 입장은 포르노에 대한 한국 사회의 공적(公的) 태도, 주류의 목소리와 일치한다. 극악한 것으로 규정된 ‘아동 포르노’에 대해서는 더더욱! 사회를 어지럽히고 성범죄를 유발하는 사악한 것으로 포르노를 비판하며 법으로 단죄하는 입장이다.

▲ ‘이런 영상 다 몰아내야 하나?’ 사진은 싸이의 ‘강남스타일’ 뮤직비디오의 한 장면. 지난 14일 주교회의 매스컴위원회가 주최한 2013년 전반기 문화의 복음화 포럼에 제1주제 발표자로 나선 이광호 박사는 발표문에서 이 장면을 두고 “‘강남스타일’에서도 정교하게 사용된 포르노 코드를 확인할 수 있다”면서 “청소년들에게 인기가 많은 아이돌 여가수 현아가 지하철에서 봉춤을 추는데, 그 머리 바로 옆에 69라는 숫자가 있다”고 지적했다.

이제 교회는 고고한 자세로 “그런 추잡한 건 보지도 듣지도 만지지도 말라”, “기도하는 마음으로 이겨내고 정결을 지켜야 한다”는 식으로 가르치는 데서 벗어나, 더 적극적인 전투태세를 갖추는 것 같다. 최근에는 천주교인으로서 ‘생명문화연구가’를 자처하는 이광호 박사가 활발하게 활동하며 “포르노그래피에서 파생된 문화상품”(아이돌 연예인의 공연부터 뮤직비디오까지)의 위험성을 경고하고 있다. 지난 3월 주교회의 춘계 정기총회 첫날 주교연수에서 이 박사의 강연을 들은 주교들은 발표 내용에 공감하고, 청소년 보호를 위해 교회가 행동에 나서야 한다는 의견을 표했다고 한다(<평화신문>, 2013년 3월 17일자, 1207호).

과연 우리 사회는, 그리고 가톨릭교회는 포르노그래피와의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을까? 우리는 이 ‘사탄의 작품’들을 지상에서 몰아낼 수 있을까? 아마 술이나 담배를 근절하는 일만큼이나 불가능에 가까운 과제일 것이다. 어쨌거나 싸울 대상이 있으니 교회는 계속 “맞서 싸워야 한다”고 선언하고, 신자들을 보호하기 위한 설교를 할 것이다. 천주교 신앙이 하나의 가치관인 만큼, 적어도 신자라면 포르노를 탐닉하는 일을 의식적으로 피해야 한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실천하는 운동을 벌일 수도 있겠다.

“뿌리 뽑자” 구호는 드높은데,
진정성 느껴지는 공론장이 없다

이러한 한국 사회, 교회의 분위기를 접하며 스쳐가는 생각들이 있다. 특히 내가 몸담고 있는 가톨릭교회에 대한 것인데, 조금 더 ‘개방적’인 자세로, 그리고 ‘폭넓은’ 시야로, 포르노그래피 문제를 직접 겪으며 고민하고 있을 수많은 신자들과 함께 성찰하자고 제안하고 싶다.

포르노 문제는 ‘고해소’에서만 다룰 문제가 아닐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밀실에서 포르노를 즐기면서도 광장에서는 그것이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혹은 뿌리 뽑아야 할 악인 것처럼 행동한다”(<매일경제> 인터넷판, 2013년 6월 24일자, <포르노 이슈>라는 책에 관한 기사)는 지적도 있다. “뿌리 뽑자”는 구호는 드높은데, 진정성이 느껴지는 공론(公論)의 목소리는 좀처럼 들리지 않는다. 누군가는 포르노 안 보는 남자의 비율은 0%라고 주장하는데, 그럼에도 남자들이 자신이 겪는 포르노 문제에 대해 공적으로 이야기하는 일은 찾아보기 어렵다.

한편, 좀 더 ‘폭넓은’ 시야로 보자는 말은 단지 포르노만이 악의 근원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흔히들 인간의 몸을 조각조각 나누고, 쾌락을 위한 도구로 격하시키는 게 포르노의 폐해라고 말하는데, 이처럼 ‘인간의 몸을 조각으로 나누고, 도구로 쓰는 일’이 이미 우리 사회 전반에 퍼져 있는 게 아닌가 하는 물음이다. 휘황찬란한 성형외과 광고들과 대중매체에서 접할 수 있는 인간 육체 각 ‘부위’들에 대한 비평, 그리고 참담한 노동 현실을 조금만 돌아봐도 그런 질문이 떠오른다. 그런 와중에 우리는 포르노그래피라는 빙산의 일각만 보고 돌팔매를 하고 있는 건 아닐까?


강한 (안토니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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