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로 흘러가는 노래 - 4]

아들이 다니는 고등학교에 다녀왔다. 가톨릭 재단에서 운영하는 학교인데 학생들의 진로탐색을 돕기 위해 직업에 대한 소개를 할 수 있는 사람들을 학부모 강사로 초청했기 때문이다. 학생들을 위해 참여한 재능기부 강사들은 모두 23명이었고, 강의를 들을 학생들은 대략 500여 명이었다. 학생들은 본인이 희망하는 분야의 강의가 펼쳐질 교실에 모여 있었고 우리들은 안내자를 따라 지정된 교실로 향했다.

요즘 학생들이 어떤 직업을 선호하는지 살짝 엿보기 위해 학생들이 선택한 직업군과 수강인원을 살펴보았다. 경영, 의학, 정치 · 법학 및 공무원이 1순위로 40명대의 학생들이 선택했다. 다음으로 교육, 과학, 군인 등이었고 내가 속한 사회복지는 예술과 함께 가장 적은 인원이 신청했다. 자료를 보면서 학생들의 선호도가 우리 사회의 직업 선호도와 무척 유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직업인들의 강의를 듣기 전에 미래유망직업에 대해서도 알아보고 진로탐색검사도 받았다고 하니 영민한 학생들이 얼마나 잘 선택했겠는가?

하지만 예술은 그렇다고 치고 사회복지는 왜 관심의 대상에서 저렇게 멀리 있을까? 10여 명의 학생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고민해 보았다. 우선 우리가 사는 세상이 돈과 명예와 권력의 정점에 오르는 것을 성공한 삶으로 인정하는데, 교수라도 되지 않고서는 사회복지 분야에서 일한다는 것은 성공하는 삶과는 거리가 멀다. 둘째로, 학생들이 봉사활동을 하며 접한 사회복지는 자식의 부양을 받지 못하는 노인들이 사는 요양원, 부모의 보살핌에서 제외된 장애인들의 시설, 가족으로부터 이탈된 노숙인 센터처럼 사회적 약자들의 모습이 대부분일 터인데, 그런 곳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그다지 유쾌한 마음은 들지 않았을 것이다.

지난 대통령선거에서도 보편적 복지 논란이 거세게 요동쳤지만 아직도 우리 사회는 더 잘 살기 위한 욕망들이 지배적이지 않은가? 나의 부를 나눠 더불어 산다거나, 내 이웃의 아픔을 돌본다거나, 어떤 경우에도 먼저 인간의 존엄성을 우선시해야 한다는 것 등은 나와 내 가족이 더 잘 살게 되면 고려해 볼 수 있다는 태도가 팽배하다. 그러기에 사회복지 현장에서도 같은 인간의 입장에서 서로를 보듬어 주고 감싸주는 의식이 미약하다.

ⓒ김용길

맹자는 <맹자 진심편>에서 이렇게 말한다. “孟子曰 食而弗愛면 豕交之也요 愛而不敬이면 獸畜之也니라(맹자왈 사이불애면 시교지야요 애이불경이면 수축지야니라; 먹여주기만 하고 사랑해 주지 않으면 돼지로 대하는 것과 같고, 사랑하면서도 공경하지 않는다면 개나 말 같은 짐승으로 여기는 것과 같다).” 인간에 대한 예의를 갖추고 그들을 대동사회의 가족으로 대하라는 말이다. 그러나 종교조차도 물적 · 양적 팽창을 추구하며 가난하고 약한 자들에 대한 관심이나 차별 없는 공동체의식을 등한히 하고 있으니, 이미 자본주의의 논리에 젖어 있는 사회복지 현장에서 청소년들의 귀감이 될 만한 모습을 만나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착잡한 마음으로 집에 돌아오니 로컬 푸드 운동을 시작한 동네 농부들의 정성 어린 농산물 한 꾸러미가 작은 박스에 담겨져 놓여 있다. 도시에서 귀농한 여섯 가구가 무공해 유기농산물을 생산해서 가까운 지역에 사는 회원들에게 직접 배달해 주는 사업인데, 오늘 그들의 첫 번째 배달을 받은 것이다. 이들은 도시에서 신문기자, 교수, 연극인, 사업가로 살던 사람들이다. 가족과 이웃을 소홀히 한 채 “정신없이 살다가” 인생의 아름다움을 찾아 산골마을에 정착한 사람들이다. 각 사람마다 전향한 사연은 조금씩 다르지만 한결같이 “과거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40대 중반과 50대 초의 농부들이 보내준 탐스런 토마토를 한입 베어 먹으며 생각해 보았다. ‘오늘 만난 젊은 학생들의 희망과 이렇게 맛있는 자연의 산물을 보내준 사람들의 가치 변화 차이를 어떻게 해석해야할까?’

작가 김훈은 <밥벌이의 지겨움>에서 이렇게 말한다.

“모든 밥에는 낚싯바늘이 들어 있다.
밥을 삼킬 때 우리는 낚싯바늘을 함께 삼킨다.
그래서 아가미가 꿰어져서 밥 쪽으로 끌려간다.
저쪽 물가에 낚싯대를 들고 앉아서 나를 건져올리는 자는 대체 누구인가.
그 자가 바로 나다
이러니 빼도 박도 못하고 오도 가도 못한다.
밥 쪽으로 끌려가야만 또 다시 밥을 벌수가 있다.”

귀농한 농부들의 인생도 밥벌이를 위해 낚싯바늘에 끌려가던 시절이 있었으리라. 그러던 어느 날, 자기들의 삶의 이유가 오로지 밥벌이 때문이 아니라고 깨닫는 순간, 그들은 하늘을 보고 땅을 보고 비로소 사람의 생명을 보게 된 것이리라. 자기들의 일상이 고되게 봉우리를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피어있는 꽃을 보고 환한 웃음으로 감사하는 것임을 알게 된 것이리라. 하느님이 새만 맨입으로 먹여주지 않고 사람도 맨입으로 먹여주신다는 사실을 믿게 된 것이리라. 욕망의 존재인 인간이 어떻게 해야 덕이 있는 삶을 살 수 있을지 탐구하는 순간, 하느님의 자비가 무한한 평화의 햇살을 비춰주시는 것을 체험했기 때문이리라. 그렇지 않고서야 인간이 어떻게 ‘아름다움’을 생각할 수 있겠는가?

한결 편안해진 마음으로 기숙사에 있는 아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얘야, 너무 무리하지 말고 놀멘 놀멘 하거라!”
 

이장섭 (이시도로)
아산에서 사회복지사로 일하며 주님을 찾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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