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 속에서 느끼는 하느님의 어루만지심

유일한 시청각장애인 사제 키릴 악셀로드 신부가 방한해 지난 21일 서울 한강성당에서 출판기념강연회를 열었다. 이날 강연회에는 서울가톨릭농아선교회 담당 사제인 박민서 신부와 개그맨 이동우 씨가 참석해 키릴 신부에 대한 소감을 나누었다. 키릴 신부가 최초의 유일한 시청각장애인 사제이고, 박민서 신부가 아시아 최초의 청각장애인 사제라는 점은 그만큼 가톨릭교회 안에서도 장애인 사제서품이 어렵다는 것을 반증하고 있다.

▲ 서울대교구 한강성당에서 키릴 신부 초청 강연이 열렸다. 이날 참석자들은 장애 안에서 한 인간이 어떻게 하느님의 손길을 느껴왔는지 들을 수 있었다. ⓒ한상봉 기자

이번에 가톨릭출판사에서 번역 출간된 <키릴 악셀로드 신부>는 키릴 신부 자신이 쓴 자서전이다. 키릴 신부는 1942년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정통파 유대인 부모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할아버지인 아베는 랍비였고, 키릴 신부가 태어나자 ‘성조 아브라함의 아들’이란 뜻으로 벤 아브람 아바라고 이름을 지었으나 남아프리카공화국 당국의 거부로 러시아 이름인 ‘키릴’이란 이름으로 고쳐 지어 출생신고를 했다.

키릴은 세 살 때 선천성 청각장애 판정을 받고, 가톨릭교회의 도미니코수녀회가 운영하는 세인트 빈센트 농학교에 다니면서 수화를 배우고 언어훈련을 받았다. 그는 아홉 살이 넘어서야 ‘엄마’, ‘아빠’라고 발음할 수 있었다.

키릴은 소년시절 유대교 랍비가 되는 게 꿈이었으나, 모세의 율법에 따라 장애인은 랍비가 될 수 없다는 이야기를 듣고 절망했다. 그러나 유대교 신앙이 송두리째 흔들린 것은 아니어서 계속 회당에 나가며 하느님의 이끄심을 기다렸다.

열아홉 살 때 아버지를 잃고, 바리아의 유대인 호텔에서 회계 일을 하며 생활하던 중, 특별한 체험을 계기로 가톨릭에 관심을 갖게 되어 교리교육을 받았는데, 이는 키릴이 속했던 유대인 공동체의 강력한 항의를 불러 일으켰다. ‘히브리 회당 연합’은 키릴에게 교리를 가르치던 로이드 신부에게 항의 서신을 보냈다. “우리는 그가 가톨릭으로 개종하면 그와 우리 모두에게 커다란 불행이 되리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키릴은 청각 장애인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을 받드는 일에 일생을 바치고 싶어 했으며, 장애인이어서 랍비가 될 수 없으니 가톨릭 사제가 되어서라도 그 일을 하고 싶은 열망에 사로잡혔다. 결국 가족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키릴은 1965년 세인트 빈센트 농학교 경당에서 세례를 받고, 신학교 입학도 허용되었다.

프리토리아의 세인트 존 바이애니 신학교에서 교수들의 허락을 얻어 강의 노트와 책을 통해 신학을 공부했다. 당시 키릴은 매주 금요일마다 집에 가서 다른 유대인들처럼 가족들과 키두쉬(유대교에서 안식일 또는 축일 전날 저녁 식사 직전에 포도주 잔을 놓고 암송하는 축복과 기도)를 올리고 안식일을 지내고 돌아올 수 있도록 허락되었다. 1970년에 사제품을 받은 키릴 신부는 자신을 ‘가톨릭 랍비’라고 즐겨 불렀다.

“가끔은 제가 청각장애인이 아니라 들을 수 있는 사람으로 태어났으면 어땠을까 생각합니다. 그랬다면 랍비도 되고, 결혼도 자유롭게 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고요. 하지만 제 생각은 ‘아니다’입니다. 들을 수 있는 사람으로 태어났다면 외가의 사업에 이끌려 외삼촌들과 일하면서 평생 요하네스버그에서 살았을 가능성이 컸을 것입니다.”

키릴 신부는 자신이 청각장애인이어서 어려움에 처한 가난한 장애인들을 도울 수 있었다는 사실에 평생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았다. 사제가 된 그는 킹윌리엄스타운 근처의 세인트 토마스 흑인 농학교에서 인종차별정책으로 이중고를 겪는 흑인 청각장애인을 위해 헌신했다. 당시 “당신은 제가 처음 만난 청각장애인 신부입니다”라고 말했던 바오로 6세 교황에게서 들은 “가서 청각장애인들에게 하느님의 사랑을 전파하십시오”라는 말을 늘 기억했다.

▲ 키릴 악셀로드 신부 ⓒ한상봉 기자
키릴 신부는 구속주회에 입회하면서 더욱 깊이 투신할 수 있었다. 그가 유대인의 정체성을 버리지 않은 것은 종파와 인종을 넘어서 장애인들을 사랑할 수 있는 자산이 되었다. 그는 이스라엘의 통곡의 벽을 방문해서도 랍비처럼 키파와 기도 숄과 트릴린을 가져가 로만 칼라의 검정색 셔츠 위에 착용했다.

특히 그는 장애인사목을 하면서 자신의 장애에서도 해방되는 경험을 했는데, 구속주회 프리토리아 수도원에서 케빈 다울링 신부로부터 “신부님이 해야 할 임무는 청각장애인들에게 봉사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신부님이 ‘장애’를 지니고 있는 것도 임무입니다. 신부님이 이곳 수도원에 있는 것만으로도 모든 동료 수사들에게 혜택을 줍니다”라는 말을 듣고 크게 용기를 얻었다.

그는 특히 인종차별정책에 저항하는 운동에 동참했는데, 그가 소웨토의 세인트 마틴 농학교에 있을 때는 줄루어만 써야 한다는 관리들에 항의해 남아프리카공화국 최초로 영어를 사용하는 흑인 장애인 통학학교로 만들었다.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은 흑인들과 혼혈을 뜻하는 이른바 ‘유색인종’을 소외시키고 무시하고 모욕했습니다. 서로 다른 인종 집단에 속하는 청각장애인들이 함께 만나거나 공통의 언어로 소통하는 것을 막았습니다. 사회적 · 정치적 억압은 청각장애인들에게서 인성개발의 기회를, 지식이나 정보나 지혜를 얻을 기회를 박탈했습니다. 그런 처지에서 그들에게 남은 것은 불안감, 좌절감, 쓸모없는 인간이라는 느낌, 열악하나마 의지하고 사는 집에서 쫓겨날 수 있다는 지속적인 위협이었습니다.”

키릴 신부는 그들과 연대하고 남아프리카공화국 정부에 맞서 흑인 장애인들의 인권을 옹호했으며, 그 결과 에드워드 마이너 갤러뎃 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는 안락한 환경에서 고등교육을 받고 자랐기에 몸소 가난을 실감할 수 없었으나, 인종차별정책으로 어려움에 빠진 흑인 청각장애인들 곁에서 일하면서, 점차 그들의 고통스런 감정을 공유할 수 있었다. 그래서 1987년에는 케이프타운에서 백인, 흑인, 황인 등 모든 인종의 청각장애인들이 참여하는 ‘케이프타운 청각장애인회’를 만들기도 했다.

1980년 미국에서 선교하던 중, 키릴 신부는 망막 색소 변성증이라는 진단을 받았고, 시각과 청각장애를 모두 갖는 어셔 증후군을 앓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런 처지에서도, 동남아시아 쪽으로 눈길을 돌려 싱가포르, 필리핀, 홍콩, 마카오의 청각장애인들을 위해 힘을 쏟았다. 이 당시 그는 오스트레일리아 구속주회 회원인 카시미르 수사로부터 ‘선(禪)’을 배우게 되었다. 키릴 신부는 불교 승려처럼 마루에 앉아 참선을 하면서 “관상과 명상의 힘은 내면에서 하느님의 전능하신 현존을 체험하는 새로운 길을 보여주었다”고 고백했다.

키릴 신부는 점차 시력을 잃기 시작하면서 절망감에 싸이기 시작했는데, 이때 구속주회 총장 신부는 키릴 신부에게 “신부님의 눈이 어두워지는 것은 신부님 문제가 아니라 하느님의 문제”라고 위로했다. 그가 처음 홍콩에 갔을 때 마이큰 매키런 신부는 키릴에게 ‘인민을 위한 평화’라는 뜻으로 ‘찬 만 온 신부’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키릴 신부는 이 이름을 받은 것을 큰 영광으로 여겼다.

중국 광둥성의 주장강 어귀에 위치한 마카오에 도착했을 때, 키릴 신부는 “저는 하느님께서 제가 이곳 마카오에서, 많은 문화와 인종, 종교, 언어의 한가운데서 청각장애인들을 위해 제가 봉사하길 원하신다는 것을 알았다”고 말했다. 장애를 ‘악운’이라 여기며 천시하는 사회에서 키릴 신부는 중국 수화를 익히고 활동을 개시했다. 중국 정부의 몰이해로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실패할 것이라는 말만 하지 않으면 반드시 성공합니다’라는 중국어 격언을 기억했다. 그리고 청각장애인들이 직접 운영하고, 자율적이며 비영리적이고 비교파적인 ‘마카오 청각장애인 협회’를 설립했다.

시청각 장애가 깊어지면서, 2000년 영국에 도착했을 때는 명암 밖에 구분되지 않았다. 그는 촉각 수화를 배우면서도 늘 “이런 내가 어떻게 사제직을 계속할 수 있을까” 고민했다. 이러한 절망에서 그를 구원해 준 것은 영국 시청각 장애인 협회가 운영하던 훈련센터인 ‘레인보우 코트’였다. 그는 여기서 훈련을 받으면서 “하느님께서 제게 완전히 새로운 완성에 이르는 길과 다른 사람들을 섬기는데 시청각 장애를 이용하는 새로운 방법을 알려주실 것임을 믿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고 한다.

“저는 시청각장애의 세계 속으로 여행하고 있었습니다. 마음속의 어둡고 텅 빈 공간을 탐사하고 그 미지의 세계와 접촉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곳 어딘가에서 하느님께서 저를 부르시는 것만 같았습니다.”

키릴 신부는 시청각장애를 겪으면서 오히려 자신의 영혼을 어루만지는 하느님의 손길을 느꼈다. 그는 아로마테라피와 마사지를 통해 장애인들에 대한 인간적 지지와 교류의 수단으로 ‘접촉’이 얼마나 중요하지 깨닫기 시작했다. 그리고 전세계를 여행하며 자신의 경험을 나누고 있다. 그의 일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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