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하는 신학 - 이미영]

1960~1970년대 한국 천주교회사 연표를 정리하다 보니, 과거의 역사인지 요즘 일어나고 있는 일인지 헷갈릴 정도로 익숙한 단어들이 쏟아진다. 시국선언, 노동문제 · 언론자유 · 인권회복을 위한 시국미사, 기도회와 촛불 행렬, 사제 연행, 외국인 선교사 추방, 희생자들을 위한 추모 미사…….

지금 대한문에서, 강정에서, 밀양에서 만나는 교회의 모습은 마치 데자뷰 현상처럼 그 시절을 반복하는 느낌이다. 경제발전과 민주주의가 놀랍게 성장했다는 2013년의 한국 사회이지만, 비통하게 울부짖는 이들의 목소리는 40여 년 전과 비교해서 별반 달라지지 않은 듯하여 허탈하면서도, 그래도 그 아픔의 현장에 여전히 교회가 함께하고 있다는 것이 다행스럽다.

그런데 문득 그 시절 교회사에서 빠지지 않던 ‘명동성당’이라는 이름이 지금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눈에 띈다. 60~70년대 모든 미사와 기도회는 명동성당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는데, 지금은 거리 한복판에서, 가장 격한 대립의 현장에서 그 모든 일이 이뤄지고 있다. 우리의 미사와 기도는 왜 이렇게 거리로 나오게 되었을까?

▲ 지난 10일 오후,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 봉헌한 미사.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은 쌍용자동차 희생 노동자들의 분향소가 있는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 4월 8일부터 매일 미사를 봉헌해 왔다. ⓒ한수진 기자

‘신자들의 고통’이 교회를 사회참여로 이끌었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유는 명동성당이 그런 시국 미사와 기도회를 더이상 허용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이미 1990년대 중반부터 명동성당은 더이상 민주화의 성지가 아니라고 비판받아왔다. 1995년 명동성당에서 한국통신 노조의 천막농성에 ‘성당의 허가 없는 시위나 농성은 허락할 수 없다’며 퇴거 요청을 했던 것을 상징적 기점으로, 명동성당은 자신이 민주화의 성지로 불리는 것을 부담스러워하며 ‘노동자나 철거민들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성지를 사유물처럼 사용한다’는 이유로 ‘교회 밖’ 사람들을 거부하기 시작했다. 지금은 ‘공사 중’이라 억울한 사람들의 천막이 들어설 자리도 없으니, 아주 당연하고도 자연스럽게 그들을 받아들이지 않아도 된다. 사람들은 미사가 거리로 나온 것은 변심한 명동성당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정말 그 이유뿐일까?

1960~1970년대 교회사를 돌이켜보면 또 다른 이유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한국 천주교회가 예민한 사회문제에 대해 주교단 성명을 통해 최초로 발언했던 사건은 1968년 ‘강화도 심도직물 사건’이었다. 강화도 심도직물이라는 공장에 합법적인 노동조합을 결성했는데, 그 노조의 중심세력은 강화성당 가톨릭노동청년회(JOC) 회원들이었다. 지금도 노조 활동은 소위 ‘빨갱이’ 노릇이라며 불온시하는데, 전쟁 후 반공법을 기조로 하는 독재정권 하에서 노동인권이라는 말 자체가 생소하던 그 시절에 노조 활동이 어떤 대접을 받았는지는 가히 짐작된다.

천주교 신자들이 주동으로 노조를 만들고 노조 회합도 성당에서 이뤄지니, 여당 국회의원이었던 심도직물 사장은 노조 가입자들을 해고하고 천주교 신자는 누구를 막론하고 고용하지 않겠다는 결의문을 내걸었고, 공권력을 내세워 강화성당 전 미카엘 신부(메리놀회)를 압박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교회는 가톨릭노동청년회 신자들의 정당한 활동을 옹호하였고, 인천교구뿐 아니라 주교단까지 나서서 성명을 발표하니 정부가 사태를 수습하고 해고자들을 전원 복직시켰다.

이처럼 교회가 세상 문제에 대해 적극 참여하도록 이끈 것은, 이것이 교회와 상관없는 문제가 아니라 바로 우리 신자들이 직접 겪는 현실이라는 구체적인 체험이 아니었을까? 선량하고 평범한 신자들이 행복하게 살 수 없는 세상의 부조리는 교회 밖의 문제가 아니었고, 복음 정신에 따라 활동하는 신자들이 받는 탄압은 바로 교회에 대한 탄압이었다.

고통 받는 신자들을 통해 교회는 세상의 고통을 감각하고 구원의 길을 찾아 나섰다. 세상의 문제가 교회의 문제로 감각될 수 있을 때, 교회가 세상일에 참여할 수 있는 이유와 용기가 생겨난다. 교회의 사회참여는 타인의 고통에 대한 막연한 연민이 아니라 자신이 겪는 고통에 대한 절실한 구원의 문제일 때 힘이 있다.

그런데 지금 교회 안에는 세상의 고통이 감각되지 않는다. 비정규직 해고 노동자, 개발사업으로 쫓겨나는 사람들, 가난한 농부들, 환경파괴로 고통 받는 신자들이 교회 안에 하나도 없는 것은 아닐 텐데, 그 목소리가 들리지 않고 그 고통이 눈에 보이지 않는다. 고통을 교회 공동체와 나누지 못하는 신자들의 문제일까, 신자들의 고통을 위로하지 못하는 교회 공동체의 문제일까?

바깥 사람들은 교회를 찾지 않고,
성당에는 찬미의 노래만 넘친다

신자들에게서 감각되지 않는 세상의 고통을 감각하기 위해 교회는 지금 거리와 현장으로 나섰다. 혹자는 예수께서 성전이 아니라 사람들 삶의 한복판에서 그들과 함께하며 가르침과 기적을 베푸셨던 것처럼, 교회가 성전 안에 갇히지 않고 고통 받는 이들의 곁으로 나온 것은 당연하고도 바람직한 일이라며 긍정적으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거리 미사가 ‘교회 밖’ 사람들은 힘들고 고통스러워도 더는 교회를 찾아오지 않고, ‘교회 안’ 신자들은 세상의 고통에 눈 감은 채 거룩한 찬미의 노래만 부르는 상황에 밀려 이뤄지고 있는 건 아닐까 싶어 마음이 무겁다.

하느님께서 세상의 구원을 위해 사람이 되셨음을 믿고, 그러한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걸으신 십자가의 삶을 살고자 하는 이들이 모인 곳이 교회다. 자신의 존재를 오로지 내어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성만찬과 십자가 신비를 기념하는 미사는 ‘파견’이라는 그 말뜻처럼 이러한 세상 구원의 복음을 선포하러 파견되는 자리다.

교회가 거리와 현장으로 나와서 세상의 고통에 함께하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정작 교회 안의 미사에서 그러한 감각이 살아있지 못하다면 우리는 곧 중심을 잃고 말 것이다. 살아있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교회 안에서 세상의 고통을 감각할 수 있어야 한다.
 

이미영 (발비나)
우리신학연구소 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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