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업주의 교회에서 영성 구출하기-너는 누구냐

시집을 사면, 가끔 서점에서 얼쩡거리다 시집을 사면, 표지 위에 다소곳이 끼어있는 띠지가 있곤 했다. 책을 볼 때마다 이 띠지가 걸리적거려서 이내 벗겨내어 휴지통에 버리기 십상인데, 무슨 보물인양 접어서 오래도록 책상 위에 얹혀 두고 보고 또 보는 놈들도 있다. 김수영 시집이 그랬고, 김사인 시집이 그랬다. 런닝구 바람으로 손으로 턱을 기대고 있는 눈이 큼직했던 김수영의 얼굴이 보고 싶어서 그랬고, 색시처럼 실눈 뜨고 살짝 웃음짓는 김사인의 얼굴이 가슴에 와서 닿았기 때문이다. 그네들 표정에선 공허와 슬픔이 언제나 묻어 나왔다. 김수영의 시선이 닿는 곳이 어딜까, 늘 궁금했고, 김사인의 미소 뒤에 배어있는 서늘함은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곰곰 생각해 보곤 하였다.

김수영의 경우엔 시뿐 아니라 깔깔한 그의 산문에서 더욱 그 사람의 진면목을 알아볼 기회를 얻었는데, <시여 침을 뱉어라>라는 책에 나오는 무허가 이발소에 대한 이야기가 항상 먼저 떠오른다.

“무허가 이발소의 평상에 앉아서 순차를 기다리는 시간처럼 평화로운 때는 없다. [...] 좌석버스나 코로나택시에서까지도 가요 팬의 운전사를 만나게 되면, 사색은 고사하고 그날 하루의 재수가 염려될 만큼 신경 고문과 세뇌교육이 사회화되고 있는 세상에서는 신경을 푼다는 것도 하나의 위법이요 범죄라는 감이 든다. 무허가이발소에서야 비로소 군색한 사색을 위한 신경 휴식이 가능하게 되었으니, 사색이 범죄라고 아니 말할 수 있겠는가.

하기는 무허가 이발소에도 라디오의 소음이 없는 것은 아니다. 향군무장을 보도하는 투박한 뉴스 소리가 귀에 거슬리고, 인기 배우를 모델로 한 전축 광고 포스터 같은 것이 눈살을 찌푸리게 하지만, 그래도 수십 명의 승객들의 사전 양해도 없이 제멋대로 유행가를 마구 틀어 놓는 운전사의 무지와 무례에 비하면, 무료한 이발사의 이 정도의 위안은 오히려 소박한 편에 속한다.

이런 뒷골목의 이발소의 고객들이란 주로 동네 꼬마들과 시골서 올라온 인근 공장의 직공 아이들인데, 스무 살도 채 안 되는 아이들의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정중하게 인두질을 해주고 게다가 우스갯소리까지 해주면서 기껏해야 50원을 받는 이 영리(營利) 행위는 너무나 바보스럽고 어처구니없이 불쌍해 보이기까지 한다.

저 다 해진 신에, 저 더러운 옷에, 저 반짝이는 머리가 어떻게 어울린다고 저 불필요한 치장을 하나, 하고 처음에는 화도 내 보았지만, 자세히 생각하면, 불쌍한 저 아이가 저렇게 우대를 받고 사람대우를 받는 것은 무허가 이발소에서밖에 있으랴 하는 측은한 감이 들고, 사랑이 얼마나 귀중한 것인가를 얼마나 까마득하게 잊어버리고 있는 우리들인가 하는 원시적인 겸손한 반성까지도 든다. 참 할 일이 많다. 정말 할 일이 많다. 불필요한 어리석은 사랑의 일이!”


무허가 이발소를 우리는 어렸을 때, ‘야매 이발소’라고 불렀고, 김수영의 말대로 우리 같은 꼬마들이며 노인네들이 단골손님이었다. 아이들은 의자 팔걸이 위에 송판을 하나 얹어놓고 앉았는데, 여름날 높은 데에서 열어놓은 문틈 사이로 보이는 철도길은 이글거리는데 이따금 매미가 울어서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가난한 사람들이 대접받는 소박한 희망을 담았던 김수영의 입술이 고맙다. 

김사인(金思寅)이란 이름은 내 선입관 때문에 이렇게 들린다. 김사인(金思人), 금쪽같이 사모하는 사람. 사람을 금쪽 같이 사랑하기에 그리움에 사무치는 사람이라는 이미지로 온다. 그의 시 중에는 ‘다리를 외롭게 하는 사람’이란 게 있다. 이성선 시인의 시로 시를 지은 것이다.

하느님
가령 이런 시는
다시 한번 공들여 옮겨적는 것만으로
새로 시 한 벌 지은 셈 쳐주실 수 없을까요

다리를 건너는 한 사람이 보이네
가다가 서서 잠시 먼 산을 보고
가다가 쉬며 또 그러네

얼마 후 또 한 사람이 다리를 건너네
빠른 걸음으로 지나서 어느새 자취도 없고
그가 지나고 난 다리만 혼자서 허전하게 남아 있네

다리를 빨리 지나가는 사람은 다리를 외롭게 하는 사람이네

라는 시인데
(좋은 시는 얼마든지 있다구요?)
안되겠다면 도리없지요
그렇지만 하느님
너무 빨리 읽고 지나쳐
시를 외롭게는 말아주세요, 모쪼록

내 너무 별을 쳐다보아
별들은 더럽혀지지 않았을까
내 너무 하늘을 쳐다보아
하늘은 더럽혀지지 않았을까

덜덜 떨며 이 세상 버린 영혼입니다

김사인 시인

이 시는 이성선 시인의 ‘다리’라는 시와 ‘별을 보며’라는 시를 빌려온 것이다. 시인은 사물에 대한 깊은 배려를 ‘오래 머물러 있음’에서 먼저 찾는다. 제 갈 길만 쳐다보고 사는 사람들은 주변을 살피지 않는다. 제 용건만 해결하면 모든 것이 순식간에 관심사에서 사라져 버린다. 나를 빼고 난 나머지는 나를 위해 존재하며, 그래서 그것들은 내 삶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행성이며 수단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절대로 역지사지(易地思之)하는 법이 없다. 그러나 오래 머무르는 사람은 그 사이에 배인 정(情) 때문에라도 모질어질 수 없다. 시간이 흐를수록 나는 없고 그만이 남게 된다. 그만이 남아 내가 오히려 누가 될까, 걱정해야할 지경에 와서야 부끄럽게 얼굴을 가린다. 그런 사람, 남을 주눅들게 만들지 않고 겸손하며, 별 앞에서 미안해하는 사람, 그렇게 소문 없이 이승에서 물러나는 사람을 김사인은 사랑하는 것이다. 사모하는 것이다.

‘코스모스’라는 시도 있다. 지금도 왜 제목이 코스모스인지 헤아리기 어려운 시편이다. 가엾은 인생이란 뜻일까? 풀꽃처럼 여려서 상처받기 쉬운 영혼이라는 뜻일까, 알 수 없다. 다만 그가 죄 없다는 것, 순결한 영혼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경쟁과 쟁투의 세월 속에서 남에게 상처 준 적이 없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 많은 상처를 아뢸 곳이 아버지 면전뿐인 사람이다. 하늘나라 들르는 길목을 돌아가면서 자상한 아버지를 생각하는 사람이다.

누구도 핍박해 본 적이 없는 자의
빈 호주머니여

언제나 우리는 고향에 돌아가
그간의 일들을
울며 아버지께 여쭐 것인가

아무래도 “너는 누구냐?”라는 꼭지를 마감하면서, 뭔가 남길 말이 있어야겠는데, 새로운 말은 없다. 김사인의 시어에서 발하는 있는 것 같은 ‘슬픔의 언어’를 이해할 줄 아는 사람이 많았으면 하는 바램뿐이다. 예수의 영광보다 그분의 그림자를 고즈넉이 ‘오래’ 바라볼 줄 아는 사람이 늘어났으면 하는 바램뿐이다. 차올랐던 눈물이 잦아들고 이윽고 마른 눈가가 씀벅거리는 것을 느끼며 맑아진 눈으로 사람을 꽃처럼 바라보는, 처음인 듯 바라보는 사람이 그립다고나 할까. 그런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런 생각이 든다. 들어도 듣지 못하고, 보아도 보지 못하고, 울며 통곡하여도 대답이 없는 사람들이 가엾다는 생각뿐이다. 구원이 저들에게서 빛을 거두었기 때문이다. 이제 해맑은 사람들에게로 가고자 한다. 구원의 빛이 이미 당도한 사람들에게로 넘어가고 한다. 모든 어둠의 골짜기를 지나 햇살 눈부신 땅으로 가고자 한다. 그곳에서 만날 사람들, 그들에게 “지금 만나러 갑니다”하고 타전하고 있다, 오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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