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당에서 마주친 교회 - 김마이]

ⓒ박홍기
처음에는 발음도 낯설었지만 수백 번 반복하다 보니 자연스레 익숙해진 독일의 한 한적한 작은 동네 이름. 그 이름과 성당을 검색해 보니 하나가 뜬다. 성 마테우스 성당. 독일에 온 이후에도 주일마다 미사 참례를 하려고 노력하는 나는 거리가 먼 한인성당에 가기 어려운 경우 이 동네 성당에 간다. “시간이 없어서 성당을 못 갔다”라는 말을 무색하게 할 정도로 집에서 가까운 곳에 있는 이 성당은, 하루도 거르지 않고 온 동네에 은은한 종소리를 퍼뜨리며 도로 위의 행인과 자동차들에게 그 존재를 무의식적으로 일깨워 주고 있다.

이 동네에서 천주교 신자를 만나 보지 못한 터라 성당에 대해서는 오로지 인터넷 사이트에 있는 정보에 의지해야 했는데, 독일어가 아직 서툰 탓에 내용을 잘못 파악하여 굳게 닫혀 있는 애꿎은 성당 문만 툭툭 치다 온 적도 있었다. 동양인은 나 혼자 밖에 없을 것 같아 가기를 망설이다가 그래도 ‘시작이 반이다’라는 생각으로 다시 시간을 확인하고 성당에 가 문을 열어 봤다. 오래된 나무문이 끼익 소리를 내면서 열린다. 외부에 비해 훨씬 아름답고 정교하게 만들어진 내부는 스테인드글라스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빛을 받으며 밝음과 어두움의 절묘한 조화를 드러내고 있었다. 작은 동네라고 해도 하느님의 성전인 교회만큼은 온 심혈을 기울여 지었음을 느낀다.

이미 자리를 맡아 앉아 있는 독일 신자들 중의 대부분은 중년이거나 연세 많은 노인 분들. 빈자리에 살포시 앉으니 옆에 지팡이를 짚고 오신 독일 할머니께서 내게 미소를 보내신다. 그 미소가 공기를 타고 내 입가에 내려 앉아 나도 배시시 웃어본다. 미사는 온통 잘 알아들을 수 없는 독일어로 진행되었지만, 한국어 미사를 떠올리며 그래도 순조롭게 미사에 참례할 수 있었다. 그런데 평화의 인사를 나눌 때는 고개를 숙여 인사하는 한국과 달리 악수를 청하는 이들의 방식에 순간 당황하여 손도 고개도 모두 흔드는 우스운 상황을 만들기도 했다.

작은 동네에 동양인이 미사를 참례하러 오는 경우가 드문지, 약간 놀라워하고 신기해하면서도 요란스런 궁금증은 묻어 두고 이내 침착하게 여느 독일 신자와 똑같이 대하는 그들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나의 독일어 수준을 알지 못해도 미사에 나를 동참시키고 싶은 할머니는 당신의 독일 성가 책을 내 쪽으로 보여 주시며 함께 부르기를 눈빛으로 청했다. 우리 한국 성가보다 고전적이고 그레고리안 성가 색깔이 한층 더 배어 있는듯한 그날의 성가는 유럽 가톨릭의 신비한 세계로 나를 초대하는 듯 했다. 신부님의 강론 중에 몇 마디라도 알아들으면 마치 그것이 그날 강론의 요점인 양 강렬하게 마음에 새겨졌다.

동양인은 나 혼자였지만, 우려했던 이질감이 크게 요동치지 않았던 건 왜일까? 그건 아마도 언어만 다를 뿐 세계 공통인 미사 전례 안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찾는 우리네 심정은 누구나 매한가지여서가 아닐까 싶다.

나이 많은 신자들로 가득 찬 독일 성당
맨 앞줄에 어린이들 앉히고 교리 퀴즈 내는 신부님

언어가 달라도 하느님 안에서는 같은 마음인 사람들로 채워진 이 독일 동네 성당이 나는 마음에 들기 시작했다. 그래서 토요일 미사를 종종 참례하러 가는데, 시간이 지나고 보니 한국과 크게 다른 점이 눈에 들어왔다. 거의 장년층으로만 채워진 성당에는 발랄한 생동감을 주는 아이들이 별로 없어 보인다. 듣기만 했던 유럽의 천주교 신자 감소의 현실을 이 작은 동에 성당에서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었던 것. 한국에서 다녔던 본당만 해도 어린이들과 청년들로 북적거리며 활기가 넘쳤는데, 이곳은 장엄하고 차분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반면, 새싹이 자라는 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다.

우리보다 역사가 훨씬 깊은 독일 천주교의 전통이 흔들리고 있는 것은 어떤 연유에서건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독일에 있는 수도원들이 하나둘씩 문을 닫는 이유도 성소자가 극히 부족해서라는데, 이는 그 근본 바탕이 되어 주는 신자 수의 부족과도 연결해서 생각해 볼 수 있겠다. 그래서인지 독일 동네 성당은 한국 성당에 비해 생기가 없어 보이다. 독일에서 사목하시는 본당 신부님들도 가장 고민스러운 문제 중 하나일 것 같다.

이 동네 성당도 유럽 천주교의 큰 흐름에서 예외가 아니었던 것. 하지만 이 본당은 크게 우려하지 않아도 될 듯싶다. 본당 주임신부님이 이 흐름에 대항해 어떤 방향을 잡고 나아가야 할지 알고 계시는 현명한 분이기 때문이다. 흰 머리에 콧수염까지 하얀 유쾌한 이 신부님은 매 미사 때마다 넘치는 에너지를 보여주시는데, 어느 미사든 신부님께서 가장 중점을 두는 건 바로 ‘어린이’다. 그래서인지 어린이 미사, 청년 미사가 아니더라도 미사를 아이들의 눈높이에서 진행하시는데, 낯설고 어려워 보이는 종교를 좀 더 쉽고 즐겁게 마음에 정착하게끔 도와주려는 신부님의 숨은 뜻이 있는 듯하다. 이것은 또한 외국인인 나에게 독일 성당과 미사에 더 친근해질 수 있는 디딤돌 역할을 해 주기도 한다.

신부님은 매 미사 때마다 어린이들을 맨 앞에 앉히는데, 제대뿐만 아니라 신부님과의 관계의 거리도 조금씩 좁히려는 노력인 것 같다. 신부님은 이에 그치지 않고 미사가 끝날 무렵에 어린이들에게 전례에 맞춰 아이들이 배우고 알아맞힐 수 있을 만한 교리 질문을 하시는데, 손을 번쩍 들며 참여하려는 적극적인 아이들이 의외로 많아서 놀랐다. 보통은 틀릴까봐 답을 알아도 손을 들지 않는 경우가 많은데, 아이들은 답의 옳고 그름을 떠나서 신부님과의 이 ‘Q&A’ 시간을 즐기고 있는 모습이었다. 권위적인 허물을 벗고, 옆집 할아버지처럼 편하게 아이들에게 다가가려고 한 신부님의 기분 좋은 열정이 상상되며 파노라마처럼 내 머릿속을 스쳐지나간다. 아이들이 질문에 답하려고 손을 들면 한 아이를 지목하여 그 아이를 꼭 제대 옆 마이크 앞까지 나오게 하신다. 이것은 그야말로 아이가 성당에서 작지만 중요한 존재임을 일깨우며 자존감을 높이게 하려는, 동시에 아이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모두가 경청할 수 있게 하려는 일석이조의 탁월한 방법인 듯싶다.

신부님은 또한 아이들 스스로가 주체가 되어 성당 내 활동을 했을 때는 항상 다음 미사 때 어린이들을 모두 제대 위에 올라오게 하여 일일이 호명하며 활동에 대한 칭찬과 격려를 아끼지 않으신다. 사춘기에 들어선 몇몇 청소년들은 제대 앞에 서 있기를 부끄러워하는 것 같기도 하지만, 이러한 자리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아하니, 아이들을 향한 신부님의 사랑과 노력이, 화려하고 신기한 것들로 가득하여 외적인 즐거움으로만 유혹하려는 요즘 세상에, 자신의 내면을 조금씩 들여다보려는 아이들의 기특함으로 그 열매를 조금씩 피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지난 성주간이 시작되는 주일에 또 찾아간 동네 성당. 집에서 손수 만들어 온 종려나무가지 묶음을 손에 들고 있는 신자들이 여기저기 보인다. 맨 앞줄에 앉아 있는 아이들은 종려나무가지에 알록달록 긴 색종이를 예쁘게 달아 흔들고 있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좋아서 만들었을 것 같은 오색 종려나무자기 묶음. 미사 중 종려나무를 흔들 때 앞줄의 아이들은 태극기를 힘차게 날리듯 종려나무를 신나게 흔든다.

미사 끝나기 전 신부님께서 종종 하시는 말씀, “아이들만 성당에 보내지 말고, 부모님도 꼭 함께 오십시오. 그래야 천주교의 진정한 뿌리가 내려집니다.” 맞는 말이다. 어느 한 층에만 밀집되어 있지 않고, 모든 세대가 조화를 이루는 신앙생활이 훗날 아이들이 다음 세대에 자연스럽게 전해 줄 귀한 선물이 될 것이다. 독일의 이 작은 동네 성당 신부님의 아이들에 대한 열정이 계속되는 한, 독일, 나아가 유럽 천주교의 미래는 점점 희망의 빛을 다시 발할 것이다. 이번 주 미사 때는 신부님께서 아이들에게 어떤 교리 질문을 하실지 벌써부터 궁금해진다.
 

김마이 (미카엘라)
인천교구 가좌동성당 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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