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원의 리얼몽상] ‘더 헌트’, 토마스 빈터베르그 감독, 2012년작

▲ ‘더 헌트’, 토마스 빈터베르그 감독, 2012년작
모함은 언제고 모함 당하는 자의 것이 아니다. 하는 자의 것이다.

어떤 한 사람이 그의 시대 전체로부터 모함을 받았다 해도, 그것은 그 시대의 문제이지 그의 문제가 아닐 수 있다. 그러므로 그의 잘못이 아니다. 다만 왜곡된 거울에 투사(投射) 당했을 뿐이다.

시대의 욕망이 바람직하지 못한 방식으로 분출되는 일종의 ‘사냥감’으로 찍힌 이상, 뾰족한 탈출구는 없다. 발버둥치면 칠수록 올무에 걸린 짐승마냥 피투성이가 돼간다. 그렇다고 입을 다물면, 모함에 순식간에 잡아먹힌다. 흔히 ‘진실 규명’이 대안 혹은 유일한 해결책인 양 모색되곤 하지만, 이 또한 뜬구름 잡기처럼 허망하기 일쑤다. 모함의 최초 유포자 그리고 동조자들에게 ‘사실 여부’는 관심사가 아니다. 놀랍게도 애초부터 진실 따위에는 관심 없었다는 것이야말로 뜻밖의 진실인지 모른다. 정당화를 위한 집단의 거센 요구는 비이성적일수록 집요해진다.

비뚤어진 귀, 부풀려지는 입

영화 ‘더 헌트(The Hunt)’는 모함 받은 자의 이야기다. 흔하고 오랜 이야기다. 어쩌면 그 어떤 집단도 벗어나기 힘든 맹목의 함정에 관한 이야기다. 그래서 결국 우리의 이야기다. 소름끼치도록 사실적인.

주인공 루카스(매즈 미켈슨 분)는 성실한 소시민이다. 열심히 살았다. 아내와 이혼하고 고향에 내려온 뒤 지금은 혼자 지내지만, 아들을 데려와 함께 살 희망을 품고 있다. 서로 호감을 느끼는 여인도 있다. 직업은 유치원 교사다. 정말로 아이들과 지내는 시간을 좋아한다. 아이들과 보내는 시간 자체가 곧 그의 삶이다. 직업과 사람이 하나로 붙어 있다. 학생들을 대하는 그를 보면, 아들이 어렸을 때 어떤 아빠였을지, 아들을 얼마나 아낄지가 느껴진다. 루카스는 단연 인기 좋은 선생님이다. 유치원 아이들은 놀 때나 배울 때나 루카스 선생님의 팔과 허리에 종일 매달려 지낸다. 그의 큰 키와 듬직한 어깨는 아이들 속에서 더 우람해 보인다. 루카스 선생님은 아이들에겐 그야말로 최고의 그네이자 철봉인 셈이었다.

그런데 친구의 딸인 클라라가 어느 날 사소한 거짓말을 내뱉으면서 일은 걷잡을 수 없게 된다. 유아가 충분히 지어낼 수 있는 거짓말이었다. 다소 악의가 담겨 있긴 했지만, 아이들은 종종 상상이나 들은 것을 현실과 구분하지 못한다는 걸 아이 키우는 사람들은 알고 있다. 상식적으로는 그렇다는 뜻이다. 아이는 그게 무엇을 뜻하는지조차 모르면서 하는 말이었다. 그게 성적(性的)으로 해석됐을 때 불러올 엄청난 파국 따위는 알 리 없었다. 며칠 전에 본 오빠들의 낙서와 최근 조금 늘어난 어휘력과 불안감, 이것저것이 뒤죽박죽된 유아어 수준이었다. 아이는 그냥 아이였다. 특별히 사악하거나 특별히 착하지도 않았다.

문제는 그 말을 전해들은 어른들의 반응이었다. 아이의 말에 살을 붙이고 뼈대를 만들어 ‘구체화’시켰다. 원장 선생님과 아동심리 전문가의 상담을 거친 후, 클라라의 ‘말장난’은 움직일 수 없는 가공할 범죄행위로 재탄생된다. 루카스는 남자 선생님이라는 이유만으로 이 덫에 꼼짝없이 걸린다.

사실이면 죽어봐, 아님 말고!

유치원 남자 선생님이 자칫 받을 수 있는 통속적 의심이 아이의 사소한 거짓말과 결합되자, 사태는 기다렸다는 듯이 파국의 시나리오를 써내려간다. 신기할 정도로 너무나 척척 진행된다. 일말의 제동도 걸리지 않는다. 한 사람이 유아 성추행범이 되는 일에, 아무도 반론이나 상식적인 질문조차 하지 않는다. 그냥 마을 사람들 전부가 기다렸다는 듯 받아들인다. 마치 자기들 모두가 동시에 목격이라도 한 듯 단정 짓는다.

 

유치원 원장은 “애들은 거짓말 안 해요”라는 맹신으로 무장돼 있고, 이런 일이라면 아주 익숙하다는 듯 우아하고 완곡하게 “아이와 어른 사이에 금지된 일이 일어났어요” 식의 ‘교양’ 있는 멘트로 학부모들을 선동한다. 실은 남자와 여자, 성, 인간에 대한 원장의 혐오감이 ‘어린이는 천사’라는 망상을 부추겼다는 의구심마저 드는 대목이었다.

그러나 사태는 이상하게 흐른다. 누군가 걸려들자 갑자기 활력을 띠는 저 마을 전체의 묘한 생기, 루카스를 박대하고 파괴하기 위해 온 마을 전체가 합심한 듯한 광기, 모두가 루카스의 피를 원하는 듯한 침묵의 협박.

사건의 전말 따위에는 아무도 관심 없다. ‘범행 장소’로 지목된 지하실 자체가, 루카스의 집에는 없었다. 루카스가 지하실이 없는 집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이웃과 친구들은 너무도 잘 알면서도, 모두 모른 체했다. 경찰 조사 결과로 밝혀진 루카스의 ‘혐의 없음’ 또한, 결국 아무것도 뒤집지 못했다. 루카스는 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 마을에서 살 수 없었다. 처음에는 혐의를 받았다는 사실 때문에, 지금은 마을의 정당화를 위해서, 그는 없어져 줘야 했다. 애초부터 ‘진실’ 따위가 중요한 게 아니었던 셈이다.

‘이야기’는 실현되었다. 아니, 이야기가 사람들의 근질거리는 입을 적중시켰던 것일까. 모함의 스토리가 던진 파문과 혼돈은 이 마을을 통째로 점령했다. 결과적으로는 ‘예상’대로 됐다.

사냥은 오늘도 계속된다

그러나 파괴된 것은 단지 ‘이야기’가 아니다. 한 사람의 인생이었다. 그의 소중한 가족이었다. 그가 그토록 온 힘을 다해 지키고자 했던 가치였다. 그를 알던 모든 사람들의 인간성이었다. 모함이 앗아간 것은 공동체의 꿈이었다. 믿음이었다.

자극적일수록, 솔깃한 내용일수록 모함은 사람들을 끌어들인다. 성적 뉘앙스까지 풍긴다면 말할 나위도 없다. 익명성을 바탕으로 한 정보의 홍수 사회에서는 더더욱 모함이 기생하기 쉽다. 내가 보았다고 해서 정말 본 것이 아닐 수 있다. 내가 들었다고 해서 정말 들은 게 아닐 수 있다. 다수가 믿는다고 해서 정말인 것은 아니다. 모함은 어떻게 태어나서 증식하고 마침내 죽지 않는 불사신이 되는가? 누가 모함에 살과 피를 불어넣고, 마침내 이 불신 지옥의 어두운 영화를 독식하는가?

토마스 빈터베르그 감독은 영화 ‘더 헌트’를 통해 경고한다. 한번 사냥감이 된 사람을 집단은 쉽게 놓아주지 않는다. 그가 행복하게 웃으며 살도록 내버려두면 집단이 저지른 과오가 과오로 남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사냥’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김원 (로사)
문학과 연극을 공부했고 여러 매체에 문화 칼럼을 썼거나 쓰고 있다. 어쩌다 문화평론가가 되어 극예술에 대한 글을 쓰며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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