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업주의 교회에서 영성 구출하기-너는 누구냐⑭

지난 12월 1일 MBC방송에서 보도한 바에 따르면, LA타임즈는 한국사회를 병들었다고 진단하였다. 삼성 비자금과 BBK 주가조작사건,외국어고의 입시부정,신정아 씨와 벨리댄서 교수인 안유진 씨의 학력위조사건 등 최근 잇따라 발생한 스캔들은 거의 모든 한국인이 부정행위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의구심을 들게 한다는 것이다. 이 모든 스캔들의 배후에는 성공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또 한국에서는 생존경쟁이 갈수록 무자비해지고 도덕성은 경시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로 인해 결국 부정과 부패가 발생한다고 LA타임즈는 전했다. 자신의 병통(病痛)을 스스로 느끼지 못할 만큼 우리 사회는 뒤틀려 있는 것일까? 투표 방법 가운데 “묻지마, 투표”라는 게 있다는데, 후보자의 도덕성과 정책비전을 보는 게 아니라 국민들이 오로지 ‘쥐꼬리 만큼이라도 내게 이득이 되는지만 따져보는 습성’을 갖고 있다면 그 나라는 미래가 없다. 요즘 같으면 노자(老子) 같은 이가 우리나라에 와보았다면 사색(死色)이 되어 돌아갔을 것이다. 국밥집에서라도 말 한 번 거들어 보지 못하고 퉁박을 받았을 게 뻔하기 때문이다.

<무지개 원리> 4장은 “좌뇌에 숨은 블루오션을 찾아라”이다. 좌뇌의 생각의 바다에는 아직 그물을 드리우지 않은 무진장한 보물이 있으니 어서 가서 그물을 던지리라는 복음이다. 일러주어 고맙다. 그러나 실상 본문에서는 주로 ‘정보’ 획득에 대한 이야기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언제 어디서나 정보를 얻어야 기사회생(起死回生)할 뿐 아니라 성공성취(成功成就)하리라는 것이다. 차동엽 신부는 자신이 ‘머리가 좋은 체질’이라는 말을 한의사한테서 들었다고 말한다. 자신은 ‘미래정보’에 관심이 많고 그 정보는 자신의 자산이며, 늘 질적으로 좋은 아이템을 내놓으려고 노력하는데 이것은 교만이 아니라 객관적인 진술이란다. 객관적 진술이라는 것의 기준이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참으로 자기 자신의 생각에 대한 확고한 믿음과 자신감이 있구나, 하는 것이다. 그는 머리만 믿고 게으름을 피우지 않는다.

차동엽 신부는 “길을 가다다 간판을 보고도 시대의 추세를 읽고, TV 드라마나 개그 프로를 보면서도 새로운 정보를 얻는다. 신문이나 잡지를 보면서도 기막힌 정보를 발견하고는 흙에서 진주를 건지는 기쁨을 누리기도 한다” 정말 부지런히 머리를 써서 새로운 정보를 확보하기 위해 심혈을 기울이는 것이다. 그의 말마따나 “눈을 감은 사람은 손이 미치는 곳까지가 그의 세계요, 무지한 사람은 그가 아는 것까지가 그의 세계요, 위대한 사람은 그의 비전이 미치는 곳까지가 그의 세계다” 그러나 세상과 인간, 우주 삼라만상의 이치, 나아가 하느님의 신비를 깨닫는 것은 단지 ‘정보’와 ‘정보에 대한 해석’만으로는 어림없는 일이다. 길거리를 돌아다닐 필요도 없이 정보를 얻고자 한다면 하루 종일 인터넷 앞에 앉아서 웹서핑을 하면 되는 세상이다. 정보 부족이 문제라기보다 인생을 바라보는 시선과 의지를 굳게 하고 마음을 맑게 하는 원천이 무엇인지 알아채는 것이 더 시급하다. 사람이 사는 데는 성공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그것을 깨달은 뒤라야 그 사람의 사회적 성취가 세상뿐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도 도움이 된다.

그런데도 가톨릭교회의 사제인 차동엽 신부가 “정보가 재산”이라면서 ‘정보’와 ‘지식’에 집착하는 이유를 도무지 알 수 없다. 그분이 관장하시는 ‘미래사목연구소’를 ‘미래정보연구소’이거나 ‘천주교 정보부’쯤으로 생각하시는지 묻고 싶다. 아니면 이 장에서도 주로 사례를 들어 이야기하는 분들이 마이크로소프트사의 창립자 빌 게이츠, <미국 타임지>가 선정한 세계를 움직이는 최고의 사업가이자 <포춘지> 선정 세계 10대 영향력 있는 재벌 등으로 명성이 화려한 홍콩 최고의 갑부 리자청이듯이, <미래경영연구소>라고 간판을 바꾸어 달아야 하는지 곤혹스럽다. 하물며 ‘물음을 바꿔 물으라’는 항목에서는 어느 조미료 회사의 “어떻게 하면 매출을 올릴 수 있을까?”하는 질문에 화답한다. 그리고 정말 우리가 모델로 삼아야 하는 것은 빌 게이츠나 리자청처럼 세계언론에 이름을 날리고 세상에 막대한 영향력을 끼치며 갑부가 되는 것인지, 생각할수록 갑갑스럽다. 갈망의 방향을 잘못 잡은 것이 아닐까? 특히 그리스도교 신앙을 통하여 예수처럼 따라 살기를 갈망하는 사람들이라면, 그분의 제자가 되고자 한다면 아마도 자신의 에너지를 다른 방향으로 돌려야 할 것이다. 그걸 우리는 신학적으로 ‘회심’이라 말한다.

<무지개 원리>에서는 빌 게이츠를 가장 대표적인 모델로 삼는지 여러 항목에서 반복적으로 그의 ‘위대함’이 선포된다. 차동엽 신부는 “평생학습이 성공하는 사람들의 가장 큰 특징”이라고 말하면서 빌 게이츠가 어려서부터 학교수업 외에도 집안 서재에 틀어박혀 책을 즐겨 읽었다고 말한다. 그가 일곱 살 때 즐겨보던 책은 <세계대백과사전>이란다. 빌 게이츠처럼 많은 분량의 책을 읽은 아이도 없단다. 아마도 빌 게이츠는 특별한 아이였던 모양이다. 그리고 요즘의 논술세대에겐 한편으론 모범이 될만하다. 그런데 문제는 휴가를 가서도 공부를 했다는 것이다. 이른바 ‘테마가 있는 휴가’인데, 가령 수년 전에는 브라질로 휴가를 가면서 휴가 기간 내내 ‘물리’에 관한 서적을 탐독했다고 한다. 그리고 ‘걸출한’ 과학자를 초빙하여 설명을 듣기도 했다고 한다. 진상이야 차동엽 신부가 전해준 정보만으로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아무튼 빌 게이츠는 휴가를 사실상 반납하고 공부만 했다는 것인데, 그게 바람직한 휴가방법이냐는 것이다.

우리 말에 “뒷간에 가서는 똥이나 누라”는 말이 있다. 지금이야 수세식 변기이니 좀 더 편해진 셈이지만, 예전에 화장실에 들어가 신문을 다 읽어야 변소에서 나오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런 사람들은 뒷사람은 생각하지 않고 제 생각에만 골똘한 사람들이라 뒷말을 듣기 마련이었다. 우리가 화장실에 앉아 있다고 해서 사실상 똥만 누는 것은 아니다. 책이 없어도 신문이 없어도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 있기도 하고, 아무 생각 없이 쉬어 줄 필요도 있는 것이다. 일은 서울에서 보지만 우리 집은 경주에 있어서 가능하면 한 주일에 한번은 경주에 내려간다. 강남고속버스 터미널에서 출발하면 버스는 4시간 30분 동안 고속도로를 달린다. 처음엔 읽을거리를 찾아서 무릎에 올려놓지만, 대체로 창밖을 바라보며 잠도 좀 자면서 이런저런 상념에 빠지기도 한다. 한 주일 동안 어찌 살았는지 반성도 하고, 앞으로 살아갈 방도도 모색해 본다. 결론은 없어도 이렇게 공상에 빠져 있는 시간이 소중하고 행복하다. 그리고 생각지 못했던 아이디어가 떠오르기도 하는데, 참 기쁘다.

더 중요한 것은 이렇게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주어지는 빈 시간에야 비로소 ‘관계’에 대하여 생각해 볼 여유를 갖게 된다는 것이다. 어찌 되었든 우리 사회는 정신없이 일해야 먹고 사는 자본주의 사회이고, 일을 할수록 업무량은 늘기 마련이다. 일과 중에는 가족과 이웃과 친구들을 돌아볼 여유가 없다. 버스나 전철 안에서 졸다 깨다 하면서 그들을 기억해내고 전화를 걸어보는 것이다. 복되게도 우리 세대는 핸드폰이란 편리한 통신망도 손에 쥐어져 있지 않은가? 그러나 번호를 누르기 전엔 그 그리운 사람들과 통화가 되지 않는다. 길을 걸어가면서 남의 간판을 볼 시간에 낙엽 진 가로수와 빌딩 숲 사이로 언뜻 보이는 하늘을 쳐다볼 여유를 가져야 한다. 그래야 사람이 된다.

휴가철이 되어서도 책보따리나 노트북을 들고 다니는 사람들은 사실 불행한 사람들이다. 오죽하면 저럴까, 안쓰러운 사람들이다. 정말 업무 시간에는 읽을 수 없었던 아껴둔 책이 있다면, 그런 영화가 있다면 휴가 때 보는 것도 행복한 일이 될 것이다. 그러나 지식과 정보 획득 차원이라면, 그것은 인간성이 망가진 것이다. 휴가철에야 만날 수 있는 그런 사람조차 없다는 것이다. 그 귀한 시간에 가족들과 더불어 다 못하고 지나친 이야기를 내일 아침 걱정 안 하고 나누어야 하고, 마음은 그렇지 않지만 섭섭했던 친구나 이웃들과 정을 나누어야 한다. 이들이 바로 내가 일하는 이유이고, 내가 살아가는 기쁨이 되기 때문이다. 새로운 창조를 위해 여백을 걸어둘 줄 모르는 사람은 실용적인 인간이 될 수는 있지만 생생하게 살아있는 인생을 살지 못한다. 그래서 자신이 성취한 그 무엇으로 사람을 강박하거나 혼자서 우쭐대기 마련이다. 잘 생각해 보라. 무엇이 자신을 정말 기쁘게 하는지? 사랑은 정보만으로 얻어지지 않는다. 재산으로 사람의 마음을 길어올리지 못한다. 하느님은 바닥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시기 때문이며, 우리가 절망한 자리에서 손을 내밀어 주시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루 24시간이 모자란듯 정보를 끌어 모우는 사람들은 이른바 ‘일중독’을 의심해 보아야 한다. B형 간염에 걸려서 고생하였다면, 제대로 된 섭생법에 대한 건강정보를 얻어내는 대신에 몸을 그만 혹사하고 좀 쉬어야 하는 것이다. 그게 몸에 대한 예의이다. 그러므로 <무지개 원리>에 얽매이지 말고 차동엽 신부도 잘 말하고 있듯이, “우리는 우리의 관점을 넘어서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럴 때에 비로소 다른 사람의 의견을 더욱 경청하고, 또 그들이 갖은 시각도 더 개방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좁은 틀을 벗어나 생각의 창을 열자.” 내가 하고 싶은 말이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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