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하는 믿음


요즘은 참 글쓰기 어렵네요. 삶이 없다, 여겨지기 때문일 것입니다. 항상 일은 쌓아놓고 하지만, 정작 사심 없이 내밀한 관계를 엮어 나가며 성찰할 기회를 얻지 못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내 몸으로 내 삶의 행간을 채워나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도 일종의 강박일까요? 책상머리에 앉아서 컴퓨터와 전화로 삶을 메꿔가는 데서 오는 생생함의 결핍 때문일까요? 그 사람들의 깊은 여정에 참여하지 않은 채 듣고 보는 것만으로는 제 영혼이 갈증을 느끼는 모양입니다. 새로운 이야기를 몸으로 써야 할 텐데... 그 길을 찾고 있답니다. 그래도 돌아보면 가장 생생하게 빛나는 순간은 산촌(山村)에서 농사짓던 그 시절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새로운 글을 쓰는 대신에, 예전에 ‘살면서’ 지어낸 일기 같은 이야기 몇 토막을 다시 전하려 합니다. 첫마음을 제 자신에게 먼저 읽히려고 제 글을 여기에 옮기는 것입니다.
 


1. 깊이, 처음의 눈길로

어느 시인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목수는 자기 몸을 나무에 박는다”고 쓴 적이 있다. 그는 예수라는 나자렛 목수였고, 그는 자기 몸에 못질을 함으로써 세상의 모든 나무들과 한통속이 되었다. 땅에 뿌리를 내리고 하늘로 솟은 십자가 나무와 피나게 결합함으로써 하늘과 땅을 잇는 건축물, 세상에 다시 없을 나무집을 한 채 지었다. 그 곳에서 사람들은 충만한 구원을 희망할 수 있게 되었다.

사람들이 성인으로, 구원자로 믿고 있는 이들 가운데 어느 하나 본래부터 가난하고 배우지 못한 하층민 출신이 있었던가? 왕국을 다스리는 나라의 왕자로, 지식인으로, 상류층으로 학식과 덕망을 쌓아 하늘에 이르는 전형적인 길을 걷지 않고, 오로지 아래로부터 시작한 구원이 성취된 역사는 나자렛 예수라는 목수 요셉의 가문에서 밖에 찾아볼 수 없다. 그래서 예수는 특별한 구원의 나침반이 되는 것이다. 예수는 자기 몸에 못을 친 메시아이며, 그런 방식으로 자신이 아끼고 연민하던 백성과 결합되었으므로 누구도 둘 사이를 갈라놓을 수 없다.

가장 위대한 농부는 흙에 발을 묻고 살면서 이윽고 온몸이 흙으로 돌아갈 날을 생각하는 사람이며, 가장 위대한 어부는 물에 손을 담구고 있을뿐더러 온몸이 젖어도 아랑곳 않고 아무래도 닿을 수 없는 바다의 끝을 꿈꾸는 사람일 것이다. 영원에 대한 감각을 지니지 못한 농부와 어부, 학자와 승려, 예술가는 결코 하늘의 뜻에 일치하는 ‘위대한’ 영혼이 될 수 없다. 그리고 영원에 대한 감각은 세상에 깊이 잠김으로써, 그 어둠 속에서 빛에 대한 소망을 버리지 않음으로써 얻어지는 것이다. 칠흑 속에서는 가느다란 빛살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며칠전에 7시간을 달려, 경주에서 홍성까지 다녀온 적이 있다. 그 길에서 가야산과 지리산, 덕유산을 거쳐 평야, 이윽고 서해바다를 만났다. 가야산을 지나면서 밤늦은 시간, 자동차 창을 열면 숲의 냄새가 생생하게 호흡을 타고 몸에 들어온다. 수액(樹液)을 마시는 것 같다. 내 몸은 영혼과 더불어 숲에 감염되어 초록빛이다, 향 깊은 녹즙처럼. 난 아직 살아 있고, 그게 감사하다. 벌써 6년 전, 무주 산골에 귀농했던 첫해에 날마다 아침마다 발끝에 맺히는 이슬을 털며 밭으로 나가 생생한 눈으로 바라보던 작물들. 그 처음의 눈길로 세상에 다가서고 싶다. 그렇게 나 아닌 세계에도 깊이 속하고 싶다.

 

무주에 있던 우리집 대청마루 앞에 앉아 있는 동네 아이들과 내 딸


2. 마루를 놓으며

마루를 놓으니, 눈앞이 더 넓어 보인다. 올 여름의 숙원사업이었던 마루 놓기를 며칠 전에 끝마쳤다. 보통 시골생활에선 사람 구경하기가 좋은 계절이 여름뿐인데, 직장 생활하는 도시 사람들은 휴가철이 되어야 몸을 옮겨 볼 여유를 가지는 까닭이다. 작은 방이 몇 개 달라붙어 있는 집에서 손님맞이가 어려운 탓도 있고, 어린 아기가 마루 밑으로 떨어질까 걱정도 되어 봄부터 서둘렀는데, 경험 부족으로 시행착오가 많았다. 자재로 쓸 나무를 사두었는데, 막 바로 작업하면 나중에 나무가 마르면서 휠 가능성이 많다는 것이다. 적어도 한주일 이상 나무를 말려야 한다는데, 그 와중에 장마가 찾아오는 바람에 쌓아 둔 목재가 습기로 자꾸 눅눅해져서 줄곧 마음이 볶였다. 사나흘 햇빛이 나는 동안에 서둘러 대패질하고, 치수를 재고 잘라서, 못질을 하였다. 시퍼렇게 곰팡이가 슬었던 나무는 대패가 지나가자 말끔해지고, 잘라놓은 송판을 깔아놓으니, 이제야 만사가 제 자리를 잡아가는 것 같아 마음이 환해졌다.

이제 마루가 예전보다 다섯 자 정도 더 앞으로 나온 셈인데, 공간이 꽤 여유로와졌다. 마당도 훤히 내려다보이고, 집안도 더 정리된 것처럼 느껴진다. 이처럼 우리 마음도 한 번 마음먹고 공사(工事)를 하면 더 넓어지고 더 말끔히 정리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해 본다. 물론 시행착오도 있을 테지만, 일단 저질러 놓고 마무리하고 나면, 번거롭고 두려운 영혼의 어둔 밤을 후딱 지나고 나면, 세상이 밝아지고 인간이 아름다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낯선 사람들에게도 가슴이 열리고, 바람에 살강거리며 잎잎이 춤추는 나무들을 끌어안게 되고, 세상에서 상처받고 짓눌린 그래서 그늘진 영혼들을 어루만져줄 능력이 생겨난다면 우린 얼마나 다행(多幸)스란 존재가 될까, 생각해 본다.

마루 놓는 일은 송판을 하나씩 깔아나갈 때마다 허공이 눈에 보이게 차례대로 채워지는 것을 눈으로 확인하는 충만함이 있다. 송판 하나에 여섯 군데씩 못질을 하면, 이십 센티미터씩 마루의 폭이 넓어져 간다. 그렇게 우리가 몸을 움직이는 것만큼 빈 허공이 가득 차서 송판이 공중에 걸린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제 그 꽉찬 공중에 앉아 차를 마실 것이고, 밥을 먹을 것이고, 이야기를 나눌 것이다. 책을 볼 것이고, 다투기도 할 것이고, 아이들은 쿵쾅거리며 뛰어다닐 것이다. 마늘을 까고, 옥수수를 먹으며, 하품도 할 것이다. 마루는 그렇게 사람의 일상을 돕는다. 사람의 살림을 떠받드는 든든한 바탕을 제공한다.

우리 마음에도 그런 마루를 깔아놓고, 누구나 뛰어 놀며 먹고 마시며 쉴 수 있게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송판에 남아 있는 부풀데기 가시가 내 벌거벗은 발바닥을 찌르더라도, 그렇게 세월이 흐르면 마루는 닳고 닳아 윤기가 나고 사람들은 편안한 마음으로 집에 들렀다 마루에 걸터앉아 따뜻한 말 한 마디 건넬 것이다. 그래서 마루를 깐다는 것은 마음을 바닥에 내려놓는 것이다. 제 몸을 사람들의 깔개로 내어놓는 것이다. 묵은 시간의 때마저 윤기 나게 하는 것은 그렇게 낮은 자리에 있었던 것이다. 그럼 나는 어떻게 마루가 될 수 있을까. 하늘 뜻을 닮은 마루(宗)이지만, 여전히 사람들의 깔개로 만족하는 마루(從). 천명을 따라 살수록 땅바닥에 엎드려 사는 사람들의 심정으로 되돌아가는 마음을 어떻게 구할 것인가. 바닥으로만, 바닥을 통해서만 하늘로 통하는 길이 열린다는 비전(秘傳)을 알려준 예수라는 젊은이를 제대로 만날 길은 다시 어디 없는가. 마루 끝에 달아맨 창을 연다. 앞산에서 바람이 훅 끼친다. 어느 순간 나도 저러하리라, 발원(發願)해 본다. 

 

눈오는 밤, 우리집


글을 옮기고 나니, 무주의 산골짜기에서 만났던 풍경이 그대로 되살아납니다. 내 몸으로 일하고, 일하는 가운데 얻어지는 단상들이 가슴에 돋을새김으로 ‘그래!’하고 쓰는 것 같습니다. 도시에 살면서, 어떻게 그 때의 생생함을 다시 얻을 수 있을까? 방도를 찾아야 내 일상이 아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아마도 지난 세월이 가르쳐 준 지혜를 저자에서 살아야 하는 것일 텐데, 그래서 다시 ‘나’를 만나러 가야 합니다. 다른 이들 속에 새겨진 나를 찾아가는 여행을 떠나야 합니다. 홀로 익힌 사랑을 더불어 채워야 하는 것이지요. 요즘은 겸손한 배려로 민들레 국수집을 하시는 서영남 형님과 일상에 깊이 복음적 물길을 대고 있는 김정식 형님을 힐끔거리며 자신의 고유한 일을 통해서 구체성을 얻어누리는 방법을 배우고 있습니다. 수업료를 어떻게 치러야 할지 고민하면서, 다시 ‘인생수업’을 서울 한복판에서 하려고 합니다. 마음이 있으면 길이 열리겠지요. 그분이 곁에서 응원해 주시리라 믿어야 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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