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9일 (연중 제10주일), 루카 7,11-17

오늘 복음은 나인이라는 마을에 사는 어떤 과부의 외아들을 예수님이 살리셨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는 다른 복음서들 안에는 없고, 루카 복음서에만 있습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사실을 겪은 초기 신앙인들이 예수님에 대해 그들이 믿던 바를 하나의 이야기로 꾸몄고, 그것을 루카 복음서가 기록으로 남겼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살리는 분이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옛날에는 전하고자 하는 진리, 곧 어떤 가치관이나 삶의 자세 등을 하나의 이야기로 꾸며 전달하였습니다. 사람들이 그 안에 담긴 진리를 쉽게 기억하고, 다른 이들에게 쉽게 옮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이야기 자체는 역사적 사실(事實)이 아닐 수 있습니다. 그런 문서에서 우리가 중요하게 보아야 하는 것은 그것이 전하는 사실이 아니라, 그 이야기가 전하는 가치관이나 삶의 자세입니다. 옛날의 역사서들도 그런 방식으로 기록되었습니다. 그 안에는 역사적 사실을 전하는 것 같이 기록되었지만, 사실은 이야기 안에 그 시대의 가치관 내지 삶의 자세를 담아 전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옛날의 역사서술방식입니다.

나인 과부의 외아들을 예수님이 살렸다는 오늘 복음의 이야기에서도 우리가 찾아야 하는 것은 예수님이 죽은 사람을 살렸다는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예수님에 대한 초기 신앙인들의 믿음입니다. 오늘의 이야기에서도 우리는 초기 신앙인들의 믿음을 알아들어야 합니다. 그 이야기를 만든 신앙공동체는 구약성서 열왕기에 나오는 이야기를 참고하여 기록하였습니다. 오늘 우리가 제1독서에서 들은 이야기입니다. 엘리야 예언자가 하느님에게 청하여 사렙타 지방에 사는 어떤 과부의 아들을 되살린 이야기입니다. 하느님은 축복하고 생명을 살리시는 분이라는 이스라엘의 믿음을 담은 구약성서의 이야기입니다.

이스라엘 신앙의 초기에 있었던 하느님에 대한 신앙은 하느님이 사람들과 함께 계시고, 사람들은 그 함께 계시는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여 그 함께 계심을 그들 삶의 현장에 실현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에 율법이 생기고 제물봉헌이 있는 것도 그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의식하고, 그분을 중심으로 사람이 살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율법은 인간 삶의 구체적 상황에서 함께 계시는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는 데에 필요한 지침이었습니다.

제물봉헌은 사람이 노동하여 얻은 산물(産物)을 하느님의 시선 아래에 갖다놓고, 그것을 하느님의 시선으로 보겠다는 의례였습니다. 자기가 노동하여 얻은 산물이지만, 그것을 ‘돌보아주고 가엾이 여기시는’ 하느님의 시선으로 보면, 그것은 자기 한 사람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더 절실히 필요로 하는 이웃과 나누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안에 맏아들을 봉헌하는 의례가 있었던 것도, 태어난 자녀들을 모두 하느님의 시선으로 보겠다는 의미였습니다.

이스라엘은 어느 시기에 율사(律師)라는 직무를 만들었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율법의 의미를 알아듣고, 그것을 제대로 실천하게 하는 일을 전담하는 직무입니다. 또 이스라엘은 사람들이 제물봉헌에 충실하게 하도록 그 일을 전담하는 사제(司祭)라는 직무를 만들었습니다. 율사는 율법을 위해 일하고 사제들은 제물봉헌을 위해 일하는 사람들입니다. 그 시대 이스라엘에는 열두 지파(支派)가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그중 한 지파, 곧 레위 지파에게 그 두 직무를 맡겼습니다. 그들은 율법과 제물봉헌에 헌신하고 생업에는 종사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에게 십일조(十一租)라는 제도가 생겼습니다. 11지파에 속하는 사람들이 각자 수입의 10분의 1씩을 바쳐서 율법과 제물봉헌의 직무를 전담한 한 지파, 곧 레위 지파의 생활을 경제적으로 보장하는 제도입니다.

‘나무는 보아도 숲을 보지 못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율사는 율법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사제들은 제물봉헌의 절대성을 강조한 나머지, 지켜야 할 것, 바쳐야 할 것에만 사람들의 시선을 가게 하였습니다. 그 결과 사람들은 율법과 제물봉헌에만 시선을 빼앗겨 하느님을 생각하지 못하였습니다. 나무만 보고 숲을 잊은 것입니다. 이제 하느님은 사람을 고치고 살리는 분이 아니라, 율법 준수와 제물봉헌만 지켜보고, 그것에 충실하지 못한 사람을 벌하는 분이 되고 말았습니다.

사람은 구실만 있으면 사람에게 횡포합니다. 그것이 인류역사이지요. 나라를 위해 일한다는 사람들이 나라를 구실로 횡포하고, 하느님을 위해 일한다는 사람들이 하느님을 구실로 횡포합니다. 율사와 사제들이 등장하면서 지키고 바치는 일에 충실하지 못한 사람들은 모두 죄인이 되었습니다. 그와 동시에 인간이 겪는 모든 불행은 하느님이 주신 벌로 둔갑하고 말았습니다.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 복수하고 싶은 우리의 졸렬한 마음을 담아 상상한 하느님입니다.

그런 역사적 상황에 나타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 사람들의 병을 고치고 죽은 이를 살리셨다는 신약성서의 이야기들은 하느님은, 유대교 기득권자들이 주장하듯이, 사람을 버리고 벌주는 분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리는 것이었습니다. 벌주고 버리는 일은 사람을 죽이는 일입니다. 예수님에게 하느님은 용서하고 살리는 분이십니다.

루카 복음서는 예수님이 죄인들과 세리들과 어울린다고 불평하는 유대교 기득권자들에게 예수님이 세 개의 비유를 말씀하셨다고 전합니다.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되찾아서 기뻐하는 목자, 은전 한 푼을 잃었다가 되찾아서 기뻐하는 여인, 아버지로부터 유산을 받아 아버지를 버리고 떠나간 아들이 탕아(蕩兒)가 되어 돌아왔을 때, 그를 맞이하며 기뻐하는 아버지의 비유입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찾고 용서하고 살리시는 분이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요한 복음서는 말합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여러분을 사랑했습니다. 여러분은 내 사랑 안에 머무시오.”(15,9) “여러분이 서로 사랑을 나누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여러분이 내 제자들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13,35) 사랑은 사람을 살립니다. 오늘의 복음, 곧 예수님이 나인 과부의 외아들을 살리신 이야기는 종교기득권자들이 죄인으로 판단하여, 사람노릇 하지 못하게, 곧 죽여 놓은 사람들을 예수님이 복음을 선포하여 살려놓으셨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사람을 죄인으로 판단하고 버리는 분이 아니라, 사람을 사랑하고 용서하며 살리신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 루카 복음서 공동체가 만들어서 전하는 오늘의 이야기입니다.

용서하고 사랑하라고 주신 우리의 생명입니다. 용서하고 사랑할 때 우리가 참으로 자유롭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을 고치고 살리면서 하느님의 자유가 어떤 것인지를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아버지이신 하느님의 생명을 사는 신앙인은 사람을 살린다는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서공석 신부 (요한 세례자)
부산교구 원로사목자. 1964년 파리에서 사제품을 받았으며, 파리 가톨릭대학과 교황청 그레고리안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광주 대건신학대학과 서강대학교 교수를 역임하고 부산 메리놀병원과 부산 사직성당에서 봉직했다. 주요 저서로 <새로워져야 합니다>, <예수-하느님-교회>, <신앙언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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