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업주의 교회에서 영성 구출하기-너는 누구냐⑬

십여 년만에 석사논문을 썼다. 십수 년 전에 가톨릭노동사목전국협의회라는 단체에서 일을 하다가, 노동문제를 둘러싸고 교회와 노동자들 사이에 간혹 다툼이 발생하곤 했다. 노동사목은 중간에 끼어 난처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는데, 이는 교회가 1987년 6월 민주항쟁 이후로 노동계에 등을 돌리게 되면서 발생한 문제였던 것 같다. 열린 공간에서 노동운동이 발전하자, 학교와 병원 등 교회가 운영하던 사업장에서도 노사문제가 발생할 수밖에 없었고, 교회 역시 다른 현장과 마찬가지로 사업주의 입장에 서곤 하였다. 이 틈바구니 속에서 의당 나는 교회의 입장을 변호하기보다 노동자들의 목소리를 먼저 듣게 되었다. 우리가 주님으로 고백하는 예수님도 노동자 출신이지 않았던가. 아버지처럼 목수일 하던 굳은살 박힌 손으로 병자들의 이마를 짚어주고, 먼데 하늘을 손끝으로 서늘하게 가리키는 그분의 모습이 선연하게 그려진다.

늘 신학동네 언저리에 서성거렸던 나는 교회와 신학에 대해서 더 공부해보고 싶었고, 마침내 평소 잘 알고 지내던 수녀회에서 장학금을 주어 대학원에서 신학을 공부할 수 있었다. 학기를 다 마쳤으나 그 당시엔 하는 일이 많아서 진득하게 책상머리에 앉아 논문을 쓸 겨를이 없었다. 결국 나중에라도 쓰지, 했다가 십수 년이 다 되어 논문을 쓰게 된 것이다. 그 당시엔 시몬느 베이유에 대하여 쓰고 싶었는데, 세월이 지나 이번에는 도로시 데이에 대하여 논문을 준비하였다. 교수님들이 통과시켜 주실 지는 아직 미지수다. 공교롭게도 시몬느 베이유나 도로시 데이나 둘 다 노동운동을 하였고, 사회주의자였으며, 또한 가톨릭 영성에 심취했던 ‘활동하는 신비가’이며, ‘여성’이다. 이제 논문 초안을 써서 지도교수에게 넘기고 나니, 잠시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 그리고 소설가 한강이 지어서 부르는 <가만가만 부르는 노래>라는 음반을 듣고 함께 나온 책도 읽었다. 책표지엔 “나지막한 음성, 소박한 마음, 깊은 울림”이라고 적어놓았다. 첫곡은 ‘12월 이야기’인데, 반주도 없이 육성이 그대로 귓전을 타고 돌아서 가슴팍에 스며든다.

눈물도 얼어붙네 너의 뺨에 살얼음이
내 손으로 녹여서 따스하게 해줄게
내 손으로 녹여서 강물 되게 해줄게
눈물도 얼어붙는 십이월의 사랑 노래

서늘한 눈꽃송이 내 이마에 내려앉네
얼마나 더 먼 길을 걸어가야 하는지
얼마나 더 먼 길을 헤매어야 하는지
서늘한 손길처럼 내 이마에 눈꽃송이

모든 것이 사라져도 흘러가고 흩어져도
내 가슴에 남은 건 따스했던 기억들
내 가슴에 남은 건 따스했던 순간들
모든 것이 흩어져도 가슴속에 남은 노래

추운 겨울에 위로를 주는 따스한 노래다. 그래, 우리의 삶이 다른 이에게 그렇게 온기로 스며야 하는데, 하고 생각해 본다. 한강은 <여수의 사랑>으로 유명한 젊은 소설가이며, ‘한정림의 음악일기’라는 콘서트에서 소개된 탱고 뮤지컬 가사를 쓰게 되면서, 한정림 씨의 권유로 음반을 만들게 되었다고 한다. 한강이 직접 노래를 불렀는데, 스튜디오에서 녹음을 할 때, 한정림 씨가 느낌이 중요하니까 많이 부를 필요 없다면서 말했다. “절대로 노래를 잘하려고 하지 말고, 그냥 있는 그대로 불러요.” 한강은 “그냥 있는 그대로라니 ...... 그 말이 더 무서웠다”고 했다. 무엇을 하겠다고 기를 쓰지 말라는 것이다. 기성가수가 아니니 부담 없이 그냥 편히 부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가, 그 이의 노래를 들으면 어깨에 힘이 좀 풀어지는 것 같다. 검투사의 칼끝을 무디게 하는 노래다. 한강은 음반을 내면서 이렇게 바랜다. “정말 그렇다. 소박한 마음뿐이다. 처음 노래들을 흥얼거리면서 느꼈던 위로와 따뜻함, 몰래 감춰둔 불빛 같던 마음들이 당신에게 가 닿을 수 있기를 빌 뿐이다. 그저 있는 그대로 ...... 담담하게 그렇게.”

그런 느낌으로 들을 수 있는 노래가 한 곡 더 떠오른다. ‘햇빛이면 돼’. 그래, 햇빛이면 되는 걸, 그렇지, 하는 생각이 든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대단한 것이 아니라 다정함이 아닐까, 생각해 보는 것이다.

나의 꿈은 단순하지 너와 함께 햇빛을 받으며
걷는 거지 이 거리를 따사롭게 햇빛을 받으며
햇빛 바람과 함께 춤을 추는 거지
햇빛 너의 손잡고 걸어가는 거지
햇빛 너의 눈보며 웃음 짓는 거지
눈이 부실 때면 눈 감는 거지

나의 꿈은 평화롭지 너와 함께 햇빛을 받으며
쉬는 거지 한가롭게 따사롭게 햇빛을 받으며
햇빛 우리에게는 그거면 충분해
햇빛 시린 벽까지 뎁혀줄 용기가
햇빛 우리에겐 그거면 충분해
한 나절 따스한 햇빛이면 돼

행동하는 철학자로 알려진 라인홀드 메스너는 유럽의회 의원으로 일하다가 텅 빈 고비 사막으로 들어갔다. 거기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사막은 또한 산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정신을 깨끗하게 정화시켜 준다. 사막의 텅 비어 있음이 우리를 겸허하게 만들고 언제나 경탄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혹시 우리 자신 안의 텅 비어 있음에 대한 경탄이 아닐까? 모세, 예수 그리스도, 무하마드 등 종교 창시자들만 사막에서 영감을 얻은 게 아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깊이 생각하기 위해 사막으로 갔다. 그곳에 기분을 전환시켜 줄 수 있는 오락거리가 있는 게 아니다. 사막에는 사방 어디서나 늘 똑같은 그림만 보일 뿐이고 모래알들 사이에서 들리는 것이라고는 바람 소리 뿐이다. 이것이 정적이다. 그런데도 광활한 사막은 숨을 쉬고 말을 하고 빛을 발한다. 무한성과 영원성에 대한 예감이 사막에서는 우리의 제한성과 연약함과 만난다. 사물과 자극이 없는 곳에서 인간은 우선 자기 자신에 놀라 움찔한다. 그리고 완전히 아무것도 없는 무(無)에 기겁을 하고 뒤로 물러난다. 이런 긴장 속에서 자기 안에 있는 사막을 발견한다.”

요즘은 대선을 앞두고 있어서인지, 목숨 걸어 놓은 사람들처럼 “한 껀 해야지.” 다짐을 하는 사람들을 자주 보게 된다. 대선 주자들은 말할 것도 없이, 그들의 공약에서 난무(亂舞)하듯이, 무슨 일이 있어도 성공하겠다는 것이다. 성공해 보이겠다는 것이다. 절망적인 사랑이다. 사랑에 절망한 사람들이 입신출세(立身出世)을 통해 사랑을 쟁취하겠다는 것이다. 안쓰럽다. 자기 안에 있는 사막으로 들어갈 엄두를 내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허방으로 앞 다투어 가려다 보면 결국 다시 돌아오는 것도 절망이다. 사랑은 쟁취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은 베푸는 것이다. 사랑은 정작 우리가 갈망한다고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은총으로 주어지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자기 안의 사막을 발견하고 겸손해지는 것이다. 그래야 첫눈처럼 사랑이 우리에게로 와서 문득 말을 건넬 것이다.

그런데도 <무지개 원리> 3장에서는 성공을 위해 아예 뇌를 바꾸라고 주문한다. 뇌 속에 미래가 있으니, 뇌 속에 성공을 입력하라고 한다. 뇌 속에 성공의 패턴을 심고 작은 데서부터 승리감을 얻어간다면 언젠가 대박을 터뜨릴 수 있다는 것이다. 승리하는 습관이 승리를 가져오는 것이며, 성공은 성공 위에 세워진다는 것이다. 성공만큼 우리를 성공하게 해주는 것은 없다는 것이다. 섬뜩한 말이다. 승리하는 자가 있으면 반드시 패배하는 자가 있기 마련일 텐데, 이런 경쟁논리가 사제의 입에서 가차 없이 터져 나오는 시대를 무엇이라 불러야 할까? 40여 년전 제2차 바티칸공의회에서 용도폐기시킨 개선주의적이고 제국주의적 발상이 개인적 차원에서 일상을 장악하고 들어올 모양이다. 소박함과 다정함이란 뒷전에 있을 도리밖에 없으니 가슴이 싸늘해지는 느낌이다. 자기 뇌에 성공이란 세포를 이식시키라고 끝없이 세뇌시키는 책이 백만부도 더 팔렸다고 선전하는 걸 보며 호곡(號哭)소리를 듣는 기분이다.

우리는 이 각박한 세상을 살면서 오히려 “나의 꿈은 평화롭지 너와 함께 햇빛을 받으며/쉬는 거지 한가롭게 따사롭게 햇빛을 받으며/햇빛 우리에게는 그거면 충분해”라고 노래해야 하지 않을까?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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