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댓말로 읽는 헌법 - 1]

차진태(모세) 씨의 ‘존댓말로 읽는 헌법’ 연재를 시작합니다. 중학교 3학년 여동생에게 보내는 열여덟 통의 편지 형식으로 이뤄진 글입니다. 현재 대학원생으로 구속노동자후원회 자문위원, 서울대 법과대학 대학원자치회 대표를 맡고 있는 차진태 씨는 ‘공부’라는 이름으로 ‘학대’당하는 청소년들의 헌법적 구제 가능성을 고찰하고, ‘헌법 해석의 민주화’를 시도하기 위해 이 글을 썼습니다. ‘존댓말로 읽는 헌법’은 지난해 출판사 ‘퍼플’에서 책으로 펴낸 바 있습니다. ―편집자

슬이에게

슬아, 오빠야.

어느덧 네가 중학교 3학년이 되었구나. 오빠가 태어난 것이 1984년이었고, 네가 태어난 것이 1997년이었으니까, 오빠가 지금 네 나이 때에는 네가 세 살이었단다. 그래서 네가 그때의 내 나이가 되었다는 사실이 때로 참 신기해. 오빠는 그때의 기억들이 어제 일처럼 뚜렷하거든.

너는 잘 기억이 나지 않겠지만, 너는 우리 가족의 큰 기쁨이었어. 당시 TV에서는 “보라돌이, 뚜비, 나나, 뽀”가 등장하는 ‘텔레토비’라는 프로그램이 유행이었는데, 그 중에도 “뽀~”를 네가 아주 좋아했었지. 그래서 오빠는 ‘텔레토비’를 보고 곧잘 흉내를 내곤 했었어.

특히 오빠가 고등학교 3학년 때, 오빠에게 너는 정말 특별한 존재였단다. 오빠는 고등학교 입시, 대학교 입시, 군대를 거쳤는데, “만일 시간을 돌려야 한다면, 군대는 다시 가도 고3은 다시 못 간다”고 할 정도로 당시엔 힘들었었어. 뭐가 그렇게 힘들었냐고? 물론 공부가 힘들었지. 하지만 양심적으로 동의하기 어려운 입시 경쟁 속에서 ‘승자’가 되기 위해 뛰고 있는 스스로를 긍정하기도 참 힘들었던 것 같아.

오빠가 수능 시험을 쳤던 해에도, 오빠가 다닌 바로 옆 학교에서 어떤 학생이 성적을 비관하여 자살을 했었단다. 과연, 오빠가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서, 꼭 그런 비인간적이고 끔찍한 경쟁을 해야만 했던 걸까? 하지만, 이 경쟁에 동의하지 못하면서도 오빠가 그것을 참고 치러낸 건, 대학에 가고 나서 많은 일들을 하고 싶었기 때문이었어. 대학에 들어가고 나면 많은 일들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고. 무슨 일들을 하고 싶었냐고?

오빠는 대학교들을 평준화시키고, 입시 제도를 없애 버리고, 그래서 학벌을 없애 버리고 싶었어. 나아가서 노동자, 농민에게 그 노동에 걸맞은 정당한 대가가 돌아가는 세상, 나아가 사람들이 생활고로 인해서 자꾸 자살하지 않는 세상을 만드는 데 기여하고 싶었어. 그런 세상이 ‘옳은’ 세상이라고 생각했어. 고등학교라는 ‘굴레’만 벗어난다면, 그런 세상을 만드는 데 기여를 하면서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어.

그런데 왜 서울법대를 갔냐고? 재수없게.

그러게.

솔직히 말하면, 수능 시험을 잘 본 거지, 뭐. 오빠는 중학교 때부터 열심히 공부했고, ‘내가 이렇게 공부를 잘 하는 사람이다’라는 걸 보여주고 싶은 마음도 컸어. 하지만 그것 때문만은 아니었단다.

무언가를 갖고 있으면, 그러니까, ‘학벌의 정점’에 오르면, 그것을 ‘무기’로 삼을 수 있을 거라고 오빠는 생각했어. 경쟁에서 비껴 나가고 나서 학벌을 없애자고 하는 것보다, ‘서울대생’이 그런 주장을 하는 것이 조금 더 설득력이 있을 것도 같았고. 하지만 고교 시절 오빠의 친구였던 박고형준은 2002년 수학능력시험 당일에 광주시 교육청 앞에서 ‘일렬 줄 세우기 수능 거부’ 일인 시위를 했었지. 오빠는 그 친구를 존경해. 무기를 갖춘 뒤 전장으로 나가려던 오빠보다, 당장 그 자리에서 할 일을 한 그 친구가 어쩌면 더 현명했는지도 모르거든.

지금의 네 생활이 그것을 증명하는 것이 아닐까. 어느덧 오빠도 대학을 졸업했고, 너는 중학교 3학년이 되었지. 그런데 너의 삶을 보니, 그때의 오빠의 삶에 비해, 객관적인 상황이 그다지 달라 보이지 않네. 이것은 오빠에겐 조금 충격적인 일이야. 나아가 화가 나는 일이기도 하고. 어떻게 한국 사회는, 이렇게 청소년들을 괴롭히는 짓을 수십 년째 계속 하고 있는 거지? 학벌 체제 속에서, 오늘날 한국 사회가 공교육과 사교육 시장을 종합적으로 확장시켜 나가는 과정을 보면 받아들이기 어렵고, 고통스럽단다. 세상에 도대체 똑바로 살고 있는 어른들이 얼마나 될까?

그래서 ‘청소년기’를 갓 지나온 선배로서, 동료로서, 오빠가 경험했던 것들을 이야기해 주고 싶어. 대학에 들어가 오빠가 하고 싶었던 것은 드러나지 않거나 숨겨진 ‘진실’을 공부하고, 알리고, 불합리한 것들을 바꾸는 것이었어. 그래서 법학을 공부했고, 너에게는 오빠가 공부하고 있는 ‘법학’ 중에도 ‘헌법’을 가지고 이야기해주고 싶어. 오빠가 지금까지 공부하고 경험한 바로는, 어른들은 확실히 거짓말을 많이 해. 오빠는 ‘헌법’에 비추어, 어른들이 어떤 거짓말을 하고 있고 그러한 거짓말로 너와 너의 친구들이 당연히 ‘갖고 있어야 할’ 권리들을 어떻게 빼앗는지에 대해 너와 너의 친구들이 바로 알게 되기를 바라. 그래야 너와 너의 친구들의 인생이 더 진실 되고, 더 풍요로워질 테니까.

그럼, 이제 시작해 볼게. 한번 들어 주겠니?


너의 삶이 좀 더 평화로워지기를 바라며
오빠


차진태 (모세)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하고 동 대학원 재학 중이며, 구속노동자후원회 자문위원, 서울대 법과대학 대학원자치회 대표를 맡고 있다. 고등학교 때부터 사회참여 동아리(안양고 NGO-E) 활동을 하며 청소년인권운동에 눈을 뜨기 시작했고, 이후 대한민국 청소년의회 부의장,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학생회장 활동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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