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 칼럼 - 정현진]

‘일베’, 살충제가 답인가?

일간베스트저장소(이하 일베) 회원들의 언사가 5.18 민주화항쟁 희생자들에 대한 모독, 국정원과의 연계설로 집중적 관심을 받고 있다. 그동안 ‘그렇고 그런 찌질이들’이라 폄하되고 무시되던 일베는 파시즘, 표현의 자유, 처벌, 극우 등의 묵직한 단어와 함께 거론됐다.

얼마 전 전 경찰대 교수이자 프로파일러인 표창원 박사는 25가지 항목으로 일베를 분석했다. 제법 긴 항목에서 이어지는 맥락은 “열등감, 약자, 인정 욕구, 애정 결핍, 피해자 또는 피해 의식, 낮은 자존감, 루저”였다. “현실에선 조용한 점원, 자영업, 배달, 학생 혹은 무직”으로 뭉뚱그려놓은 분류에는 동의하기 어렵지만, ‘열등감과 낮은 자존감, 인정 욕구’와 같은 단어에 유독 공감하게 됐다.

2005년부터 시작된 누군가와의 갈등이 2010년쯤 종지부를 찍기까지, 최소 3~4년간 나조차도 알지 못했던 열등감으로 그런 ‘찌질한 짓’을 한 적이 있다. 낮은 자존감은 열등감과 인정 욕구, 피해 의식을 동반하는 법이다. 당시 모든 것을 잃었다고 생각할 정도로 위기를 겪던 나는 설상가상 내 상처와 열등감을 건드리는 ‘그 사람’과 전쟁을 치렀다. 삶이 뿌리째 흔들리니 내가 발 디딘 자리를 현실로 받아들이지 못 했고, 내가 있어야 할 자리라고 여기는 이상향을 넘봤다. 그곳에 있는 사람들도 미웠다. 시기와 분노에 휩싸여 내 이야기를 들어주는 이들에게 그를 욕했고, 내쳐지기를 바랐다.

오랫동안 힘든 시간을 보내면서 나는 그 모든 것의 근원을 발견했다. 힘든 환경이나 그 사람의 잘못 때문이 아니라, 원래 흔들리던 내 존재 기반 때문이었다는 것을. 그 오랜 고통에서 나를 구원한 것은 결국 치유와 화해였다. 그때 만약 눈앞에서 그가 사라졌다면 나는 괜찮아졌을까? 오히려 해결되지 않은 분노는 더 깊이 파고들었을 것이다. 분노는 표현하는 만큼, 곱씹을수록 커지는 법이다. 때때로 일베를 비판하는 이들에게서마저 일베와 같은 행동 양식을 볼 때, 뜨악하다 못해 섬뜩하다.

“이른바 엘리트 집단 속의 루저”라는 표창원 박사의 진단처럼, 열등감과 피해 의식은 계층과 계급, 정치 성향을 가리지 않는다. 내 열등감의 근원은 어린 시절부터 부모와의 관계에서 형성된 것이었다. 그것은 남의 인정을 받거나, 타인을 공격한다고 해서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내면의 상처를 대면하고 인정할 수 있을 때 비로소 해방될 수 있다.

성찰의 부재, 권력의 점유, 독선, 소외와 배제, 다른 가치에 대한 적대시. 일베 양산의 배경들이다. 이들의 일부는 종종 교회 안에서 목격되기도 한다. 평신도, 특히 여성들의 목소리가 반영되지 않고, 비판을 수용하지 못하는 교회, 평신도 신학자들이 상대적으로 소외되며, 신학의 다양성을 품지 못하는 교회, 내적 모순에 대한 성찰이 서툰 교회. 이런 모습이 지속된다면 교회 역시 일베의 생태적 환경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 최근 5.18 민주화운동 희생자들에 대한 모독으로 논란을 빚어 온 인터넷 사이트 일간베스트저장소 ‘518’을 키워드로 검색한 화면 갈무리

일베, 우리 사회가 죽인 가치들이 썩어가는 풍경
더디더라도… ‘성찰’이 우리를 구원할거야

어떤 이들은 일베의 표현의 자유를 보장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표현의 자유를 들이대는 순간, 일베를 비판하는 이들도 자유롭지 못할뿐더러, 일베의 정당성을 부여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것은 여전히 전선을 그은 상태의 전술일 뿐이다. 또 “아직은 사회 일부의 놀이터에 불과하다”, “정치권력화 되지 않았으니 괜찮다”는 판단은 오만하고 무책임하다.

그동안 우리 사회는 인간적 가치, 마땅히 해야 할 도리를 가르치지 않았다. 역사, 인문학과 같은 지식은 물론, 삶과 사회에 대한 성찰의 방법도, 성찰할 기회도 주지 않았다. 가정에서도 사회에서도 일신의 성공만을 향해 달려야 한다고 가르쳤다. 결과적으로 일베는 그동안 우리 사회가 죽여 버린 가치들이 썩어가는 풍경인 셈이다.

대면하기 어렵고, 다만 싫다는 태도로는 이 상황을 극복할 수 없다. 고인 웅덩이에서 모기가 생긴다고 해서 약을 뿌리는 것처럼 쉬운 방법을 선택할 수도 없다. 살충제는 지하수를 타고 흘러 다른 이들의 몸으로도 들어갈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웅덩이를 정화하는 것이다. 우리 몸의 일부가 아프다고 쉬이 잘라내지 않는 것처럼, 징후를 지켜보되, 치유의 길을 찾아야 한다. 그것이 잠재된 일베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다.

모든 독약에 해독제가 있는 것처럼 이 세상 모든 일에는 해법이 있다. 다만 어려움과 시간의 차이, 행하고 행하지 않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하느님의 눈으로 자신과 살아가는 세상을 성찰하고 공동선을 향하는 삶, 나와 다르다고 배척하지 않으며 소통 속에 성장하는 공동체. 우리에겐 이미 해법이 있다.
 

정현진 (레지나)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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