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업주의 교회에서 영성 구출하기-너는 누구냐⑫

참 오래되었지만 아직도 귀에 솔깃한 이야기가 있다. 전라도 무주 산골에 살적에 가끔 서울에 다니러 오곤 하였는데, 한번은 내 아는 이가 사주카페에 갔다가 차 한 잔 얻어 마시고, 재미삼아 사주를 보았단다. 초년 운이 나쁘지만, 나이 사십이 넘으면 재물이 모인다고 했단다. 그리 나쁘지 않은 운수(運數)였다. 그 참에 내 사주도 봐달라고 하였다는데, “천생(天生) 중”이라고 했단다. 태어나기를 스님으로 태어났다는 말인데, 지금 뭐하는 사람이냐고 물어서 “지금 시골에서 농사를 짓는다”고 했단다. 그러니 사주를 봐주던 이가 “잘 되었소. 생업 중엔 농사가 가장 좋지요. 다행이오.” 하더란다. 아무래도 전답을 갈아먹는 것이나 마음 밭을 일구고 사는 것이나 다를 바 없다는 뜻이겠다.

문득 베네딕트 성인이 수도원 규칙을 만들면서 “기도하고 노동하라”고 했다는 말이 떠올랐다. 몸으로 일하고 마음으로 새기라는 뜻으로 읽힌다. 천지간(天地間)에 사람이 있으니, 하늘의 기운과 땅의 기운을 고루 받아야 참 사람이 되겠다 싶었다. 내가 직접 들은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전달받은 메시지가 그리 기분 나쁘지 않았다. 그리고 그 뜻을 새기는 게 내 삶에 보탬이 되겠다, 싶었다. 세속을 걷는 중이라! 가운데 있어 중(中)이고, 여전히 길을 걷고 있으니 도중(道中)이다. 마음을 헤아릴 법 하니 중(僧)이기도 한데, 사는 게 영 아니니 아마도 땡중일 것이다. 땡중 신세를 면하기 위해 고민하고 있다면 그도 봐줄 만하다. 내가 나를 아껴 다루지 않으면 누가 나를 가엾다 할 것인가? 가만 가만 내가 나를 두고 볼 일이다. 문득 인터넷 사이트에 올리는 내 별칭이 ‘봄날’인 것이 새삼스럽다. 봄처럼 따뜻하다는 뜻이기도 하고, 거구로 읽으면 ‘날봄’이니, 나를 본다는 뜻이다. 그런 걸 보면 나도 그 사주카페에 앉아 있던 생면부지(生面不知)의 거사님 덕을 보고 있는 셈이다. 나는 운이 좋은 사람인 가 보다.

차동엽 신부의 <무지개 원리>에는 운 나쁜 사람들의 ‘팔자타령’ 이야기가 실려 있다. 그분은 “팔자는 없다”고 단언하는데, 사람이 팔자에 영향을 받는 것은 점술가들이 찍어 준 이야기가 내내 우리의 무의식에 남아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말씀인즉, 실제로 팔자(八字)란 허황한 것인데, 사람들이 따르니 그것으로 돈벌이 하는 사람들이 늘어난다는 것이다. 예화를 읽어보면, 다들 운(팔자)이 나쁘다고 낙인찍힌 사람들 이야기뿐이다.

“점쟁이가 하는 말이 아들 사주가 안 좋다는 거예요. 하는 일마다 꼬이고 안 된대요?”
“그래서 제가 무슨 방법이 없냐고 물었죠. 그랬더니 100만원만 가져오면 액운을 없애고 운이 트이는 방법을 가르쳐 준다는 거예요.”

이렇게 장삿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점술가의 말은 믿을 게 못 된다. 차동엽 신부의 말이 백번 지당하다. 자신의 운명을 타인의 입술에 내맡기는 것은 바보짓일 것이다. 중요한 것은 나의 해석이다. 살다보면 점술가가 아니더라도 “쟤는 그게 타고났나봐”하는 이야기를 종종 듣게 된다. 어르신들은 세월이 가르쳐준 지혜를 어느덧 몸에 지니게 되는 법이다. 또 입에 올리지 않을 뿐이지 척 보면 척 알게 되는 그런 직관을 지닌 분들도 있기 마련이다. 그걸 구태여 팔자니 뭐니 할 필요도 없다. 그냥 그런 것이다. 이럴 때 차동엽 신부 말마따나 “그래, 난 원래 그래!”하면 사람이 깨이지 못한다. 나름대로 내게 주어진 모든 언어들을 새기고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러면 그 안에서 지금 여기서, 아님 나중에라도 깨쳐야 할 구석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

놀랍게도 차동엽 신부는 “자아상이 바뀌면 팔자도 바뀐다”고 말한다. 자신이 자기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에 따라서 운명이 바뀐다는 뜻이다. 그저 시험에 한 번 떨어진 것을 가지고 “난 실패자야!”야 하고 생각하면 그 인생에 종이 친다는 것이다. ‘일본 마쓰시다 전기의 창업자, 마쓰시다 고노스케’가 신입사원을 뽑을 때 “나는 운이 좋습니다.”라는 자아 이미지를 가진 사원을 뽑았다는 사례를 들어가며, ‘난 운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일하면 정말 운이 좋아진다는 것이다. “난 할 수 있어”하고 자아이미지를 가지면 뭐든지 실제로 이뤄질 수 있다는 것이다. 아마도 ‘적극적 사고방식’을 배우라는 말일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신체적 장애에도 불구하고 좋은 자아상을 지니고 성공한 사례를 보여준다. 본인들이 실제로 긍정적인 자아상 때문에 성공했다는 확인을 해준 적은 없지만, <무지개 원리>에선 “네 손가락의 피아니스트” 이희아 씨와 중증 장애인으로 세계적인 가스펠 가수가 된 스웨덴의 레나 마리아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들은 모두 깊은 신앙심을 가진 부모에게서 잘 양육되었다. 아마도 지극정성으로 보살핌을 받은 이들은 시련을 딛고 오로지 자신이 잘 할 수 있는 길을 찾아서 잘 달려갈 수 있었을 것이다. 차동엽 신부의 말대로라면, 이들은 ‘정말’ 운 좋은 사람들이다. 그러나 이들이 스스로 “난, 운이 좋은 사람”이라고 여겼기 때문에 성공했는지는 사실 모를 일이다. 차동엽 신부는 오직 어느 분야에서건 최고의 영광을 얻어냈던 ‘탁월한 영웅’을 사례로 들곤 한다. 그들은 성공한 사람들이며, 기차게 운 좋은 사람들이다.

그러나 문제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운 나쁜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그들처럼 빛나는 영광을 차지하지 못한 사람들은 운 나쁜 사람인데, 그 이유인즉, 자아에 대한 나쁜 이미지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두 가지 문제를 지적할 수 있다. (1) 모든 인생의 목적이 ‘사회적 성공’에 있는가? (2) 빛나는 사회적 성취를 이루지 못했더라도 소박하게 인생을 즐기고 있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운 나쁜 사람이거나 한심한 인간이거나 나쁜 자아상을 지닌 사람들인가? 물론 그렇지 않을 것이다. 차동엽 신부는 “팔자타령”을 하지 말고 “팔자를 바꾸라”고 우리에게 주문한다. 내가 나를 바꿀 수 있다고 확신한다. 그러나 나이 먹은 어른들은 다 안다, 사람이 그리 쉽게 바뀌지 않는다는 것을. 담배 하나 끊는 것도 그리 어려운 일인데, 기질을 바꾸고 삶의 방식을 바꾸고, 자아상을 바꾼다는 것은 그리 녹록치 않은 일이다.

<무지개원리>는 이미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들이 뒤처진 사람들에게 “나처럼 해봐요, 이렇게……. 나처럼 해봐요 조렇게…….”하면서 약 올리면서 하는 말이다. 그러나 사람이 바뀐다 한들 사회적 환경이 열악해서 꿈을 이루지 못하는 사람들도 많다. 그러면 “환경 탓 하지 말라”고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서울대 입학생 가운데 대다수가 서울 강남구 서초구의 쾌적한 가정-교육환경에서 공부한 학생이라는 것은 어찌 설명할 것인가? 물론 개천에서 용이 나오지 말라는 법은 없지만, 개천을 아예 복개(覆蓋)해 놓은 우리 교육 현실에선 참 무책임한 말로 들린다.

팔자가 좋으니 나쁘니 하는 말은 우리의 관심사가 아니다. 팔자를 고치자는 말도 사실 나는 관심 없다. 이 모든 논의의 중심에 “잘난 사람”이 되고 싶다는 얄팍한 탐욕이 숨어 있음을 드러내고 싶을 뿐이다. 사람들의 욕망에 기대어 처방전을 내어 준다는 점에서 점술사나 무지개원리나 동기에 있어서는 다를 바 없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당연히 그 욕심을 버리고 주님을 닮도록 열망해야 한다. 팔자는 바꾸어야 하는 게 아니라 버려야 하는 것이다. 팔자를 고치고자 하였다면 예수는 응당 십자가를 거절하고 보란 듯이 만군의 왕이 되어야 했다. 승전가를 올리고 그렇게 자신을 못 살게 굴었던 바리사이들과 사두가이들을 굴복시켜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분은 십자가에서 결코 내려오시지 않았다. 그분은 자신의 팔자이든 운명이든 그 모든 걸 하느님께 내어드렸다. “제 뜻대로 하지 마시고 당신 뜻대로 하소서”하고 기도드렸다. 내가 나를 조종해서 성공할 수 있다는 생각은 그리스도교 신앙과 양립할 수 없다. 그리스도인은 이미 하느님의 소유가 된 백성이기 때문이다. <무지개 원리>에서 말하는 세리와 죄인과 창녀들은 예수를 만나 팔자를 고친 게 아니라, 새로운 하늘을 맛보게 된 것이다. 불구를 딛고 성공으로 달음질한 것이 아니라 그분의 사랑 안에 잠긴 것이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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