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알청춘일기 - 여경]

▲ 네팔의 꽃이라는 랄리구라스. 포터 아저씨가 꺾어다 주었다. ⓒ여경

툭, 투둑. 빗방울이 하나둘씩 떨어지더니 이윽고 요란한 소리를 내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다행히 아침 일찍부터 부지런히 걸어 올라온 덕에 우리 일행은 비가 내리기 전에 고레빠니의 롯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따뜻한 물로 피로를 씻고 난로 곁에 둘러앉아 노곤해진 몸을 녹인다. 양철 지붕을 두드리는 빗소리와 장작 타는 소리가 만들어내는 기분 좋은 화음을 들으며 젖은 머리를 말리는 시간은 따뜻하고 정겹다.

아직 저녁 식사를 하기까지 시간이 조금 남았지만 우리는 미리 메뉴를 살펴보고 주문을 한다. 그러면 그때부터 요리의 첫 단계가 시작된다. 집 앞의 텃밭에서 양배추를 따서 다듬고, 쌀을 씻어 밥을 안친다. 야채를 썰고 볶는 소리가 정겹게 들려오고, 30분쯤 지나면 밥이 익어가는 냄새가 나다가, 곧 알맞게 배가 고파질 때 음식이 완성되어 나온다. 밥이 완성되기까지 한 시간 가량 걸리는 것인데, 그렇게 기다려 먹는 밥은 매번 행복하고 만족스럽다.

함께 산을 올랐던 두 사람은 회사를 그만두고 인도와 네팔로 여행을 떠나온 이들이었는데, 서울에서 회사 생활할 땐 점심시간 1시간 만에 식당 가서 주문하고 밥 먹고 커피 마시는 것까지 다 했었다며 이런 느긋함이 정말 좋다고 말했다. “뭐가 그리 바빠서 밥을 거르고 밤을 새며 살았을까”라며 천천히 짜이를 마시는 그들의 표정이 나는 좋았다. 때로는 느긋하게 앉아서 산을 바라보기도 하고, 가만히 구름이 변해가는 모양을 응시하기도 하고, 새소리를 귀 기울여 듣기도 하는 여유를 우리는 왜 스스로에게 안겨주지 못했던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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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들을 천천히 기다리고 채워가는 조금은 느린 속도. 그것이 이곳, 히말라야를 등지고 살아가는 이들의 리듬이다. 아마 산을 오르는 일 자체가 그런 리듬을 요구하는 일이기에 이곳 사람들이 그토록 느긋하며 매 동작에 넘침이 없이 겸손한 것일 테다. 산에 산다는 것은, 산을 오른다는 것은 천천히, 모든 걸음을 온전히 감당하고 모든 과정을 온몸으로 느끼는 일이기 때문이다.

울레리, 고레빠니, 2,800미터, 3,200미터……. 산을 오르기 전에는 지도를 보면서 간단히 발음하던 이름과 숫자들이지만 산행을 시작하고 나면 더이상 그리 간단치 않게 다가온다. 입으로는 몇 번이고 올랐을 히말라야지만, 직접 걷기 시작하자 한 이름에서 다음 이름으로 넘어가는 길 사이의 오르막길과 내리막길, 계단들이 눈앞에 그려지고, 그 길이 3시간, 4시간 꼬박 땀을 흘리고 가쁜 호흡을 내쉬어야 도달할 수 있는 곳임을 알게 된다.

지리산도 한번 안 가본 사람이 히말라야 트래킹이라니, 가파른 경사를 기어가다시피 오르면서 트레킹을 도전한 나를 몇 번이나 원망했는지 모른다. 그렇지만 산을 오름으로써 ‘과정’이라는 것을 온몸으로 느끼고 상상할 수 있게 되었다면, 산마을 사람들과 그들의 리듬에 조금 더 가까워진 것이라고 생각해도 괜찮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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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정을 느끼고 감당하는 것은 느리고 번거롭고 힘이 드는 일이지만 그만큼 그 뒤에 맞이하게 되는 것들이 소중하고 감사해진다. 그릇에 담겨 나온 밥이 아무리 소박하더라도, 숙소가 아무리 엉성하다 할지라도 말이다. 산을 오르내리는 길에서 닭장을 짊어지고, 혹은 키보다 더 큰 나무판자를 머리에 이고 산을 오르는 사람들을 종종 볼 수 있었다. 건물을 짓기 위해, 요리를 만들기 위해 1,000미터 가까이를 그렇게 이고 지고 올라가는 것이다. 바람이 세게 불면 무너질 것처럼 보이는 어설픈 롯지의 벽들도 저렇게 누군가가 이 높은 곳까지 이고 온 것이라 생각하니 불평할 마음이 쏙 들어가 버렸다. 지금 내 옆에 있는 그릇, 테이블, 커피……. 어느 것 하나 그 과정을 거치치 않은 것이 없다고 생각하니 절로 겸허해지는 것이었다.

도시에서는 너무 많은 것들이 생략되고 숨겨지고 잊혀진다. 주문과 동시에 나오는 커피와 샌드위치, 당일에 바로 배송되는 택배, 한 계절이면 완성되는 빌딩, 잘 손질되어 포장된 닭고기. 이렇게 간단히 우리 눈앞에 진열되고 우리 손에 쥐어지는 것들에 익숙해지다 보면, 우리는 그것이 거쳐 온 수많은 손길들을 상상하지 못하게 되고 감사의 마음도 잊게 되는 것 같다. 그러다보니 배려가 사라지고, 헤프고 폭력적인 삶을 살게 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다음날 아침, 추위와 뻐근함, 다른 이들의 뒤척임에 눈을 떴다. 다행히 비가 그쳐있었고 맑은 일출을 볼 수 있을 것 같은 예감에 숙소를 나섰다. 아직 어둠이 하늘을 덮고 있었고, 그 속에서도 흰 빛을 차갑게 발하고 있는 날카로운 설산의 실루엣이 보였다. 그리고 그 위로 수많은 별들이 떠있었다. 황홀해 하며 푼힐 전망대를 향해 부지런히 발을 움직였다. 조금씩 올라갈수록 하늘의 빛깔도 변하기 시작했다. 서서히 바뀌어 가는 하늘의 빛깔을 본다. 하늘과 땅의 경계에서 스며 나오며 묘한 색의 스펙트럼을 만들어내는 빛. 노랑, 밝은 주황, 붉은 색…….

전망대에 도착했을 때, 해가 떠올라 눈부신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이윽고 세계가 밝아졌다. 어둠에서 밝음으로 변해가는 걸음을 이렇게 온전히 바라본 적이 있었던가, 생각해본다. 아마도 없었던 것 같다. 별이 하나둘 밤의 장막 위로 나타나기 시작하는 시간, 별이 푸른 새벽의 빛에 조금씩 지워지는 시간, 하루가 밝아지는 시간을 생각한다. 그리고 은근하면서도 빠른, 지구의 자전 속도를 상상한다. 나는 언제나 그런 리듬 위에 있을 것이라 생각하니 가슴이 벅찼다. 잊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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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경 (요안나)
서강대 국어국문학과 학생. 삶, 사람, 꽃, 벗, 별, 꿈이라는 단어를 좋아한다. 울림이 예쁜 말들에 이끌려 국어국문학과에 가게 되었다. 모두가 행복한 세상을 꿈꾸고 이를 위해 문학과 예술의 힘을 빌리려 한다. 시와 음악과 그림, 나무, 물이 흐르는 공간, 공동체를 만드는 것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고향 바다를 닮아 평온하고도 깊고 강인한 사람이고 싶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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