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병우의 그림 에세이]

 

나는 셋째 딸이다.
옛날부터 ‘셋째 딸은 얼굴도 보지 않고 데려간다’는 말이 있다.
왜 그런 말이 나왔을까?

남아선호, 남존여비 사상은 동양권에서 두드러지는데
지금도 인도, 중국 등의 나라에서는
산전검사 후 여아 낙태, 출산 후 여아 살해 등이 있다고 한다.
말만 들어도 끔찍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남자들이야 그렇다 쳐도 여자들은 왜 그런 잔인한 이데올로기에 동조하는 것일까?
강퍅한 세상에서 여성들이 살아가기가 워낙 위험하기에
미리 차단하는 것일까?
그래도 그렇지, 삶을 살아보기도 전에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꺾여야 하는 딸들의 운명이라니…….
얼마나 많은 생명들이 무주고혼으로 구천을 떠돌고 있을까?

저 끔찍한 중세의 마녀사냥은
영성을 지닌 지혜로운 여자들을 처단하는 구실이었다니
남자들은 그토록 여자들이 두려웠을까?
굳이 영성을 들먹이지 않아도
남자들이 득세하는 세상에서 저질러지는 어리석은 일들을 뻔히 목도하면서도
여자들이 보는 앞에서 공개처형을 했을 터이니 누가 입이나 뻥끗하겠는가?

여전히 남녀차별은 사회 구석구석에 남아있고
우리나라도 불과 십 수 년 전만 해도 산전검사로 여아 낙태가 은밀히 횡행했는데
지금이야 딸이 더 좋다고 하는 세상이니 격세지감이다.

역사적으로 고려 시대는 물론 조선 초기까지는 재산 상속도 똑같이 한 것을 보면
남녀차별은 심하지 않았던 듯하다.
조선 중기 이후로 이어진 남아선호가 창궐한 세상에서
첫째 딸은 살림 밑천이라 위로하고
어쩔 수 없어 둘째까지는 봐준다 하더라도
셋째 딸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없어도 좋을 잉여의 존재가 아니었을까?

알게 모르게 무언으로 전해지는 그 분위기를 온몸으로 체감하며 살았을 터이니
호의적이지 않은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한 셋째 딸의 적응력은 단단히 길러졌으리라.
오죽하면 여자 형제가 여러 명인 집에서는
딸 이름에 사내 ‘남’자를 붙이는 것은 물론
심지어 끝순이, 끝녀, 딸막내, 딸고만이라고까지 지었으니
이름으로 보는 ‘여성 잔혹사’라고 할까?

결혼을 함과 동시에 녹록치 않은 낯선 타인들의 세계로 들어가야 하는 시집살이라는 것이
그래서 셋째 딸에게는 더 유리했으리라 추측해 보는 것이다.

그런데 셰익스피어의 <리어 왕>에서는 셋째 딸이 가장 효심이 지극하고
구전설화 바리데기에서도
버려진 막내딸이 파란만장한 모험 끝에 부모를 구한다.
미리 철저히 구박함으로써 그 내공을 키워줬을까?
딸은 낳을수록 진화하나?

교육에서도 남녀차별이 없었던 우리집에서
특별히 차별 받거나 그렇다고 유달리 사랑을 받은 기억도 없는데
예기치 않게 5년 터울의 고대하던 남동생이 태어나면서
어린 생각에도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나고 있음을 예감했다.
나중에 성장해서 우스갯소리로 부모님께 따져 물었더니
아들딸 차별한 적 없다고 펄쩍 뛰셨다.
그런데 지금도 약간 남아있는 우울감은
그때 갑작스런 박탈감에서 비롯됐을 거란 혐의를 떨치기 어렵다.
피해의식인가?

여기까지는 가부장제나 남성우월주의에 날선 반감을 가진
내가 실없이 해본 생각인데
연전에 어떤 모임에서 이 얘기를 우연히 꺼냈더니
그때 옆자리의 여자가 조용히 반론을 제기했다.

“저도 셋째 딸인데요.
제 생각에는 셋째 딸이 사랑을 가장 많이 받아서 그렇지 않을까 생각해요.
저는 사랑을 가장 많이 받았다고 생각하거든요.“

아무튼 유전자에까지 적응력이 새겨졌을 셋째 딸들은 위대하다.
아니, 이 땅의 딸들 모두.

너무 깊이 생각했나?
말 그대로, 셋째 딸은 얼굴도 보지 않고 데려갈 만큼 미모가 뛰어나다는 얘기인가?
우리집을 보면 그 말이 아주 틀린 말은 아닌 듯한데…….


 
 

윤병우
화가. 전공은 국문학이지만 20여 년 동안 그림을 그려 왔다. 4대강 답사를 시작으로 사회문제에 관심을 갖게 됐고, 탈핵, 송전탑, 비정규직, 정신대 할머니 등 사회적 이슈가 있는 현장을 다니며 느낀 것과 살아가면서 떠오르는 여러가지 생각을 글과 그림으로 표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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