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 칼럼 - 문양효숙]

우연히 누리꾼들의 댓글을 보았다. 밀양 송전탑 공사가 재개된 지 3일째 되는 날이었고, 칠순을 훌쩍 넘긴 밀양 주민들은 똥물을 붓고 옷을 벗으며 극렬히 저항했다. 이에 관한 포털사이트 기사 아래에 달려 있는 댓글인즉 이랬다.

“어느 공사현장을 가도 민원의 이유는 결국은 돈입니다.” (ID ‘에**’)
“할매요~보상 받으면 농성 풀 거 맞잖아요~? 그럼 돈 보고 하는 거 맞네요 그쵸?” (ID ‘스시**’)

“전자파 때문에 못살겠다면 전기 다 없애고 등불로 살자 이런 운동은 없나?” (ID ‘좋은**’)
“그래..내 땅엔 안 되지 남의 땅엔 되도..” (ID ‘Uto**’)
“전국에 송전탑 없는 곳이 어딨냐? 울 동네도 뒷산으로 쭉 지나갔지만 다 살아 있다. 밀양 만 사람인 것처럼 날뛰냐? 환경단체 니들은 정체가 뭐냐? 송전탑에 까치집은 뭔데? 전기 니들은 쓰지 마라.” (ID ‘op**’)
“일단 한번 일정기간 그 동네 전기를 끊어버리고 생활하게 한 다음 적절한 협상을 하는 것은 어떨까?” (ID ‘덜렁**’)

“그럼 08년 촛불집회는 돈 때문에 한 거 였습니까? 그걸 종북주의자들의 폭동으로 규정한 새누리당 찍으셨죠?” (ID ‘코**’)
“어르신들은 이유 없이 반대하는 것일 게다. 박근혜를 이유 없이 찍듯이” (ID ‘다크**’)
“뭐 어떻게 하든지 다음 선거 때 빨갱이 얘기 나오면 모두 새누리당 찍을 거잖아. 송전탑 건설해서 모두 암 걸려 죽는 게 국익에 도움 되겠다.” (ID ‘냥이**’)
“밀양 주민분들 참 이상하시네. 평소 하시던 것처럼, 평소의 신념대로 행동하셔야죠. 나랏님께 대드는 건 평소의 신념에 크게 어긋난 행동 아닌가요? 데모라뇨? 데모는 빨갱이들의 전유물인데 왜 그딴 짓을 하시고 난리세요. 우리가 남인가요???” (ID ‘가리**’)

한창 문제가 되고 있는 일베 사이트의 글도 아니고, 특별히 자극적인 메시지를 고른 것도 아니다. 이 댓글은 읽는 이들이 공감을 표현하는 ‘좋아요’가 많이 눌러진, 그러니까 추천 순위 상위에 올라있는 글들이다. 익명성에 기대어, 차마 얼굴을 맞대고는 하지 못하는 내면의 거친 무언가를 토악질해 놓은 것일지도 모를 인터넷 댓글을 읽으며, 나는 등골을 스치는 서늘한 기운을 느꼈다. 여든 노인들이 헬기에 실려 나가는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밀양 현장이 떠올랐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그 댓글들 너머에 있는 검은 눈동자들 가운데에서 나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작년 12월 대선이 끝난 뒤, 보수 정당 후보에 대해 90%에 육박하는 맹목적 지지율을 보인 TK 지역을 보며 나는 아주 잠시나마 ‘고생 좀 해봐야 아시지’ 하고 생각했다. 순간적으로 들었던 그 마음 안에는 답답함을 넘어 원망과 미움마저 뒤섞였었다. 어떤 연민도 끼어들 틈이 없었다.

밀양 어르신들을 영원히 새누리당을 선택할 ‘박근혜 종교의 맹목적 추종자’로 규정한 목소리 속에서 나는 그날 내 안에 일었던 원망을 읽었다. 싸늘한 분노 속에는 “우리의 희망을 짓밟은 당신들, 어디 한번 당해봐”라는 복수심의 담겨 있었다.

“그들은 어차피 더 많은 보상을 원하는 지역 이기주의자들”이라는 비난에서 “인간은 돈의 노예, 모든 투쟁의 근본은 어차피 자기 이득일 뿐”이라는 냉소를 읽었다. 언젠가 한번쯤은 맛보았을 좌절이 아니던가. 사람에 대한 희망을 포기했던, 자신의 이익을 향하던 이들을 보며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가슴으로는 절망했던, ‘사람은 역시 그런 존재’라며 씁쓸해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 “대통령 선거가 끝나고 절망의 기운과 함께 칼바람이 몰아쳤던 지난 1월, 밀양 어르신들은 부산 영도, 울산, 평택 등 전국의 투쟁 현장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고공농성을 벌이는 송전탑 위 노동자들에게 주름진 손을 흔들며 ‘우리도 죽지 않을 테니, 당신들도 살아 달라’고 뜨거운 목소리로 외쳤다.” 사진은 지난 2월 밀양 송전탑 건설에 반대하며 서울 삼성동 한국전력 본사 앞에서 시작된 밀양 주민들의 단식 농성에 동참하고 있는 사람들 ⓒ문양효숙 기자

증오와 분노는 어디에서 오는가

기대하는 바가 엇나갔을 때, 그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을 때, 우리는 분노한다. “인간이, 세상이 어떻게 저럴 수 있는가?”

분노는 대상을 찾고, 그것은 대부분 안이 아닌 밖에서 찾아진다. 문제가 있는 것은 그다. 나를 분노하게 만드는 그의 탓이다. 그의 무지함과 부족함 탓이다. 이 모든 책임은 그에게 있다. 분노의 대상은 열등하고 나는 우월하다. 나는 그들과는 다르다. 차마 있는 그대로를 정면으로 받아들일 수 없을 때, 분노의 대상을 찾는 것은 때로 스스로를 위로하거나 방어하는 방법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분노의 화살은 부메랑처럼 되돌아온다. 그를 치는 줄로만 알았던 증오는 언젠가 결국 스스로를 친다. 자신의 욕구를 분출하듯 뱉어낸 이 한마디의 댓글에 담긴 증오와 냉소도 언젠가는 고스란히 자기 삶의 몫으로 돌아올 것이다. 인정하기 싫지만, 나를 분노하게 했던 그것이 실은 내 안에도 똬리 틀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어떤 경우에도 함께할 수 없는 구제불능의 경계 밖 인간들’이라는 성급한 결론, 사람에 대한 절망과 냉소, 성장과 발전을 위해 개인의 소소한 일상이 파괴되는 것쯤은 어쩔 수 없다는 자본주의에 물든 삶의 방식. 이런 것들은 이미 나에게도 내재화되어 있다. 구조화된 사회악에 대해 분노할 때조차, 그 사회악의 내용은 ‘나’라는 총체적 존재를 구성하는 그 무엇 중 하나일 것이다. ‘나’는 꿈틀거리는 이 거대한 사회의 세포 하나로 생명을 이어 왔으니 말이다.

민주주의에서 마음의 역할을 강조하는 미국의 교육지도자 파커 J. 파머는 그의 책 <비통한 자들을 위한 정치학>(글항아리, 2012)에서 정치에서 감정을 무시하는 이들은 “감정을 조작함으로 얻어내는 영향력에 대해 정직하지 않거나,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자세하게 들여다보지 않은 사람”이라고 단언한다. 그는 “감정에 호소하는 것은 지성에 호소하는 것을 항상 능가할 뿐 아니라, 깊이 간직하고 있는 신념과 충돌하는 사실을 제시하면 사람들은 신념을 바꾸기보다 그 신념을 강화할 가능성이 크다”고 설명한다.

증오와 복수심은 투과할 수 없는 두껍고 단단한 벽이 되어 수많은 진실을 왜곡하고 은폐한다.증오의 힘은 강력하다. 증오로는 새로운 길을 열 수 없다. 사람도, 민주주의도.

과연 ‘다른 길’은 가능할까? 돌이켜볼 때, 성장과 변화의 때는 늘 벼랑 끝에 몰린 듯한 막다른 길에서, 고통과 아픔을 수반하여 왔다. 무언가를 열망했다가 실패했을 때, 사랑했던 이를 떠나보냈을 때, 가치 있게 여겼던 것들을 잃었을 때, 무너지고 부서져 흔적도 남지 않은 것만 같았던 페허에서 삶은 예상치도 못한 꽃을 피웠다. 오랜 시간 증오와 냉소로 황폐해진 이 땅과 우리의 가슴은 지금 다른 선택을 연습할 기회를 얻었는지 모른다. 우리는 이 황무지에서 다른 길을 열 수 있다. 증오는 우리의 종착점이 아니다.

분노하지 않기 위하여… “우리의 적은 그들이 아니다”

마음의 습관을 어떻게 바꿀까. 오랜 시간 살아온 환경에 의해 형성된 증오를 어떻게 내려놓을 수 있을까. 토머스 머튼은 쉽지 않은 길을 제안한다.

“‘이것’은 힘이 아니라 진실을 위한 것이다. 이것은 곧바로 정치적 결과를 얻는데 목적이 있지 않고, 근본적이고 결정적으로 중대한 진실을 드러내는 데 목적이 있다. 이것은 ‘우리 승리하리라’라고 말하기보다 ‘오늘은 주님의 날, 우리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든 그분은 승리하리라’라고 말한다.” (로버트 인초스티, <토마스 머턴의 씨앗> 생활성서사, 2005)

머튼은 ‘이것’의 목적은 단지 이기거나, 자신이 옳고 적이 틀렸다는 것을 증명하거나, 적을 굴복시켜서 요구하는 것을 얻어내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이것’은 진리를 향해, 무엇보다 인간을 위한 투신이라고 말한다. 그는 악을 적 안에서 찾기를 멈추고, 자신과 이웃 안에서 ‘무가치함’을 발견한다 해도, 사랑하기로 결정하는 엄청난 책임도 감수하라고 말한다. 그가 말하는 ‘이것’은 비폭력이다.

그는 참된 비폭력은 눈에 띄는 사회적 악에 협조하지 않을 뿐 아니라, “비양심의 세력이 은연중에 제공하는 이익과 특권까지 포기하는 것”이라 강조한다. 또한 진실에 다가가기 위해 “상대방으로부터 (그것이 적일지라도) 기꺼이 배우고자 해야 한다”며 “상대방이 완전히 비인간적이고 잘못됐으며 잔인하지 않다는 사실을 기꺼이 인정할 수 있는가, 새로운 사실이 상대방을 통해 우리에게 알려진다면,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는가” 묻는다.

그런 길을 정말 걸을 수 있을까

머튼의 글을 썼다 지웠다 여러 번 반복했다. 쓰면서 ‘이게 길이다’라고 생각했고, 지우면서 ‘갈 수 없는 길이다’라고 생각했다. 윤창중 전 대변인의 성추행 사건이 불거졌을 때, “저 사람도 참 불쌍하다”는 스승님의 말씀에 “자기가 잘못한 것도 모르는 저런 인간을 애써 불쌍히 여기고 싶지 않다”며 발끈했던 나다. 수많은 현장에서 매맞고 쫓겨나는 사람들을 보며 권력과 자본을 휘두르는 이들에게 ‘저런 용서할 수 없는 사회악들’이라 분노하는 나다. 어디 그뿐일까. 가까운 가족과 친구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사소한 일에도 “대체 어떻게 저럴 수가 있지?”하며 쉽게 판단하는 나다. 하루하루가 전쟁터인 세상에서 비폭력이라니, ‘참 맘 편한 소리’라고 여겼던 나다.

몇 번이나 쓰고 지우고를 반복하다 마침표를 찍었다. 이게, 길이다. 당신에게 길일지는 모르겠다. 이것만이 정답이라 강요할 생각도 없다. 하물며 내가 걸어갈 수 있는 길인지도 잘 모르겠다. 단지 지금 내게 보이는 좁고 희미한 길은 여기다. 갈 수 있는지 없는지 아는 방법은 오로지 ‘가보는 것’ 밖에 없으니 일단 한 발자국만 내딛고 싶다.

대통령 선거가 끝나고 절망의 기운과 함께 칼바람이 몰아쳤던 지난 1월, 밀양 어르신들은 부산 영도, 울산, 평택 등 전국의 투쟁 현장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고공농성을 벌이는 송전탑 위 노동자들에게 주름진 손을 흔들며 “우리도 죽지 않을 테니, 당신들도 살아 달라”고 뜨거운 목소리로 외쳤다. 또 대선 이후 어르신들은 피켓에 이런 문구를 새겼다.

“대통령이 누구든, 바람이 어떻게 불든, 우리는 우리의 길을 간다.”

그분들의 길은 사람 너머에 있다. 지팡이를 짚고 산을 오르며, 공사를 막기 위해 똥물을 붓고 포클레인 밑에 드러눕는 어르신들의 길은, 분노와 증오 너머에 있다. 겉으로는 사람 대 사람의 대결처럼 보일지 몰라도, “이놈들아 날 죽여라” 하며 욕을 하고 몸싸움을 해대도, 밥 때가 되면 용역들에게도 “밥 먹었냐”고 물으시던 그분들의 적은 분명 사람이 아니다.

나는 무엇보다 내 안의 한 부분이기도 한 어두움과 화해하고 싶다. 그러니 결국에는 스스로에게 돌아올 증오와 복수심 대신, ‘진리’의 부름에 응답하며 그저 가야할 길을 가는 것이 어떨까. 하여 길을 막아서는 바위가 있다면 때론 멈춰 서기도 하고, 때론 힘을 합쳐 굴리기도 하면서 말이다. 그럴 수 있다면, 그저 한 발자국만 가보고 싶다.


문양효숙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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