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라의 마을에서 살아남기 - 28]
올해도 어김없이 모내기철이 돌아왔다. 논마다 물이 그득 차고, 그 논에 모가 폭폭 꽂히면 내 마음이 그렇게 시원할 수가 없다. 메말랐던 가슴에 생명의 기운이 쫙 번지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누군가 내게 농사일의 백미를 꼽으라고 한다면 나는 기꺼이 모내기라고 말하겠다. 물론 내가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게 허리가 꼬부라질 만큼 모를 안 심어봐서인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시골에 산 지 어느덧 7년째에 접어들었지만 사실상 내가 모내기를 제대로 해본 경험은 없다. 코딱지만 한 땅에서 장난치듯이 모내기를 해본 게 다고, 신랑이 모내기를 하면 거드는 척한 게 다다. 게다가 올해는 둘째 아이까지 있으니 논에 발 한번 담가보지 못했다. 당연히 모내기는 오롯이 신랑 몫, 그런데도 이 사람 기가 막히는 실험을 감행하고 있다. 바로 맨땅에 모내기! 논을 갈지 않고 물만 댄 상태에서 모내기를 하는 것이다.
그래도 괜찮겠냐며 걱정하는 내게 신랑은 아무렇지 않게 대꾸했다.
“우리 논은 수렁논이라 논을 갈면 오히려 모 심기 힘들어요. 지난해 해봐서 알겠지만 모가 떠버리기 쉽잖아요. 풀 때문에 걱정이긴 한데 호미로 매면 되니까.”
너무나 아무렇지 않게 말하니까 나도 그런가 보다 하고 믿고 맡겼다. 어차피 내가 거들 수 있는 일도 아니고, 논을 안 가는 방식이 성공한다면 앞으로도 계속 기계 힘을 빌리지 않고 농사를 지을 수 있으니 좋은 일 아닌가. 물론 모 심을 때 손끝으로 땅을 파가며 모를 꽂아야 하니 시간도 오래 걸리고 훨씬 수고롭기는 하겠지만 자기가 좋아서 하는 일이니 나서서 말릴 수도 없었다. 그저 격려하며 지켜보는 수밖에.
그런데 마을 사람들이 야단이 났다. 모내기 전에 땅을 두 번 이상 가는 것은 상식, 아니 철칙이나 다름없는데 그걸 무시하고 있으니 무척 답답하고 안타까우신 모양이다. 끝집 아저씨는 혀를 끌끌 차며 찾아와 내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집이가 신랑 못 이기요? 고집이 쎄도 쎄도 그렇게 쎈 사람은 첨 보네. 어쩌려고 논을 안 갈고 모내기를 한디야? 그래가꼬는 나락 못 먹어. 땅을 안 갈면 곡식이 뿌리를 못 내린당께. 논을 갈아준다고 해도 마다 하니 답답해 죽겄어. 집이 신랑은 뭣땜시 고생을 사서 한다요?”
수봉 할머니는 짠해 죽겠다는 눈길로 나를 바라보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저녁 나절에 모 좀 심어줄게. 옆에서 보고 있으니 애가 타서 죽겄네. 우리 못자리도 도와줬는디 나도 손 좀 보탤게.”
도대체 모를 어떻게 심고 있기에 마을 사람들이 이렇게 야단인가 싶어서 애들 둘을 데리고 신랑이 모를 심고 있는 현장으로 찾아갔다. 그랬더니 둑새풀이 무성한 논 한가운데서 쭈그리고 앉아 모를 심고 있는 게 아닌가. 힘들지 않느냐고 했더니 앉아서 심으니까 허리 숙여 서서 심을 때보다 오히려 편하다고 한다. 둑새풀이 많은데 안 매도 되냐고 했더니 둑새풀은 곧 시드니까 맬 필요가 없다고 한다. 그 앞에서 내가 무슨 말을 하랴. 남들 보기에는 고행인데 본인은 한 땀 한 땀 수를 놓듯이 한없이 한가로운 마음이니 저절로 고개가 숙여질 따름이었다. 내가 먹는 밥 한 알이 지극한 도의 결정체란 생각이 드니 신랑에게 고마울 수밖에.
이렇게 모를 심으니 600평 남짓 되는 논에 모내기를 마치는 데 보름쯤 걸릴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모 심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고 있으면 언제 다 마칠까 싶어 한숨이 푹푹 나오고 답답한데, 어느덧 절반 이상 심고 앞으로 닷새 정도 뒤면 끝낼 수 있을 것 같다고 한다. 힘들다는 말 한 마디 없이 사부작 사부작…, 하여튼 대단한 사람이다. 누구 말마따나 우리 신랑은 바보 아니면 도인이 분명하다. 하느님도 이 사람의 아름다운 몸짓을 보시면 풍년 들게 안 해주시겠나. 아니, 그냥 우리 식구 먹고살 만큼만 주시면, 찾아오는 손님에게 선물로 조금씩 나누어줄 만큼만 주시면, 더 바랄 게 없다. 큰 욕심만 부리지 않는다면 이래 살아도 좋고 저래 살아도 좋으니, 남들이 뭐라 한들 다 괜찮고 말고다.
정청라
귀농 7년차, 결혼 5년차 되는 산골 아낙이다. 유기농 이웃들끼리만 사는 안전한 울타리 안에 살다가 두 해 전에 제초제와 비료가 난무하는 산골 마을 무림으로 뛰어들었다. 왕고집 신랑과 날마다 파워레인저로 변신하는 큰 아들 다울이, 삶의 의미를 다시금 깨닫게 해준 작은 아들 다랑이, 이렇게 네 식구가 알콩달콩 투닥투닥 뿌리 내리기 작전을 펼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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