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여기(hic et nunc)’에서 영성 다시 보기 - 4]

ⓒ박홍기
얼마 전 신자들을 대면하여 두세 시간 정도 고해성사를 들었는데 유난히 힘들게 느껴졌다. 가정을 비롯해 직장이나 교회 등지에서 겪게 된 아프고 슬픈 사연들을 듣는 일도 마음을 무겁게 하였지만, 그와 관련하여 토해내는 미움과 분노의 감정들이 너무 세기가 강하고 폭이 넓어서였다. 그만큼 이 불행한 감정들은 단순히 개인적인 일로 치부할 수만은 없는 것으로, 사회적이고 영적인 문제이기도 한 것으로 다가왔다.

예컨대 지금 6월만 해도 동족상잔의 비극이었던 6.25를 지나칠 수 없다. 한국전쟁이 일어난 지 60년도 더 지났지만, 이른바 북방한계선(NLL)과 관련한 노무현 전 대통령의 남북정상회담 회의록 상의 발언을 놓고 온 나라가 들썩이는 데에서 보듯이 6.25와 분단 상황의 영향력은 아직도 시퍼렇게 살아있음을 실감한다. 정략적으로 이용될 수도 있는 북한에 대한 적대감 고조는, 그러나 남한 사회 자체 안에서마저 집단적이고 가정적이고 개인적인 차원 각각에서 상호 갈등과 불신, 두려움, 분노 등을 증폭시키는 기제로 작용할 수 있다.

이제 더 이상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부르면서 감동하지 않는 때가 오고 말았는가? 오히려 섬뜩할 만큼 날선 메시지를 담은 6.25의 노래가 다시금 격앙된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아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 날을 조국을 원수들이 짓밟아 오던 날을 맨주먹 붉은 피로 원수를 막아 내어 발을 굴러 땅을 치며 의분에 떤 날을 이제야 갚으리 그날의 원수를 쫓기는 적의 무리 쫓고 또 쫓아 원수의 하나까지 쳐서 무찔러 이제야 빛내리 이 나라 이 겨레.” 그리하여 화해와 평화의 움직임마저 이른바 종북이라는 딱지를 붙여 재갈을 물리고 있는 형국으로도 느껴진다.

불행한 인간들이 이룬 불행한 사회
돈을 숭배하고 도덕을 내버린 결과

이것은 민족의 불행, 개인의 불행을 향해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왜 그런가? 불행을 행복인 줄 알고, 행복을 불행인 줄 알 때 불행은 돌이킬 수 없는 행로로 접어든다. 몸에 해로운 것을 입이 좋아하고 몸에 이로운 것은 입이 싫어할 때 몸이 망가지는 길을 피할 수 없다. 영혼에 독이 되는 것을 내 마음이 반기고 영혼에 득이 되는 것은 내 마음이 거부할 때 나의 운명은 망하는 길로 치닫지 않을 수 없다.

불행의 원인을 일컬어 성경과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에서는 ‘죄’라고 한다. 죄 된 마음으로 죄 된 삶을 살면서 자존감을 갖고 행복하기를 바란다면 이는 연목구어(緣木求魚)와 다를 바 없을 것이다. EBS의 <아이의 사생활>에서도 조사 결과 도덕적이지 못한 아이가 쉽게 좌절하고 실망한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지금 우리 사회가 물질적으로는 풍부해진 것 이상으로 우울증과 자살률이 치솟으며 온갖 범죄가 난무하는 불행한 사회, 불행한 인간들을 양산하는 것도 돈을 우상처럼 숭배하며 도덕을 경시한 데 따른 필연적 결과다.

도덕은 도와 덕이다. 도는 하느님의 길이다. 하느님이 우리 각자의 양심 안에 심어 놓으신 당신의 뜻이고 욕망(desire)이고 꿈이다. 덕은 그 하느님의 길을 따르는 삶이다. 습관처럼 거듭 실천하여 따르는 삶이다. 그리하여 한마디로 하느님이 원하시는 것을 나도 원하는 것, 이것이 내가 행복해지는 비결이다. 하느님의 꿈이 우리의 꿈이 될 때 우리가 행복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행복의 관건이 되는 것, 하느님이 원하시는 것은 무엇인가? 이에 대해 기본 참고가 될 이사야서에 의하면 그것은 첫째로 전쟁이 없는 세상이다. “그분께서 민족들 사이에 재판관이 되시고 수많은 백성들 사이에 심판관이 되시리라. 그러면 그들은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리라.”(이사 2,4)

둘째는 서로 두려워하지 않고 사랑하는 것이다. “늑대가 새끼 양과 함께 살고 표범이 새끼 염소와 함께 지내리라. …… 사자가 소처럼 여물을 먹고 젖먹이가 독사 굴 위에서 장난하며 젖 떨어진 아이가 살무사 굴에 손을 디밀리라.”(이사 11,6-8)

셋째는 서로 차별하지 않고 하느님 안에서 동등한 형제자매로 하나가 되는 것이다. “골짜기는 모두 메워지고 산과 언덕은 모두 낮아져라. …… 이에 주님의 영광이 드러나리니 모든 사람이 다함께 그것을 보리라. 주님께서 친히 이렇게 말씀하셨다.”(이사 40,4-5)

기도합시다, 두려움을 몰아낼 수 있도록

전쟁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에서도 천명한 바와 같이 모두가 예외 없이 하느님과 인간 자신에 대한 범죄행위이다. 토마스 머튼에 의하면 이 전쟁의 근원은 두려움에 있다. 서로 사랑하지 않고 미워함에 있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몰아냅니다. 두려움은 벌과 관련되기 때문입니다. 두려워하는 이는 아직 자기의 사랑을 완성하지 못한 사람입니다.”(1요한 4,18)

근본적으로 불안과 두려움이 문제다. 남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돈을 많이 못 벌고 지위가 낮아질까 걱정한다.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이 서로를 두려워하고 다른 지역 출신, 다른 집단, 다른 민족, 다른 세대에 속하는 사람들을 경계한다. 그렇게 우리는 아직 사랑을 완성하지 못한 사람이다.

그래서 지금 우리 사회와 내 마음 안에는 사랑 안에서 하나 되라는 하느님의 목소리와 통일의 노래는 움츠러들고, 서로에 대한 두려움과 미움, 전쟁을 부추기는 죄의 목소리는 커지고 있는 것이다. 하느님의 목소리에 반대되는 죄의 목소리가 커지도록 방치하다가 자칫 민족과 개인이 불행해지고 망하도록 이끄는 악마의 손에 붙들리지 않도록 정신 바짝 차려야 할 때다. 이 뜨거운 여름, 온 힘을 다해, 진심으로 정성을 다해 기도해야 할 때이다.


심백섭 신부 (유스티노)
예수회 후원회 부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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