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블로의 필름창고] 강철대오: 구국의 철가방, 육상효 감독, 2012년

생일 파티! 사랑 때문에 역사의 현장으로

지난 석가탄신일 연휴 예수살이공동체 청년들은 한국 현대사 기행을 떠났다. 서울 안에 있는 근현대사 유적지나 기념관을 쭉 걸어서 순례를 하는 행사였다. 2박3일간 계속 걷고 잠자리도 불편했지만 참석했던 청년들에게는 덤으로 평생 남을 추억거리 하나를 얻을 테고, 더 크게 참으로 한맺힌 우리 역사의 흔적들을 가슴으로 몸으로 보듬어보는 소중한 자리였으리라 생각한다.

여러 순례지를 거닐면서 지금의 우리를 있게 한 위대한 순간들이 역사 속에 머물고 어떻게 보면 박제화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스러운 마음도 생겨났다. 우리 역사의 보석 같은 순간과 현장들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것은 소중한 일이지만, 그것이 우리 현재 안에서 역동하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요즘 일베라는 괴상한 사이트 때문에 ‘민주화’가 매우 부정적 용례로 쓰이게 되었다. 생각없는 가수 하나가 방송에서 ‘우리는 그런 일로 민주화시키지 않아요’ 했다가 된통 욕을 얻어먹었지만, 청소년들 사이에서는 심심찮게 사용되는 듯하다. 그들이 이상하게 사용하는 그 민주화를 위해 우리는 얼마나 많은 희생을 치르었는가. 아직도 미완의 언어인 민주화가 언제부터 역사 속에 머물고 박제화된 한 일면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었을까. 전두환의 비자금 문제가 다시 불거지고 있다. 아직도 풀지 못한 많은 문제가 산적해 있다.

이 영화는 한참 민주화 열기가 뜨거웠던 1980년대 중반. 미 문화원 점거농성 사건을 소재로 본격적으로 이어진다. 1985년 5월 23일 오전 서울대, 고려대, 성균관대, 연세대, 서강대 학생 73명이 미문화원 2층 도서관을 점거한 사건이다. 당시 학생들은 광주학살에 대한 미국의 책임 규명과 사과를 요구하며 72시간 동안 농성을 벌인 끝에 25일 자진해산했는데, 이들 중 16명이 실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뤘다.

중국집 배달부 대오는 여대생 예린을 짝사랑한다. 어떻게 다가가고 싶지만 이래저래 꿀리는 심정인지라 자신의 직업을 속이고 대학생으로 위장한다. 생일파티의 현장인 줄 알았으나 그건 암호였고, 대학생들이 ‘생일파티’를 외치고 들어간 곳은 바로 미문화원이었다.

너무도 어깨가 무거웠던 그들, 그때 그곳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나?

한 시대의 심각한 사건이 중국집 배달부를 중심으로 조금 코믹하게 그려진다. 시대는 참 가혹했다. 어린 20대 나이의 젊은이들에게 너무도 많은 짐을 얹었다. 한국의 학생운동은 5․16쿠데타 이후 진보적 정당이 존립하기 어려웠던 상황에서 민중의 입장을 대변했으며, 특히 1980년대의 민주화운동은 그 학생운동이 개화하여 큰 성과를 거둔다. 학생들은 직접적 행동은 물론이거니와 이론적으로도 무장을 했다.

▲ 강철 대오 사랑을 쫓다가 역사의 현장 속에서 투쟁을 한다.

처음에 대오는 대학생 흉내 내려다 이리저리 버벅대고 살짝 따당한다. 그러다가 전경들의 진압을 한 방에 날려버린 뒤에 목에 힘을 주게 된다. 일행들에게 각목 내리치는 법도 훈련시키고, 연모했던 예린과도 한결 가까워진다. 그 고립되고 위태위태한 공간에서 예린의 마음을 얻기 위해 열혈투사의 행세를 마다하지 않는다. 하긴 남자들이란 사랑하는 여인을 위해 아니 조금 더 정확하게 마음을 얻기 위해 온갖 일도 마다하지 않는다. 부디 그 마음이 오래가면 좋을 텐데, 많은 경우 마음을 얻으면 돌변하고 마니.

▲ 사랑하는 사람을 마주하고 다정하게 이야기 나누는 순간은 얼마나 설레고 짜릿한 순간일까.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을 얻기 위해선 그 무엇이든 될 수 없으랴.

예린 때문에 열혈 투사 행세를 하고 일정 정도 맹활약을 하지만 문화원에 갇힌 동지들(?)과 섞이기 힘들다. 돌아가면서 민중가요 한 곡씩 뽑는데 아는 것이 없으니 김완선의 <오늘밤>을 부른다. 누군가 옆에 달싹 붙어 사회과학 이론을 설명하지만 하나도 알아먹을 수 없다. 프락치를 가리기 위해 온갖 운동권 은어 테스트를 해도 알 길이 없다. 대오는 이들과 같이했지만 같지 않은 존재였다. 대오는 프락치로 몰리고 흠뻑 두들겨 맞는다.

90년대 학번들은 이전 선배에 비해 ‘은어’를 쓸 일이 별로 없었다. 가끔 선배들은 ‘스트(스트러글, 시위)’ ‘러R(러시아혁명)’ ‘NK(북한)’ ‘SK(남한)’ 같은 말들을 자연스럽게 하곤 했다. 대오는 이런 말들을 하나도 들을 수 없지만 중국집 배달원의 은어를 할 줄 안다. 방송을 통해 이상한 소리를 하고, 같은 중국집의 형이 그 말을 알아들으니. 중국집 배달원이 철가방을 들고 우르르 몰려들어온다. 미 문화원이 고립상태라 이곳으로 음식을 보내달라는 메시지였던 것이다. 중국음식이 미 문화원으로 반입되면서 대오의 프락치 누명도 벗겨진다.

물대포를 쏘아대면서 본격적인 진압이 시작된다. 대오는 물에 젖어 떠는 예린을 덮어주기 위해 성조기를 내린다. 사적 동기를 갖는 행위였지만 성조기가 내려졌다는 건 일정한 상징성을 갖는다. 미국, 美國, 米國, 尾帝. 한국사회에서 반미는 심각한 금기사항이었다. 모든 정보가 차단되고 역사적 진실이 가려져 있던 시절 영원한 우방 저 ‘아름다운 나라’를 비판한다는 건 이적행위요, 좌경용공적 발상일 따름이다. 그러나 진실이 드러나기 시작하면서 우리는 미국을 바로보기 시작했다. 우리 선배들은 ‘양키 고 홈’을 외치기 시작했다.(멕시코 사람들은 미국사람을 ‘그링고’라고 부른다. 워낙 미국 때문에 슬픈 나라인데, 국경선의 미군 복장이 녹색이었나 보다. 그래서 멕시코 사람들은 나름 영어로 꼴보기 싫은 미군을 향해 ‘Green Go!’ 외친다. 여기서 유래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음, 그리고 흔치 않지만 꽤 살벌한 구호도 있었다. “세계에서 각처에서 미제의 각을 뜨자”라는.

▲ 알자지라에서 성조기가 내려지는 사건을 보도하는데, 이때 알자지라가 있었는지. 영화니까.

물대포에 모두 쓸려가고 예린과 전설의 투사는 중국집 배달원으로 위장해 밖으로 빠져나간다. 닭장차에 실려가는 대오. 무사히 탈출한 예린은 열라게 뛰어가면서 하트를 날려줌으로써 대오가 오래 동안 꿈꾸어왔던 로망을 실현해준다. 참으로 힘든 사랑 이야기다.

동시대의 같은 또래 그러나 같을 수 없던

이 영화는 머리모양, 옷, 거리의 풍경 등에서 80년대에 대한 아련한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서울의 봄’은 무참히 짓밟히고 전두환이 등장하고 내내 9시 땡전뉴스가 남발했던 시절이다. 프로야구도 시작되고, 아시안게임, 올림픽도 열리고 이래저래 컬러플해지기 시작한 때다. 민주와 자유를 위한 함성은 온갖 현란함과 독재의 언어혼란전술을 뚫어내면서 수많은 희생을 통해 형식적 절차적 민주주의를 쟁취했다. 최루탄 연기 가득했던 80년대 대학시절을 보낸 그들이 30대가 될 쯤 386이라는 말이 생겨났다.(이 말의 적절성에 대해서는 많은 문제제기가 있다. 편의상 쓰일 때가 많기는 하다.)

대오는 그런 시대의 주역 같던 386에 낄 수 없던 청년이다. 예린을 향한 연모의 마음도 높고 견고한 신분의 벽이 가로막는 것처럼 보인다. 그들 각자가 사용하는 언어와 은어, 애창하는 노래 등에서 그런 차이는 더욱 두드러진다. 동시대를 살아가지만 다른 세계 속에 있는 것이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편치만은 않은 대목들이다. 닭장차에 끌려가는 대오의 표정은 편해 보인다. 어찌 되었든 마음이 가는 대로 할 만큼 했다는 안도감이 느껴진다. 그러면서 쓸쓸한 표정이 감돈다. 어느 시대나 세상 어느 곳에나 있을 ‘대오’에게도 희망을.

한 시대의 심각했던 사건을 코믹하게 전개하고, 영화 속 운동권 학생을 우습게 묘사하는 장면에 혹 불쾌할 관객도 있을지 모르겠다. 시대의 요청을 거부하지 않고 목숨과 엄청난 고통을 담보로 한 선배들의 노고와 헌신성은 높이 평가 받아 마땅하다. 그렇지만 영화 속 비쳐지는 운동권에 대한 희화화 속에서 그 훌륭한 선배들의 일정한 한계가 노정되어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 또 소수지만 민주화의 성과를 전리품처럼 여기는 ‘그때 그 사람들’이 있다. 이들이야말로 현실 속에서 역동해야 하는 민주화운동을 박제화하고 기념화하기에만 바쁘다. 이미 스스로 기득권 세력에 합류해 있으면서 과거의 자신과 단절하면서 심각한 자기배반과 자기모순에 직면해 있는 부류다.

우리 역사의 한순간이 이렇게 문화 콘텐츠의 소재로 재구성되는 건 고무적인 일이라 생각한다. 사실 우리의 힘겹고 위대한 역사란 참으로 풍성한 재료가 있음에도 그것에 대한 활용은 너무도 부실한데, 앞으로는 한결 나아지리라 믿는다.


김지환
(파블로)
마포에서 나서 한강과 와우산 자락의 기운을 받으며 살아왔다. 역사를 공부했고 그중에서도 라틴아메리카 역사를 한참 재미있게 공부했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도 이 지역 이야기는 가슴을 뜨겁게 한다. 현재 출판사 편집자로 일하고 있다. 여전히, 좋은 책이 세상을 바꾼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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