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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과 영성
교회 위계질서가 형제애 압도해서는 안 된다[인터뷰] 광주가톨릭대학교 김정용 신부
한상봉 기자  |  isu@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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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3.06.10  12:1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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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사제 성화의 날에 즈음해 광주가톨릭대학교의 김정용 신부와 ‘사제의 신원’과 비전을 찾아가는 대화를 두 시간 남짓 나누었다. 사제는 교회의 정체성처럼 세상에 열린 개방을 요구하며, 특별히 가난한 이들의 ‘벗’이 되어 주어야 한다는 데 공감했다. 또한 사제들의 ‘계속교육’을 위한 방법도 한국 교회 차원에서 모색해야 된다는 의견을 나누었다.

사제는 ‘교회의 심장’인가?
위계질서가 ‘형제애’를 압도해서는 안 된다

- 한상봉 : 교회쇄신을 말할 때마다 등장하는 단골메뉴로 성직주의, 전례의 형식화, 신앙과 생활의 분리, 중산층화 등을 꼽는 것은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습니다만, 결국 한국 교회에서 사제들이 먼저 변하지 않으면 모든 게 희망사항일 뿐이라는 게 현실입니다. 평신도 역시 사제의 변화 없이는 성장하기 어렵죠.

2001년에 부산가톨릭대학에서 <교회의 심장>이라는 책을 펴냈어요. 신학생들이 교회의 심장이라는 취지였는데, 결국 사제가 ‘교회의 심장’이라는 뜻이겠지요. 사실 교회의 전통을 지키는 사람도, 일차적으로 교회 전통과 성경을 해석하는 사람도 성직자라는 점에서 맞는 말이기도 합니다. 일부에서는 ‘반(反)성직주의’를 주장하는 사람도 있지만, 아마 상처가 많은 사람들이겠지요. 이번 인터뷰로 사제 스스로 자신을 돌아보는 단초를 마련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먼저 신부님 생각에 가장 마음에 드는 사제는 어떤 분들이신가요?

   
▲ 김정용 신부
김정용 신부
: 그분이 선배든 후배든 개방적인 사제가 마음에 들어와요. 나이가 얼마인지, 선배인지 후배인지, 아니면 뭘 하던 사람인지, 가방끈이 길든 짧든, 얼마나 폼이 나는 사람인지 상관없이 말이 통하는 사람, 누구와도 대화를 나눌 수 있어서 늘 파트너라는 생각이 들게 하는 사람입니다. 사제들도 권위적인 사제들을 싫어합니다.

모든 사람이 그렇겠지만, 사제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형제애’입니다. 지역, 출신, 나이, 성별, 학력을 따지지 않고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실현해야 하는 게 형제애입니다. 형제애는 사실 사제들에게도 도전이 되는 복음적 관계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섬겨야 하지만, 신학교 다닐 때부터 내 마음을 움직인 것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벗’이라 불러준 것입니다. 형제애는 주종관계가 아니라 자유로운 관계 안에서만 주어집니다. 이 형제애는 주교와 사제, 사제와 사제, 사제와 평신도, 사제와 수도자 사이에서도 실현되어야 하는 복음적 요소입니다.

그런데 한국 교회에서는 그동안 ‘위계질서’가 형제애를 압도해 왔습니다. 내 스승이자 벗인 예수님은 우리를 ‘벗’이라 부르고, 교회 역시 만인을 벗으로 삼아 형제애를 살도록 초대하십니다. 그런데 그걸 몸으로 익히는 게 그리 쉽지 않습니다. 때로는 교회 안에서 추문에 휩싸인 동료 사제들을 바라볼 때, 그 행동을 지지하는 것은 아니더라도, 그 형제를 다른 사람들처럼 비난하기보다 지지해 줄 필요가 있습니다. 그게 형제애지요. 동료 사제가 겪는 어려움을 아파할 줄 알고, 객관적인 잘못을 지적하더라도, 인간적으로는 따뜻하게 지지해 주는 마음을 간직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죠. 여기서 우리는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님과 일치해야 합니다. 잘못을 옹호하거나, 같은 사제니까 편드는 것이 아니라, 같이 아파해 주고, 부족함을 함께 고백하는 태도가 중요합니다.

- 다른 사제의 잘못을 비난하면서, 자신은 그 죄에서 면제되어 있다는 안도감을 느끼는 사제들도 있는 법이죠.

   
▲ 신학생은 ‘교회의 심장’이라는데 … 광주가톨릭대학 성당 제대 ⓒ한상봉 기자

신학생들에게 실수 허용되어야 실패한 인생 돌볼 수 있어
주교와 사제, 사제와 사제, 사제와 평신도 사이도 형제적 관계

김정용 : 주교와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법적으로, 행정적으로 사제들은 주교님에 대한 마땅한 존중을 드려야 하지만, 주교와 사제의 관계도 다른 사제들과 마찬가지로 형제애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도 “내가 여러분을 위해서는 주교지만, 여러분과 함께 그리스도인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러한 고백들이 서로를 자유롭게 합니다.

주임신부와 보좌신부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보좌신부를 단순히 법적 관계로 파악해 주임신부의 협력자, 보조자로만 인식하면 주임-보좌신부 문제는 풀리지 않습니다. 하느님 안에서 함께 살아가는 인간으로, 형제로 보아야 문제가 풀립니다. 주교와 사제, 주임과 보좌, 교수와 학생, 사제와 평신도 등의 관계들이 권력관계가 되면 그곳에는 우리를 해방시켜주는 자유가 없습니다. 마땅히 선배나 후배 사제들이 서로 어려워할 수 있으나, 눈치를 보게 되면 그곳엔 자유가 없습니다.

신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항상 당당하게 살라고 가르치지만, 신학생들 사이에서는 ‘튀면 안 된다’는 나쁜 전통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교수신부들은 신뢰를 요구하며 솔직히 말하지만, 학생 입장에서는 그게 쉽지 않은 법이죠. 저희가 신학교 다닐 때에도 학교에서 쫓겨난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솔직하게 이야기하고 불만도 토로할 수 있는 분위기가 있었던 것을 다행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자유롭게 살도록 부르셨는데, 이걸 학생 때에 깊이 느끼지 못한다면 사제가 되어서도 힘들겠지요.

- 신학교를 군대 생활과 비교하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선후배 간에 위계도 엄격하고, 선배 앞에서 실수하면 안 된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그렇게 신학교 생활을 하고나서 사제가 되면, 매운 시어머니 밑에서 살았던 며느리가 시어머니 되면 더욱 가혹하다는 말처럼, 자유롭게 양성되지 못한 신학생들이 사제가 되어 보좌 시절 지나고 주임이 되면 보좌신부 시집살이 시킨다고 들었습니다.

김정용 : 그래서 실수가 허용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스무 살에 입학한 신학생들이 완벽할 수 없지요. 신학적으로나 신앙적으로 어설프기 마련입니다. 사제 생활을 오래 해도 충분하지 않은 게 신학이고 신앙입니다. 신학생이나 사제들은 성공을 통해 배우는 것보다 작은 실수와 실패를 통해 인생에 대해 더 많이 배우게 됩니다.

우리가 목표와 계획을 세운다고 다 이뤄지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실패를 통해 자신을 수정하는 자기교정능력을 키우는 게 중요합니다. 사제들에게 가장 어려운 게 자기교정인데, 일단 사제가 되면 주변에서 아무도 잘못을 지적해 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선배 사제들도 이래라저래라 말하기 힘듭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직접 말은 안 해도 문제를 지적하는 신호를 읽어내는 능력입니다. 신호를 읽고 제 삶과 생각을 교정하는 능력이 필요합니다.

성직자의 평신도성 되새겨야 … 함께 성장하는 교회의 지체
사제는 관리자 · 리더라기보다 봉사자


   
▲ 광주가톨릭대학교 성당의 ‘십자가의 길’에서 ⓒ한상봉 기자
- 헨리 나웬은 상처받은 치유자로서의 사목자를 이야기합니다. 상처를 받아 보아야 다른 사람의 상처를 이해하는 폭이 넓어지겠죠. 사제들이 사목 현장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대부분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들이 아니라 부족하고 실패한 인생들이 많은 법입니다. 그러니 사제 스스로 실패의 경험을 통해 그들을 이해하게 되는 것이겠죠. 사제들 중에는 주로 의사와 변호사 등 나름대로 사회적 위치와 전문직을 지닌 이들과만 친하려 드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은근히 서울대 출신만을 선호하고, 이들과 친분을 유지하기 위해 공력을 기울이는 사제들을 보면서 마음이 착잡합니다. 이런 사제들은 사목위원을 뽑을 때도 사회적 영향력과 재산 정도를 가늠하는 경향이 있는데, 사제는 누구의 ‘벗’이 되어야 할지 고민해 봐야겠습니다.

김정용 : 광주대교구 정평위 위원장을 맡고 있는 이영선 신부 같은 경우에는 곁에 그런 사람이 없어요. 신부님이 늘 시골 본당만 다녀서 그런지, 신자들 속에서 흙에 묻혀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잘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주변에는 농부들과 평범한 사람만 있다는 말인데, ‘사제의 신자성’을 잘 보여주고 있는 것이지요. 이탈리아의 어느 교의신학자 한 분은 ‘성직자의 평신도성’을 회복하자고 하셨는데, 그분 말씀을 빌리지 않더라도 사제 역시 특출난 인간이 아니라 평범한 신자 안에서 함께 성장해야 하는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 그렇게 말씀하시면 바로 반론이 나올 수도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는 사제들이 군대식으로 하면 장교나, 적어도 하사관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는가 하는 주장도 있습니다. 그러니 신자들과는 좀 달라야 하지 않느냐는 것이죠.

김정용 : 그게 신학교에서 잘못 가르쳐서 그런 것입니다. 신학교에서 사제들의 헌신과 봉사보다 ‘리더’로서의 자질을 강조했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입니다. 리더와 지도자의 역할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사제로서 제일 중요한 요소는 아닙니다. 주교든 사제든 리더십조차 봉사를 통해 드러나야 합니다. 강력한 리더십을 강조하는 것은 복음과 상관없습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도, 성경에서도 가장 강조하는 것은 ‘봉사’입니다. 그게 사제의 정체성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본당에서 사제들이 공동체를 위해 어떻게 헌신할까보다, 어떻게 깃발을 들고 이끌 것인가만 고민한다면 잘못된 것이죠.

- 봉사 개념이 리더 개념으로 갈 때, 바로 이어지는 것이 ‘관리’ 개념입니다. 사제가 관리자가 된다는 것인데, 교수신부들도 신학생을 관리하는 사람이 되기 쉽습니다.

김정용 : 사제의 역할은 공동체가 복음적 가치에 녹아들도록 식별하는 데 있습니다. 사제들이 신학을 공부하는 이유도 단순히 교회전통을 계승하기 위함이 아니라 복음적 식별을 할 수 있는 자질을 키워주는 것입니다. 결국 사제는 본당에서 최종적인 결재권을 갖고 관리자 같은 위치에 있지만, 공동체의 지향을 받들어 봉사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사제 개인의 독단적인 결정이나 명령은 봉사와 거리가 멉니다.

결국 사제는 본당에서 신자들과 합의체적 태도를 지녀야 한다는 것인데, 이것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정신이기도 합니다. 합의체 정신은 교황과 주교 사이에서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주교와 사제, 사제와 수도자, 사제와 평신도 사이에서도 합의체 정신을 존중해야 합니다. 정말 복음적인 사안에서는 아흔아홉 명이 반대해도 받아들이면 안 되지만, 그런 사안이 아니라면 민주적인 차원을 배제하지 않고 합의체적 결정을 내려야 합니다. 결국 소통 문제인데, 이렇게 교회 지체 간에 합의를 추구한다면 신자들의 불만도 많이 사라질 것입니다.

교회도 민주주의 … 교회법보다 성령의 작용 신뢰해야

- 돌아가신 수원교구장 김남수 주교님께서는 <사목>지 대담에서 “교회는 민주주의가 아니다”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는데요.

김정용 : 그것은 굉장히 왜곡된 말입니다. 교회를 잘못 이해했다는 뜻인데, 이 말은 결정은 내가 할 테니 신자들은 가만있으라는 말로, 문제가 있습니다.

- 수원교구가 원곡성당에서 노동상담소를 폐쇄할 때 이야기로 기억합니다만, 당시 주교님은 ‘잘못되면 내가 책임진다. 그러니 너희들의 영혼 구원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다. 잘못된 결정이라도 여러분은 주교에게 순명했으니 구원받을 수 있고, 책임은 주교가 지니 결정에 무조건 따르라’는 취지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실제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는 합의정신을 강조했지만, 주교와 사제들의 합의를 통해 사목적 결정을 내린 전례도 별로 없고, 사제총회도 거의 열리지 않는 교구가 많은 것으로 압니다.

김정용 : 이 마당에서 교회법적 권위와 성령에 대해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교구에는 교구장도 있고, 참사와 교구평의회 등 자문기구들이 있는데, 이런 법적 · 제도적 장치보다 중요한 것은 성령의 작용입니다. 성령의 작용은 대단한 개방성을 지니고 지체들 사이의 합의를 이끌어내는 힘입니다. 여기서 성령의 작용이란 어떤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 공동체의 합의가 충만하게 존중되어야 한다는 것이죠. 그 합의를 기다리지 못하면 쉽게 법에 호소하는 것입니다.

- 합의라는 게 성령의 작용과 연관이 있다면, 수도회의 공동식별이나 사회적으로 많이 이야기되고 있는 다중지성과 비슷한 것인가요? 이를테면 사제나 평신도들의 신앙감각에 대한 신뢰라고 말해도 좋을까요?

김정용 : 맞습니다. 우리 교회에는 아직 그런 기풍이 충분히 자리 잡지 못하고 있는 게 사실이죠.

   
▲ 광주가톨릭대학교 강의실 복도 끝에 휴게실이 있다. 대화와 소통이 절실한 한국 교회 ⓒ한상봉 기자

강론의 핵심은 사제의 진정성
성경과 인간 역사의 깊이 안에서 성경 읽어야

- 주제를 바꿔서, 본당에서 제일 안타까운 것은 사제가 강론을 잘 못하는 것입니다. 강론을 듣다보면 ‘나라면 이렇게 말했을 텐데’라고 외람된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신자들에 대한 사제의 봉사 가운데 가장 큰 게 강론이라는 생각이 드는데, 초등학생들에게나 할 만한 강론을 들어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사제 성화의 날을 맞이해, 사제가 갖추어야 할 덕목이 있을 것 같습니다.

김정용 : 광주가톨릭대에서는 신학생들에게 ‘복음선포자’로서의 사제를 강조합니다. 좁혀 말하면 강론을 통해 하느님의 말씀이 잘 드러나도록 하자는 것인데, 일주일에 한번 성당에 오는 사람들에게 강론을 잘 하는 것은 중요하겠죠.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강론이 짧든 길든 ‘진성성’이 담겨야 한다는 점입니다.

사실 강론을 잘 한다는 것은, 그저 말을 잘 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 속에서 하느님을 만나고, 강론하는 나 자신을 만나고, 세상을 사는 다른 이들을 만나는 것입니다. 그게 복음에 대한 해석학의 근본입니다. 물론 복음선포는 강론만으로 이뤄지는 것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지금 세상사 안에서 일어나는 하느님의 작용을 읽어내는 것이죠. 이것은 단순히 성경을 열심히 공부한다고 얻어지는 것은 아니죠. 자칫하면 성경을 고고학적 문서로만 대할 위험도 있습니다.

- 강론은 주교의 책무였다가, 주교 혼자 다할 수 없으니 점차 사제들에게 위임된 것으로 압니다. 교부들의 저작들이 대부분 강론집인 것도 그 이유지요. 그분들은 복음을 시대의 고민에 응답하며 다이나믹하게 풀어갔습니다. 한국 교회에 교부들의 사상이 충분히 전달되지 않고 전례만 강조한 데서 문제가 생긴 게 아닐까요?

김정용 : 교부들의 성서 해석은 버라이어티했지요. 교부들에게서 정신적 자극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사실이죠. 말씀이 사람이 되었다는 강생 교리에 따르자면, 복음을 씹어 먹을 수 있는 말씀으로 육화시켜야 합니다. 그러자면 성경의 깊이와 인간 역사의 깊이 안으로 들어가서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성경이 역사 안에서 벌어진 이야기를 담은 책이라면, 성경을 역사와 분리시켜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오늘을 살아가는 인간들에 대한 열정적인 시선이 필요합니다. 인간이 나날이 겪는 고통과 아픔, 그리고 희망에 대해서 이야기해야 합니다.

예를 들자면, 파리에서 뉴욕까지 30분 안에 비행기로 날아갈 수 있는 기술이 이론적으로는 가능하다고 합니다. 이게 가능하려면 비행기가 대기권을 뚫고 가야 하는데, 문제는 사람의 몸이 이를 견디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한국 사회의 산업화 역시 이 비행기처럼 빠른 속도로 진행되었고, 이 때문에 정치 · 경제적, 문화 · 종교적으로 많은 부작용이 초래되었습니다. 최근 입에 오르는 갑과 을의 관계도 다 이 부작용입니다. 이런 사회에서 미치지 않고, 우울증에 걸리지 않고 숨을 쉬고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기적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요.

사제들의 계속교육, <사목> 같은 매체 필요해

- 신학교 교육과정을 이수하고 사제가 되면, 많은 사제들이 사실상 특별한 관심이 없는한 신학적 관심을 놓치기 쉬운 현실입니다. 그러니 강론에도 깊이를 요구하기가 어렵습니다. 이런 점에서 <함께하는 사목>지가 폐간된 것이 안타깝습니다. 예전에 발행되던 <사목>지는 사제 대중이 읽기에 부담스러웠지만, <함께하는 사목>으로 바뀐 뒤에는 사제들 사이에 비교적 호응이 좋았던 것으로 압니다. <사목>은 본래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성과를 사제들에게 보급하겠다는 취지로 창간한 줄로 알고 있습니다. 결국 일상적인 사제교육과 사제들의 커뮤니케이션을 위한 매체가 한국 교회에 없다는 것은 문제입니다.

김정용 : <사목정보>와 <경향잡지>로는 <사목>지가 갖던 지향점과 내용을 담기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주교회의에서는 <경향잡지>에 기대를 걸었으나, 맥락이 다른 대중잡지가 이 역할을 맡는 것은 처음부터 무리였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사목>지 폐간 과정도 개운치 않고요. 물론 잡지 발행에 따른 재정문제가 있었다고는 하지만요.

- 주교회의에서 발행하는 잡지는 수익성을 보고 내는 게 아니라 필요에 따라 발행한다고 봅니다. 교회 잡지 가운데 적자가 나지 않는 잡지가 거의 없을 지경인데, 유독 <사목>만이 재정문제 때문에 폐간한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현재 한국 교회에는 성직자 숫자가 만만치 않아서 정말 사제들에게 필요한 잡지를 만들면, 캠페인을 통해 사제들에게 구독료를 받아서 충분히 잡지 발행이 가능하다고 봅니다.

김정용 : 사실 <사목>지는 공의회가 끝나고 곧바로 발행된 것이기에, 아주 발빠른 대응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지향점도 명확해서 공의회 정신을 구체화시키는 데로 더 나아갔어야 했다고 생각합니다. 현재 한국가톨릭사목연구소가 운영되고 있지만, 아직 명확한 비전을 제시하고 있지 못한 것 같고, <사목>지와 같은 매체가 없기 때문에 연구성과를 사제 대중과 나눌 수 있는 방법도 제한을 받기 마련이죠.

- 사제들의 계속교육이 필요한 상황에서, 예전의 <사목>지는 내용이 너무 학술적이고 어려웠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사제들조차 안 읽는 잡지였습니다. 물론 폐간 직전 1년 동안 발행된 <함께하는 사목>은 새로운 시도를 하긴 했지만 말입니다.

   
ⓒ한상봉 기자

신학과 사목의 분리, 책상물림 신학과 구태의연한 사목관행 낳아

김정용 : <사목>지 폐간을 바라보면서, 우리 교회의 문제는 사목과 신학의 분리라고 생각합니다. 신학은 사목을 비판적으로 지지해주고, 사목은 신학이 책상물림 신학이 되지 않도록 견제하는 역할을 하면서 해석학적 순환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신학은 사목자들에게 복음적 영감을 줄 수 있는 것이어야 합니다.

논문들을 보면 가끔 어떤 문제의식에서 이 논문을 쓴 것인지 알 수 없는 것들이 많습니다. 논문 역시 신학자의 신학적 지평 속에서 우러나오는 것인데, 사목적 고민과 성찰이 엿보이는 논문이 별로 없는 거지요. 심지어 토착화 문제를 다루어도 학자들의 관심사일 뿐 사목현장의 고민을 담아내지 못합니다. 결국 토착화되지 못하는 토착화신학이라고 말해야겠지요. 결국 신학은 신자들의 신앙감각을 담아내는 방향으로 가야 하고, 이러한 성찰이 신학자 자신의 자생력을 키워갈 수 있어야 합니다. 단순한 외래신학의 탐구만으로는 부족합니다.

- 현재 개신교의 경우에도 한때 민중신학이 돋보였는데, 현재는 한국신학연구소나 민중신학회에서도 실효성 있는 신학을 내놓지 못하고 있습니다. 가톨릭의 경우에도 우리 사회에 대한 신학적 해석은 거의 없죠. 최근엔 오히려 강우일 주교님 같은 분이 신학자들이 해야 할 역할을 대신하고 있다는 인상도 짙습니다. 그렇다고 사목자들이 신학적 성찰을 논리적으로 풀어내기는 어려울 것 같고요.

김정용 : 우리가 칼 라너나 폰 발타사르에 대해 연구하는 것도 좋은 일이지만, 이러한 공부가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문제의식에 응답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합니다. <사목>지 문제도 결국 신학과 사목이 분리된 결과라고 말했지만, 신학하는 이들이 사목현장과 동떨어져서는 좋은 신학이 나오기 힘들 것입니다. 사목도 신학의 영양공급을 받지 못해서 지금처럼 되었습니다. 주교님들도 사목과 소통하지 않는 신학에 대한 절망감을 느끼고 신학적 관심을 접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신학교마저 사제양성에 초점이 있기 때문에 신학은 관심에서 밀려나 있는 상황입니다. 신학교는 학자를 키우는 것이 아니라 사목자를 키우는 곳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이라는 것이지요. 그러나 좋은 신학자가 없으면 좋은 사목자도 나오기 어렵습니다. 한국 교회는 그런 좋은 신학자가 나올 수 있는 토양이 필요합니다.

- 그럼 현재로선 좋은 신학자가 나올만한 토양을 만들기 힘들다는 이야기입니까?

김정용 : 그렇게 말하면 책임을 미루는 것 같고요. 교수신부들은 신학교 체제에 적응해야 하기 때문에 신학 연구가 쉽지는 않은 일입니다. 신학생들을 가르치고, 대화도 나누고, 술도 같이 마셔야 합니다. 이른바 신학생들에 대한 관리 차원이 들어오니 바쁘기만 합니다. 그래서 저는 전임교수보다는 작은 본당을 맡고 사목하면서 출강하고 싶은 생각도 있습니다. 한편 ‘신학총서’나 ‘교부학총서’처럼 출판사와 함께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 마지막으로 동료 사제들과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한 마디 해주시죠.

김정용 : 사제가 된다는 것은 스승이신 예수님처럼 고통받고 힘겨운 사람들에게 애정 어린 마음을 지니고 살겠다는 서약 같은 것입니다. 사람이 죽어가고 아파하는 상황에서 멀리서나마 이들과 함께 아파하지 않는다면 사제의 삶이 얼마나 삭막하겠습니까. 신문 귀퉁이에 난 기사라도 찬찬히 보고 사목적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문정현 신부님처럼 길 위에서 살 수는 없겠지만, 그 관심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으면 합니다.

- 긴 시간 인터뷰에 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제들이 사제 성화의 날을 지내면서, ‘종교공무원’이라는 인상을 세상에 주지 않고 기꺼이 낮은 곳으로 찾아가는 사제로 살아주시길 바라면서 마침 인사를 드립니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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