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업주의 교회에서 영성 구출하기-너는 누구냐⑱

 

아이 때문에 일찍 잠에 들었는데, 오래된 습관처럼 눈이 떠지고 시간을 보니 자정이 가까이 왔다. 이제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될 참이다. 뜨르르르르, 진동에 맞추어 놓았던 핸드폰이 몸을 떨고 있다. 일시에 문자메일이 날아들었다. “그대여, 행복하소서!” 가슴팍에 쏙 들어와서 꽂히는 문구다. 사람들은 때를 놓치지 않고 기막힌 순간에 소식을 전하고 덕담을 나눈다. 라디오에서 밤 12시를 알리는 타종소리가 들리고 평화방송을 통해 흘러나오는 자정미사에 참여하였다. 참 좋은 밤이다. 올해는 작년과 사뭇 다른 일들이 호기심 많은 내게도 주어질 것이다. 그러면 감사하게 새로운 인연을 맺어갈 것이다.

이즈음이면 온갖 언론매체에서 새해를 맞는 다짐 같은 것을 발(發)하며 신년계획과 덕담을 쏟아낸다. 물론 교계 잡지도 예외는 아니다. <생활성서> 2008년 1월호에 실린 ‘박영호의 가톨릭시론’에는 귀담아 들을만한 이야기가 실려 있었다. 새해란 때마침 연이어 있는 성탄 판공성사를 통해 “이 밖에 알아내지 못한 죄”까지 도매금으로 용서받자는 얄팍한 속내처럼, 지난해의 부끄러움을 일거에 털어버릴 기회라는 것이다. 새롭게 다시 살아볼 좋은 기회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으로서 새롭게 산다는 것은 그리 녹록치 않는 노릇이다. 복음은 세상과 다른 가치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초월적 삶을 꿈꾸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이상과 현실의 괴리는 유난히 평생의 딜레마이다. 끊임없이 신앙적 이상과 세속적 현실의 딜레마에 부딪히지만 대부분 현실에 굴복하고 타협한다. 믿음은 성모 마리아지만 세속적 계산은 유다에 가깝다. [...] 더욱이 가난한 이웃의 버거운 삶이 여전한 이 땅에서, 월급쟁이 10년 해서 저축한 돈보다 한두 번 집을 사고팔아 얻는 수익이 훨씬 많다. 치명적 유혹이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서 다를까?”

세상의 흐름에 거슬러 살아야 하는 게 그리스도인이라면, 초기교회의 신자들이 보여주었던 세상과 사뭇 다른 대조사회를 꿈꾸었던 ‘차이의 성덕(聖德)’에서 우리는 배울 점이 많을 것이다. 우리는 다만 사랑의 크기를 통해서만 세상과 구별될 것이다. 동시대 사람들은 “그들이 서로 얼마나 사랑하는지” 보고 놀랐다고 한다. 그리스도인 공동체, 교회에 매력이 있다면 아마 이해득실에 따라서 움직이지 않고 남다른 헌신과 봉사를 가능케하는 힘의 원천이 신앙에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부활이 영광을 입기 전에 기꺼이 제 십자가를 감당하고, 어려움 속에서도 감사하는 정신에 있을 것이다.

그런데 교계의 또 다른 잡지에서는 전혀 다른 그러나 대중에게 너무나 익숙한 덕담을 담아서 내어놓는다. 차동엽 신부가 발행인겸 주간으로 있는 <참 소중한 당신>이라는 잡지 2008년 신년호에서는 이렇게 쓰고 있다.

이웃집 아들은 좋은 배필을 만나고,
성당 형제님은 건강이 얼른 회복되고,
레지오 자매님 딸은 취직을 하고,
건너편집 할머니는 원하시던 손자를 보고,
사촌은 드디어 집을 마련하고,
사돈의 팔촌까지 하느님을 알게 되고...
새해에는 좋은 일만 가득한 해 되시길”

-'참 소중한 당신'에서 기도드립니다.

독자들의 사돈의 팔촌까지 들먹이며 온갖 복이란 복은 다 받으라는 이 덕담은 얼핏 독자들을 야유하는 것 같기도 하고, 영 기분이 석연치 않은 덕담이다. 여기엔 그리스도인다운 가치는 하나도 없다. 끄트머리에 “사돈의 팔촌까지 하느님을 알게 되고...”라는 말이 덧붙여지지 않았다면 아마도 ‘신년운수(新年運數)’를 떼어주는 사주카페나, 복채를 받은 만큼 복을 빌어주는 점집이나, 아이 낳게 해주고 대학 붙게 해달라고 치성을 드리는 칠성당(七星堂)에나 어울릴 법한 문구다. 현실적으로 당장에 바라는 던 바가 이루어지는 것이야 나쁠 것이 없겠지만, 이웃을 위해 봉사하고 하느님을 제대로 섬기기 위해 필요한 어떤 소망도 담겨 있지 않다. 기실 여기서 말하는 하느님조차 문맥으로만 보면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이 그렇게 비판했던 바알신전에나 어울리는 신이며, 세속적인 냄새가 너무 진하다.

2008년 1월 6일자 <가톨릭신문>에 나갈 예정인 ‘신년좌담’ 기사가 인터넷에 먼저 올라와 있었는데, “2020, 한국 사회와 교회는?”이란 주제였다. 이 자리에 전원 신부(통합사목연구소 소장)와 차동엽 신부(미래사목연구소 소장), 박영대 소장(우리신학연구소 소장)이 나란히 서면으로 좌담을 벌였다. 모두가 연구소 소장이니 꽤 대단한 진단과 방향이 나올 법해서 기대만만이었다. 그러나 이 중에서 유난히 눈에 띄는 것은 역시 차동엽 신부의 견해였다.

“우리 사회의 변화 추이에 있어서 이번 대선은 큰 변수가 될 것입니다. 이른바 ‘성공시대’의 무드가 다시 회귀할 것입니다. 대개 성공시대의 뒤에는 행복시대가 이어집니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행복에 대한 염원이, 좌절된 성공시대를 이어서 왔지만 이명박 후보가 대통령으로 당선됨으로써 성공시대가 다시 힘을 얻을 것입니다. 하지만 임기가 끝나는 시점이면 성공시대의 무드는 다시금 행복과 평화에 대한 갈증에 길을 내어줄 것입니다. 그래서 2020년에는 사람들의 가치관에 있어서 더욱 ‘행복’에 대한 뚜렷한 가치관이 드러날 것입니다.”

이명박 씨가 대통령이 됨으로써 국민들이 바야흐로 제대로 된 성공시대에 돌입할 것이며, 임기 만료될 시점이면 이미 우리 국민은 성공의 열매 뒤에 오는 행복시대를 맛보게 되리라는 전망이다. 마치 한나라당 이명박 캠프에 소속된 선전원 같은 발언이 아닐 수 없다. 일찍이 차동엽 신부는 <무지개 원리>라는 책으로 톡톡히 재미를 보았는데, 그 내용인즉 ‘성공으로 가는 비책(?)을 알려주겠다는 야심찬 프로젝트였던 것이다. ’국민성공시대‘를 대선 슬로건으로 내세운 이명박씨 입장에서는 차동엽 신부의 쾌거야 말로 구세주가 오기 전에 미리 광야에서 외치며 그분이 오실 길을 닦아준 세례자 요한의 반열이 아니던가. 급기야 이명박 식의 하느님나라 도래설이 <무지개원리>라고 하면 지나친 억측일까? 비록 억측이라해도 결과적으로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고 있는 것만은 분명한 것 같다.

사고가 한번 상업적으로 정향되어 버리면 만사가 상인의 시각에서 보이기 마련이다. 그러나 우리 시대를 살아가는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과제가 ‘세속적 성공’은 아닐 것이다. 어쩌면 오히려 그 경쟁 속에서 낙오된 이들을 돌보아 주고 격려하는 게 더 급박한 과제일 것이다. 그러므로 세상과 다른 가치를 사는 그리스도인들과 교회는 성공보다는 성공 이면에 드리워진 그림자에 주목해야 하는 것이다. 차동엽 신부는 “2020년, 중국은 선교 대상 정도가 아니라 그야말로 인도와 함께 세계적으로 가장 주목해야 할 종교시장으로 대두돼 있을 것입니다. 물론 한국은 그 복음화를 위한 한 축을 담당하게 될 것입니다.”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종교에 대한 정체성을 마케팅을 중심으로 하는 기업 이미지와 겹쳐놓았다. 여기서 사목은 경영이 되고, 사제는 관리자가 되며, 선교는 마케팅이 되는 것이다. 여기서 마케팅의 목적이 양적인 실적이고 보면, 교회는 복음을 선포하는 주체가 아니라, 소비자들의 입맛에 맞는 종교상품을 제공하는 생산자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이런 종교에서 우린 어떤 매력을 찾을 수 있을까? 세상이 상업화되고 이익을 찾아서 몰려다니는 신자유주의가 시대적 상황이라면, 우리는 그 안에서 신음하는 백성들의 한숨을 담아낼 그릇을 마련해야 하고, 오히려 전혀 다른 영적 가치를 제시해야 하지 않을까? 그래야 교회의 미래는 불투명하지만 사람들의 미래가 희망적이 되지 않을까? 교회가 스스로 그리스도적이고자 한다면, 상업주의를 견제하는 방향으로 자신의 사명을 의식해야 하지 않을까? “믿음은 성모 마리아지만 세속적 계산은 유다에 가깝다”고 한 말이 뼛속 깊이 파고드는 새해다. 우리 시대에 참 사제는 없는가? 종교 경영자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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