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업주의 교회에서 영성 구출하기-너는 누구냐⑪


무지개의 색깔은 무엇일까? 물어볼 것도 없이 유치원생들도 다 아는 일곱 색깔 무지개, 빨주노초파남보다. 무지개는 모든 빛을 다 감아쥐었으니 그림자가 있을 리 없다. 그림자가 있다면 아마 유사품일 것이다. 진짜 무지개는 일곱 색깔로 빛이 나고, 미래를 희망하는 자의 면류관처럼 빛난다.

차동엽 신부가 지은 <무지개 원리>의 1장은 “그들은 달랐다”는 제목으로 시작한다. 무지개를 잡은 이들은 시작부터 달랐다는 뜻일까? 마지막엔 “바보 소리를 들으면 성공한 것”이라면서 장기려 박사에 대한 이야기로 맺는다. 그럼 무지개를 잡은 이들은 남달리 바보 소리를 들었던 사람들일까? 물론 아니다. 요지는 이렇다. 바보 소리를 들으면 성공한 것인데, 마음을 먹어도 바보로 살기란 참 어렵다는 것이다. 바보처럼 늘 늘쌍한 환자들에게 무료진료를 해주고 가난한 이들에게 먹을 것을 퍼주던 그를 사람들은 ‘이상한 사람’이나 ‘바보’라고 빈정거렸을 것이란다. 결국 상식에 의존하지 않고 세상의 흐름에 거슬러 산다는 것은 그다지 쉬운 일이 아니라는 말씀이다. 참 옳고도 옳은 말씀이다. 시류에 거슬러 살다가 바보 소리를 들으면 다행이다. 어떤 이들은 시류를 거역하다 십자가에 달려서 죽었다. 스팔타쿠스가 그랬고 예수가 그랬다. 일제 강점기 독립투사들이 그랬고, 오스카 로메로 대주교와 간디는 총에 맞아 죽었다. 이들은 바보이며 어처구니이며, 그래서 ‘성자’이다.

그렇다면 <무지개 원리>에서 말하는 ‘그들’은 누구이고 ‘달랐다’면 어찌 달랐다는 말인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은 성공한 사람들이었다. 물론 바보가 되기에 성공한 사람은 아니다. 차동엽 신부가 극찬하며 모범으로 삼자고 나선 유다인들은 ‘세계에서 제일 우수한 석학, 비범한 예술가, 엄청난 부호들’이다.

"20세기를 주도한 최고의 지성 21명 중 15명이 유다인이다. 할리우드의 걸출한 영화감독들과 스타들의 대부분이 유다인이다. 미국 내 최고 부자 40명 중 절반이 유다인이다”

이 책에선 이들 석학, 예술가, 부호들이 ‘바보처럼’ 어렵게 얻은 권력과 재산과 명예를 헌신짝처럼 버리고 자신의 재능과 힘을 가난한 이들을 위해 바쳤다는 후일담이 뒤따라 나오지 않는다. 이들은 다만 세상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세상의 가장 높은 곳에 매달려 있던 빛나는 황금열매를 따먹은 사람들일 뿐이다. 다만 이 책에선 우리 한국인들도 유다인만한 자질이 충분하다는 것을 밝히고 있을 뿐이다. 경제개발협력기구(OECD)가 실시한 ‘학업성취도 국제비교’에서 선진국 40개국 가운데 한국 고교 1학년생들이 문제해결능력에서 단연 1등을 차지할 정도라는 것이다. 여기서 강조하는 것은 ‘다중지능’ 가운데 강점을 개발하여 각 분야에서 영재가 되라는 것이다.

이 책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필자의 소원은 성공하는 것’이란다. 그러나 명확하게 그가 말하는 ‘성공’이란 무엇인지 밝히지도 않는다. 성공하는 게 소원이지만 무엇이 성공인지 모른다면 자신의 성공을 무엇으로 가늠할 수 있다는 말인가? 모호하다. 아마도 차동엽 신부는 그 애매한 지점을 즐기는 것 같다. 아님 명백하게 말하지 않음으로써 어떠한 질문공세에도 피해 갈 수 있는 여지를 마련해 두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를 테면 이러하다.

“필자의 소원은 성공하는 것이다. 필자는 성공을 원한다. 성공이란 무엇일까? 필자는 부, 명예, 권력 이런 것들이 ‘성공’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지 않다. 이런 것들은 나름대로 성공의 요건이 된다. 하지만 진정한 성공이라고 말하고 싶지도 않다. 진정한 성공이란 그 이상의 것이어야 한다.”

“그렇다고 필자가 명예와 권력을 좇아 다니는 것은 아니다. 정직하게 말하자면, 이런 것들이 싫지는 않다. 하지만 필자는 결코 이런 것들을 추구하지 않는다. 필자는 무엇보다 ‘의미’를 추구한다. 의미 있는 일이면 혼신을 쏟아서 실행한다. 필자에게 의미가 빈약한 명예와 권력은 전혀 매력이 없다. 오히려 죄책감만 주기 때문에 피한다.”

16쪽과 17쪽에 나란히 배치되어 있는 이 말들은 비슷한 내용과 문장구조를 갖고 있다. 두 문장을 통합하면 이런 말이 된다. “나는 성공하고 싶다. 성공이란 부, 명예, 권력을 포함하지만 그 이상의 것이다. 부와 권력과 명예 자체에 머물면 죄책감을 느끼게 하지만 여기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면 부와 권력과 명예는 진정한 성공으로 가는 요건이 된다.” 쉽게 말해서 부와 명예와 권력을 갖고 싶다는 것이고, 그것으로 의미있는 일을 하고 싶다는 말이겠다. 그러나 보라! 어설픈 것이 아니라 정말 대단한 부와 권력과 명예를 움켜잡기 위해서는 주변에 있는 얼마나 많은 것들이 희생을 감수해야 하는가?

그가 부자가 되는 동안에 가난한 이들은 얼마나 많은 시간을 굶주림에 시달려야 하는가? 그들은 그가 부자가 될 때까지 참을 도리 밖에 없으며, 그 고통을 견딘 뒤에라도 참아낸 보람이 있을지 의심스럽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부는 곧 권력이고, 그에게 세상은 명예를 준다. 초기교회의 암브로시오와 요한 크리소스토모와 같은 교부들은 세상에 정당한 부는 없다고 가르쳐 왔다. 하느님 앞에서 의로운 부자는 없다. 그가 지금 부유한 것은 그가 여유로운 재산을 가난한 이들과 나누지 않았기 때문이며, 나누지 않은 것은 그의 탐욕 때문이며, 탐욕은 곧 죄라고 가르쳤던 것이다. 예수는 복음서 안에서 마몬(재물의 인격적 표현)과 하느님을 더불어 섬길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 재물도 취하고 명예도 취하고 권력도 누리면서 동시에 하느님 안에서 의미도 챙기려는 것처럼 더 큰 욕심이 있을까?

생애에서 무지개의 빛깔을 아름답고 우아하게 취하려면 물론 돈이 있어야 하고, 권력도 조금, 이름값도 좀 해야 할 것이다. 세상의 존경과 물질적 풍요를 누리면서 하느님께 인정까지 받는다면 더 바랄 나위가 없을 것이다. 함정은 항상 그러한 핑크빛 미래 안에 있다. 장기려 선생이 권력과 재산을 탐했다는 흔적이 없다. 그분이 명예를 날리기 위해 그런 일을 했다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그분은 다만 가난한 이들에 대한 연민과 사랑 때문에 한국의 슈바이처라고 불린다. 슈바이처 박사는 아프리카의 가난한 흑인들을 위하여 자기 재능을 아낌없이 나누었다. 파이프 오르간 연주자였던 그는 유럽에서 공연하여 번 돈을 아프리카 흑인들에게 나누었다. 말이나 머리(뇌)나 수완으로 성공을 꾀하는 자가 아니었다. 그는 결코 돈과 명예와 권력을 가진 바보가 아니었다. 그들은 그저 ‘참사람’이 되고자 열망하였을 뿐이다.

<somewhere, over the rainbow>란 노래가 있다. 무지개를 넘어 어딘가에 우리가 꿈꾸던 세상이 있겠지, 생각해 보게 하는 노래다. 이 노래를 부른 애슬린 데비슨(Aselin Debison)은 열 살 때 고향인 캐나다의 글래이스 베이에서 광부들이 시위를 할 때 노래를 해달라는 부탁을 받고 처음으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고 한다. 광부들의 고난과 희망을 담아서 어린 소녀가 무지개를 넘어가자고 말하는 것이다.

저기 어딘가에, 무지개 너머에, 저 높은 곳에
자장가에 가끔 나오는 곳이 있어.
무지개 너머 저 너머 어딘가에, 파랑새는 날아다니고
네가 상상하던 꿈들이, 정말 현실로 나타나는 곳.
어느 날 나는 별에게 소원을 빌 거야.
그럼, 저 밑으로 구름이 보이는 곳에서 잠을 깨겠지.
걱정은 마치 레몬즙처럼 사라져버리고
저기 굴뚝보다 더 높은 곳에 그곳에 내가 있을 거야.
......
하늘에 있는 아름다운 무지개의 색깔들은
지나가는 사람들의 얼굴에도 있지.
친구들이 손을 흔들며 "잘 지내?"라고 인사해.
그들은 사실은 "당신을 사랑해"라고 말하는 거야.
아기들이 울고, 자라나는 것을 봐.
그들은 우리보다 더 많은걸 배우겠지.
그래서 세상이 정말 아름다워.

정작 중요한 것은 자신의 재능으로 성공하는 게 아니라, 작은 것이라도 자신의 재능을 어디에 누구를 위해 쓰려고 하느냐, 하는 것이다. 석학과 예술가와 부자가 먼저 되어야 하는 게 아니라, 먼저 참 사람이 되어 세상의 슬픔을 어루만질 준비를 하는 게 더 필요한 세상이다. 성공을 꿈꾸는 속물들에게 영합하는 게 아니라 세상의 눈에 실패로 보이는 일을 하면서도 다른 이의 위로가 되어 기뻐하는 게 소중한 시절이다. 우리가 열 살 짜리 아이 만큼 고통받는 이들에게 위로도 희망도 줄 수 없다는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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