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영화] <에브리데이>
마이클 윈터바텀 감독, 2012년작, 현재 상영 중

▲ <에브리데이>, 마이클 윈터바텀 감독, 2012년작
<에브리데이>는 느리게 진행되는 영화이고, 기승전결로 꽉 짜인 플롯이 없다. 시놉시스를 보면 그냥 재미없고 지루한 영화일 것 같다. 그러나 이 영화의 감독이 ‘마이클 윈터바텀’임을 확인하는 순간, 영화에 대한 막연한 인상은 달라진다. 날카로운 비판의식의 전통을 가진 영국영화의 기수 마이클 윈터바텀, 그리고 영국 소도시에 거주하는 하층민 가족, 이 두 문장으로 영화에 대한 구미가 당긴다.

<풀 몬티> <빌리 엘리어트> <비밀과 거짓말> <슈팅 라이크 베컴>……. 오호라, 그렇다. 이 영화는 주류에서 밀려나 있던 계급과 집단에 초점을 맞추면서 영국 보통 사람들의 감정의 깊이를 담아 주류 사회를 날카롭게 공격한 ‘키친싱크’ 리얼리즘 영화의 우산 아래에 있다. 괴로우면서도 즐겁고, 재밌으면서도 사회적인 영향력을 발휘하는 진보적 가치를 지닌 영화들 말이다.

키친싱크 리얼리즘 영화

1979년은 얼마 전 사망한 마가렛 대처 수상의 보수정부가 영국에 출현한 때이고, 영국 영화는 진보정치의 전통과 다큐멘터리 리얼리즘 정신을 이어받아 새로운 자극의 사회비판 영화들로 한 유파를 형성한다. 이 유파는 주변부 하위문화를 영화의 중심 소재로 받아들이고, 겉치레가 없는 소박한 미장센, 보잘 것 없는 인물들의 생활양식 반영, 느슨한 서사구조 방식이라는 모험적 연출로 영국 관객과 세계 영화 관객들에게 큰 호소력을 발휘했다.

1980년대 내내 ‘대처리즘’이라는 이름의 정치적 보수주의와 상반되게 영국 영화는 급진적인 방향에서 사회를 공격했고 환호 받았다. 영화 속 인물들은 그들의 타고난 한계가 아니라 척박한 사회 시스템으로 인해 더더욱 비참해진다는 점을 분명히 하는 영화들이었다. 경제부흥을 향해 쭉쭉 뻗어가던 국가와 그 안에서 더더욱 소외되고 주변으로 빌려나서 가난에 허덕이는 계급. 이거 남의 이야기가 아니지 않나.

이러한 키친싱크 영화는 원래 부엌의 싱크대를 중심으로 벌어지는 리얼리즘 드라마에서 출발했다. 하층계급 가정 내의 문제점을 보여줌으로써 영국 사회 전체의 모순이 드러나도록 만든 사회성 짙은 드라마로서 가족 간의 이야기가 드라마의 중심에 있다 보니 중요한 장면들이 주로 부엌에서 진행되었다.

‘부엌에 부여된 정치성.’ 그 안에는 여성, 하층민, 성 소수자, 이주민들이 있었다. 부엌은 먹는 것이 사람에게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장소이고, 일하는 계급 특유의 투박한 악센트는 현실을 그대로 기록한 다큐멘터리처럼 보였다. 키친싱크 영화로 인해 영국 리얼리즘 미학은 한 단계 도약한다. 1960년대 토니 리처드슨, 린제이 앤더슨, 1980~1990년대의 켄 로치(<엔젤스 셰어>), 마이크 리(<세상의 모든 계절>), 2000년대의 마이클 윈터바텀과 린 램지(<케빈에 대하여>)로 이어지는 키친싱크 전통은 여전히 뜨겁다.

시간을 카메라에 담다

“시간을 카메라에 담는다는 것.” 이 말로 <에브리데이>의 특별함은 설명된다. 마이클 윈터바텀은 한 가족의 흐르는 5년 세월을 카메라에 포착한다. 영화의 스토리 시간은 5년이고, 윈터바텀이 캐스팅한 가족 구성원 6명의 배우들은 5년간 꾸준하게 영화를 조금씩 찍어 나갔다. 영화 도입부에서 기저귀를 차고 아장아장 걷던 막내아들 숀은 영화 막바지에서는 훌쩍 커서 펄펄 뛰어다닌다. 5년간 감옥 생활을 하는 아빠와 홀로 4명의 자녀를 키우는 엄마의 꾸준한 삶, 그리고 두 명의 여자아이와 두 명의 남자아이가 나날이 커가는 모습 속에서 우리는 일상이 주는 힘을 깨닫는다.

 

영화의 이야기는 단순하다.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아빠 이안(존 심)은 감옥에 갇혀있고, 엄마 카렌(셜리 헨더슨)은 낮에는 마트에서, 밤에는 바에서 일하며 주말엔 새벽에 일어나 아이들을 데리고 수백 킬로미터 떨어진 교도소를 기차를 타고 또 버스로 갈아타고 방문한다. 이야기의 큰 줄기는 카렌과 아이들의 평소 생활과 감옥 면회다. 하지만 주요 플롯 사이사이에 이안이 하루 귀휴를 나와 온 가족이 공원에서 나들이하거나, 카렌이 평소 가깝게 지내는 남자 친구와 농담을 주고받거나, 큰아이가 사냥을 하다가 사라지거나, 작은아이가 아빠가 없다는 놀림에 싸움을 하거나 하는 작은 에피소드들이 배치된다.

힘겨운 생활을 견뎌내는 이 애처로운 가족에게 닥친, 일상의 균열을 깨는 자그마한 사건들을 지켜보자면 앞으로 더한 불행이 닥칠까봐 긴장하게 된다. 영화는 표면적으로는 잔잔하게 일상의 흘러가는 일들을 담아내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매일의 반복되는 일들이 미니멀리즘으로 스크린에 펼쳐지면 거기에는 어제와는 조금씩 달라진 오늘이 감지된다. 시간은 흘러가고 아이들은 자라나고, 사람의 감정은 단단해지거나 허물어지고, 사랑이 왔다가 떠나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을 때, 그 사람은 이미 다른 사람인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이 치르는 일상의 전쟁

흐르는 시간을 포착하기 위해 감독이 선택한 5년의 실제 시간에 따른 연출 기법은 픽션 이야기를 실재하는 삶의 한 조각으로 받아들이게끔 하는 거대한 힘을 발휘한다. 클로즈업으로 깊이 있게 담아낸 어른들의 무표정한 얼굴들, 그리고 자라나는 귀여운 아이들의 슬픔이 담긴 표정을 보면 이 가족의 현실을 바로 코앞에서 지켜보는 것 같은 생생한 기분이 든다. 힘겨운 노동 후 침대에 누워 흘리는 아내의 눈물과, 패인 상의에 감추어진 아내의 가슴골을 보고도 흥분하는 갇힌 남편의 감정은 쓸쓸함을 자아낸다. 가지 말라고 울음을 터뜨리는 막내 아이와 이제 아빠에게 오기 싫다는 사춘기 둘째 아들을 지켜볼 때면 마음이 먹먹해진다.

아내이자 엄마인 카렌, 그녀는 불만 없이 늘 그 자리를 지킨다. 하지만 그녀의 뒤돌아선 모습, 쓸쓸히 꺼내 무는 담배, 불현듯 떨어지는 눈물방울은 말해주지 못한 커다란 진실을 전한다. 그녀의 빛과 어둠, 가슴 속에 숨긴 사랑과 분노를 카메라는 날것 그대로 관객에게 전한다. 커트 사이사이에 빈 여백의 공간에서, 그리고 말하지 못한 침묵 속에서 우리는 많은 것들을 읽어낼 수 있다. 이 순수한 가족이 진심으로 잘 살길 기원하지만, 꼭 마주하고 있어야 행복한지, 꼭 내 손에 부여잡고 있어야 만족스러운 것인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카메라는 진정성 있게 시간을 담아내고 있으며, 영화에 담긴 진실의 시간 속에서 가족의 행복과 사랑의 정의가 무엇인지 다시 생각해보게 한다. 묵직한 생철학을 비천한 한 가족 속에서 발견하게 하는 힘이 영화에는 있다.

<케빈에 대하여>를 연출한 린 램지는 언젠가 “가난한 사람들은 마치 예외 없는 전쟁을 치르고 있는 듯하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신자유주의 시대에 총격 한가운데 있지 않아도 다수는 일상의 전쟁을 치른다. 생존하는 것 자체가 전쟁인 시대에 책임 있는 자들은 죽거나 침묵하고, 그 쓰레기를 들고서 어쩌지 못해 우왕좌왕하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거늘. 그러나 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에게 영화는 잠시나마 위안이 되고 삶의 통찰을 준다.

극장가에는 아직 켄 로치의 <엔젤스 셰어: 천사를 위한 위스키>와 스티브 맥퀸의 <셰임>이 걸려 있다. 기찬 유머가 죽지 않은 켄 로치의 영화는 영국 영화의 힘이 이런 거구나 하는 감탄으로 이끌 것이며, 스티브 맥퀸의 영화는 부를 가진 여피족 역시 소외될 수밖에 없는 현대사회를 성을 통해 탐구하는 쓸쓸한 심리극이다. 진정성 넘치거나 웃기거나 섹시한 영국 영화를 한꺼번에 경험할 수 있는 좋은 기회다.
 

 
정민아
영화평론가. 영화학 박사. 동국대, 수원대 출강 중. 옛날 영화를 좋아하고, 사랑스러운 코미디 영화를 편애하며, 영화와 사회의 관계에 관심을 가지고 공부합니다. 삶과 세상에 대한 사유의 도구인 영화를 함께 보고 소통하길 희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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