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비평 - 경동현]

갯벌 체험 유감

ⓒ경동현
지난 석가탄신일 연휴, 가족들과 1박2일 대부도 여행을 다녀왔다. 오래전부터 계획했던 여행이 아니고, 떠나기 하루 전 가기로 마음을 정하고 바람처럼 떠났던 여행이다. 저녁나절 도착했는데, 집에서 차로 한 시간도 채 걸리지 않는 거리지만 바람 부는 바닷가 풍경에 여행 기분을 느끼기에는 충분했다.

숙소에서 여유로운 하룻밤을 보내고 다음날 오전 아이들에게 좋은 추억거리를 만들어 줄 요량으로 갯벌 체험장을 방문했다. 함께 갔던 아내 친구의 가족과 함께 입장료 계산을 했는데 어른 넷에 아이 셋 입장료로 5만원을 넘겨받는다. “갯벌을 관리하는 것도 아닐 텐데 뭐가 이리 비쌀까?” 속으로만 생각하고 이왕 온 거 즐겁게 지내다 가자는 생각으로 갯벌로 들어갔다. 갯벌에서 조개잡이를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입장료를 비싸다 싶게 정한 이유를 바로 알 수 있었다.

우선 갯벌 체험을 신청한 사람들은 트랙터로 체험장까지 이동해야 한다. 걸어가도 충분한 거리인데 뭐하러 탈까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어르신과 아이들을 생각해 패스. 30여 명 정도 탈 수 있는 트랙터 2대가 대략 5~6번 정도 신청자를 실어 나르고, 정해진 갯벌에서 약 400명 가량이 안내자의 간단한 설명과 함께 조개잡이를 시작했다. 그런데 상상했던 갯벌의 모습과는 달리 죽은 조개껍질이 지천으로 널려 있고, 살아있는 조개는 보물찾기하듯 어쩌다 나오는 수준이었다.

바닷물이 빠져나간 갯벌의 모습을 상상해 보면 뽀글거리며 기포를 뿜어내고 앙증맞게 기어 다니는 게, 깊은 구멍을 내어 들어앉아 휴식을 취하는 낙지들, 그리고 꿈틀거림이 역동적인 갯지렁이, 다소곳한 조개들이 떠오른다. 이 모든 생명체들의 보금자리가 바로 갯벌인데 매일같이 몇 백 명의 체험 신청자들의 발에 짓밟힌 대부도 갯벌은 보물찾기하듯 나오는 조개 외에는 아무것도 살지 못하는 뻘밭이었다. 갯벌 체험을 위해 어린 조개를 사다가 갯벌에 뿌린다는 충격적인 이야기는 체험을 끝내고 나오는 길에 만난 마을 주민에게 직접 들었다.

체험, 생태여행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갯벌을 찾는 사람들이 부쩍 늘기도 했고, 이를 상품화한 각종 체험 마을, 생태 마을의 등장은 소중히 보전해야 할 자연을 돈벌이 상품으로 변신시키면서 사람들의 욕망을 부추기는 모양새가 되어가고 있다. 이번에 경험한 죽은 갯벌 체험은 지난해 중학교 아이들과 학교 캠프에 참가했던 아내가 고구마 캐기 체험을 하면서 실제 땅 속에서 자란 고구마 넝쿨을 캐는 게 아니라, 다시 땅 속에 묻어 둔 고구마를 줍는 일이었다며 씁쓸해 했던 이야기와 형식만 다를 뿐 같은 이야기인 셈이다. 아이들은 죽은 갯벌 체험도 좋아라 했지만, 다시는 해선 안 될 체험이라는 생각을 하며 돌아온 여행이다.

착취의 경제를 넘어 복음의 경제는 불가능할까?

주류 경제학은 인간이 합리적이고 이기적인 본성을 지닌 존재라는 전제로 논지를 전개한다. 가령, 시장이 자원을 배분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생각에는, 갯벌과 같은 공유자원에 소유권을 부여하고 사용료를 부과하면 가장 효율적으로 배분된다는 것과 똑같은 사고방식이 전제되어 있다. 사람들은 이기적이면서도 효율성과 합리성을 추구하니 그에 부합하는 방향으로 행동하도록 유인하면 된다는 것인데, 과연 그럴까? 때로 사람들은 이익이나 합리성을 추구하기보다는 존중이나 배려에 따라 행동하기를 선호한다.

“맞벌이 부부의 경우 직장에서 일이 늦게 끝나 유치원이 끝난 뒤에야 아이를 찾으러 가는 일이 있게 마련이다. 이럴 때는 유치원 선생님 중 한 분이 남아서 부모가 아이를 데리러 올 때까지 보살펴주어야 하는데, 선생님 입장에서는 참으로 번거롭고 피곤하며 반대로 부모 입장에서는 참으로 황송하고 미안하기 그지없는 일이다. 그래서 한 유치원이 늦게 아이를 데리러 오는 부모들에게 시간당 비용을 부과하기로 결정했다. 1시간에 1만 원이다. 이러면 정말 부득이한 경우가 아니면 늦지 않으리라는 것이 유치원의 예상이었다. 결과는 정반대로 나타났다. 그 후 부모들은 더 자주 더 많이 늦게 아이들을 데리러 오게 되었다. 이전에는 선생님들에게 폐를 끼치는 게 미안해서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일찍 오려고 애썼지만, 비용을 지불하게 된 후로는 그럴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많이 늦으면 그만큼 더 지불하면 그만이니, 선생님이 힘드실까봐 미안해할 필요도, 기다리실까봐 조급해할 필요도 없어진 것이다. 이런 결과를 더 효율적이라고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시장이 사람들을 서로 덜 배려하고 덜 존중하게 만든 것만은 분명한 듯 싶다.” (조준현, <19금 경제학>, 인물과사상사, 2009)

위의 예는 부모들의 미안한 마음과 유치원 선생님의 번거롭고 피곤한 일을 돈으로 계산하기 시작하면 부모, 교사 관계는 요즘 이슈가 되는 삭막한 ‘갑을 관계’로 변한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갑을 관계가 뿌리내린 상황에서 유치원 교사는 아이를 돌봐주는 고마운 분에서 점점 보육 상품의 판매자로 인식될게 뻔하다. 이런 상황에 존중과 배려의 경제는 들어설 여지가 없다. 효율성과 합리성만 찾다보면 피해는 고스란히 아이들의 몫이 될게 분명하다.

▲ 존 러스킨, ‘나중에 온 이사람에게도’, 아인북스, 2010
그래서 성서는 ‘선한 포도밭 주인의 비유(마태 20,1-16)’를 통해 존중과 배려의 셈법이 하느님의 경제요 복음이라고 말한다. 그런 삶으로 살아가라며 신앙인을 초대하고 있다. 우리말로도 번역돼 나온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라는 책에서 영국의 사상가 존 러스킨은 경제학 최대의 변수는 사랑이라고 말한다. 바로 ‘선한 포도밭 주인의 비유’에서 영감을 받은 그는 근대 경제학이 말살한 영혼, 애정, 도덕에 기초한 이타적이고 자기 희생적인 인간적인 경제학을, 인도주의적 하느님의 경제학을 주장한다.

그렇다면 교회는 성서의 가르침대로, 존 러스킨의 주장대로 하느님의 경제학을 꾸려가고 있을까?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교회를 통해, 혹은 교회 안에서 존중과 배려를 체험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대부분의 교회 기관들은 주류 경제학의 논리에 기반한 경제적 행위들에 의존하고 있는 상황이다. 예전에는 존중과 배려의 셈법으로 다뤄지던 것이 상업적 교환의 셈법으로 대체되면서 이제는 대부분의 종교적 실천들의 필수적인 요소가 되고 있다.

자본주의 소비문화 속에서 생산과 소비라는 관행들은 교회의 영성적 실천행위들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우후죽순처럼 생겨나는 치유와 명상과 자아를 다스리는 작업들과 종교적 예식들의 밑바닥에는 상업주의 논리가 숨어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런 사례들을 들추는 일은 다른 기회에 논한바 있기에 여기서는 존중과 배려의 셈법으로 교회가 시도해 볼만한 실천들을 제안하고자 한다.

복음의 경제, 시도해 볼만한 교회의 실천들

기획재정부에 따르면 지난해 12월 1일 협동조합기본법이 시행된 이래 100일간 하루 평균 6.5건 가량 설립 신청이 있었고 신청 건수도 늘어나는 추세라고 한다. 협동조합은 조합원들이 협동해서 자신들의 경제적 발전을 추구하는 조직체다. 경제적 성장뿐 아니라, 사업을 통해 협동의 가치를 이루고자 한다는 점에서 탐욕에 기반한 주류 경제의 대안으로 논의되고 있다.

존중과 배려의 셈법으로 교회가 실천해 볼 모델로 삼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협동조합 운동을 사회화시키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해왔던 교회의 경험을 돌아 볼 때 더욱 그렇다. 하지만 눈을 교회 안으로 돌리면 가톨릭 전체를 놓고 볼 때 존중과 배려에 기반한 협동조합(법적으로 협동조합이 아니더라도) 운동의 비중은 비주류 변방에 자리한 형국이다.

병원 운영의 협동조합 전환

민간 대형병원들과 경쟁하기 위해 매진하고 있는 교회 병원들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진주의료원 사태에서 볼 수 있듯이 의료 공공성은 공공보건의료기관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나라 의료제도의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한 중심 의제다. 우리나라는 교육과 의료가 공적 시스템에 의해 관리되고 있지만, 실상은 아주 산업화되고 철저히 영리기업에 의해 주도되고 있다. 의료의 공공성은 건강보험을 남용하는 다수의 민간부문에 의해 훼손되고 있는 실정이고 교회 병원도 예외는 아니다.

공교육제도나 건강보험제도로만 공공성이 유지될 수 없다. 공공성은 제도가 아닌 운영에서 실현되어야 하고 그런 점에서 의료생협과 같은 실천들은 의료의 공공성을 회복하기 위한 주춧돌을 놓는 일이 될 수 있다. 교회의 병원 운영이 꼭 협동조합 방식이 아니라 하더라도 존중과 배려의 셈법으로 방향 전환을 할 수 있다면 사회에 큰 울림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요양시설의 협동조합 방식 운영

교회는 이미 대규모 종합병원을 운영하고 있는데 이들 병원 운영의 협동조합 전환과 별개로 요양시설의 협동조합 방식은 시도해 볼만한 사업 모델이라 판단된다. 왜냐하면 한국 사회는 이미 고령화 사회로 진입한지 오래된 탓에 수요가 점점 커질 것이기 때문이다. 어르신들의 자식들이 조합원이 될 수도 있고 자식들에게 신세지기 싫어하는 어르신이 조합원이 될 수도 있다.

요양병원 협동조합은 얼마 전 어느 일간지의 르포 취재기사를 통해 논란이 됐던 노인요양병원의 인권 침해를 구조적으로 예방할 수 있는 방안이기도 하다. 부모님들을 입원시킨 아들, 딸들이 조합원이고 주인이기 때문에 병원 운영이 어떻게 되고 있는지를 투명하게 파악할 수 있어 안심할 수 있고 개선이 필요하면 언제든 개선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자식들은 사랑하는 부모님을 직접 집에서 모시지 않고 요양병원에 모시는 것에서 느낄 수 있는 마음의 부담을 다소 줄일 수 있다. 그 병원이 자기들 손으로 만든 ‘제2의 집’이기 때문이다.

연령회와 상조 협동조합

각 종단별 봉사단체 가운데 상장례 봉사단체로는 가톨릭의 ‘연령회’가 다른 종교에 비하여 규모와 활동 면에서 가장 활발하고 크다고 할 수 있다. 관혼상제의 영역까지도 자본이 상품화하면서 우후죽순처럼 생겨난 상조회사의 상품과 연령회의 활동 범위가 상당 부분 겹치면서 상조회사의 장례지도사들과 연령회의 갈등도 종종 생겨나고 있다. ‘염’에서부터 시작해서 연령회측과 장례지도사의 갈등은 천주교의 전통 예식인 연도와 미사, 장지 등의 문제까지도 빈번하게 부딪쳐 서로간의 갈등을 키우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천주교 연령회와 상조회사 장의행사 갈등 – 봉사단체와 상조회사 누가 우선하나?>, 상조뉴스, 2009년 12월 3일자).

죽음까지도 상품화한다는 비판에 자유롭지 않은 주식회사 방식의 상조회사의 대안으로 상조협동조합도 충분히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가톨릭의 경우는 이미 충분한 상조 전문가들을 전국 차원에서 확보하고 있는 셈이니 호혜와 신뢰, 협력에 기반한 상조협동조합을 적극 고민해볼 것을 제안한다.

실버 노동자 협동조합

어르신들이 직접 일하는 실버 노동 업종에서도 협동조합이 유력하다. 이미 고령화 사회로 접어든 일본 사회에서 노동자 협동조합의 대세는 실버 노동자 협동조합이다. 고령화 사회로 진입하는 우리에게 큰 시사점을 주는 대목이다. 퇴직한 어르신들이 출자해서 만든 협동조합은 스스로에게 각종 일자리를 제공할 수 있다. 종단에서 위탁받거나 자체적으로 운영하는 복지기관 건물을 활용하여 이분들이 출자해서 만든 카페, 반찬 가게, 일자리 알선 센터 등을 운영할 수 있다.

커피 등 식음료 업종 협동조합

요즘 웬만한 교회나 성당에서 카페 찾기가 어렵지 않다. 성당 건물 구역 내에 주로 자리잡은 가톨릭과 달리 개신교의 경우는 ‘문화 목회’를 표방하며 최근 들어 교회 건물 구역과 독립적으로 운영되는 카페도 등장하고 있다. 커피 수요가 늘어나는 추세에 맞춰 교회도 지역 주민의 필요를 채워주고 동시에 선교의 수단으로 활용하려는 시도라 생각된다.

발상을 전환해서 노동자 협동조합 성격으로 ‘커피 전문점 협동조합’을 시도해 보는 건 어떨까? 교회도 30% 이내로 출자를 하고 청년 일자리 창출과 침체된 청년 모임에 활력을 넣는 수단으로 밑그림을 그려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본당별로 존재하는 유기농산물 직거래 사업단의 매장 운영을 협동조합 방식으로 전환하는 것도 적극 고민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존중과 배려에 기반한 복음의 경제를 따르는 실천들이 교회 안에서도 생겨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제안한 내용들이다. 교회 내 협동조합의 존재는 기업화되고 자본화된 교회 사업장 운영 방식보다 교회 본연의 가르침과 부합할 뿐만 아니라, 협동조합에서 일하는 노동자에게는 훨씬 나은 노동조건을 제공하고 조합원들에게는 새로운 영감을 던져 주리라 생각한다. 허나 협동조합의 존재가 곧바로 복음의 경제를 실천하는 것이라 말할 수는 없다. 그것은 농협이 있다고 해서 농민들의 삶이 나아지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복음의 경제는 구조를 바꾸는 일을 넘어, 조금 덜 벌더라도 더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다는 마음들이 모일 때 겨자씨처럼 자라나는 하느님 나라를 닮지 않았을까? 이미 사회 곳곳에 이런 겨자씨들이 싹을 틔우고 자라고 있으니, 존중과 배려의 마음들이 모인 교회 공동체가 한 손 거들고 나선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일이 될 것이다.


경동현
(안드레아)
우리신학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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