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업주의 교회에서 영성 구출하기]


얼마 전에 혜화동 대학로에 나갈 일이 생겼다. 마로니에 공원에 앉아 있으려니, 휴일이라 그런지 부모들이 아이들을 데리고 나와 여럿 놀고 있었다. 근처 소극장에서 <오즈의 마법사> 등의 공연을 관람하고 나온 사람들도 있었고, 노인이며 젊은이들이 수두룩하였다. 여기 오니, 참 세상엔 사람도 많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무주며 경주 같은 한산한 동네에 살다가 서울에 온지 두 해째인데, 아직도 명동과 종로와 대학로와 홍대입구가 낯설다. 이 사람들이 다 뭘 해서 먹고 살까, 궁금해 하면서도 사람이 많으면 돈 될 일도 많겠거니 생각하고 더 이상 상상을 그친다. 사실 나도 어쩜 먹이를 찾아서 이곳에 눌러 앉아 있는 게 아니던가.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 앞에서 조금 불안해하면서도 짧은 인연이라도 엮어가며 살 길을 찾고 있지 아니한가?

공원엔 비둘기가 많았다. 먹이를 던져주는 아이들과 환하게 웃어젖히며 활보하는 처자들 사이에 끼어 나무 밑 벤치에 앉았다. 비둘기들은 아이들이 던져주는 먹이를 따라 우르르 몰려다니며 생계를 돕고, 나는 한가한 사람처럼 그 녀석들의 바쁜 일상을 들여다보고 있는 것이다. 문득 언젠가 인터넷에서 발견한 그 시를 생각해 내었다. 도종환 시인의 ‘비둘기’라는 시편이다.

양식을 하늘에서 찾지 않은 지 오래 되었다
광장의 돌바닥 위에 먹이가 뿌려지면
새들은 일제히 날개를 펴고 지상으로 날아든다
사람의 손때가 묻은 먹이는 푸석푸석하고 따듯했다
벌레처럼 꿈틀거리는 긴장과 저항도 없고
씨앗을 지키는 떫고 시큼한 과육도 없는
밋밋한 먹이를 향해 전속력으로
부리를 쪼아대는 습관이 어느새 몸에 깊이 배었다
부피는 작지 않지만 허기를 메꾸기엔 부족한
지상의 양식들을 입안에 넣었다가 목이 메어
뱉어낼 수도 삼킬 수도 없는 순간들을 자주 만나곤 했다
그때마다 발갛게 언 발로 땅을 차곤 하지만
그것이 날아오르기 위한 발돋움은 아니다
오늘도 상가 옥상에 재푸른 몸을 기대고 있거나
가등 위에 앉아 하늘을 올려다보곤 하지만
날개는 오르는 일보다 쏜살같이 내려가는 비행에
길들여져 있다 하늘을 다 잊은 건 아니라고
자신에게 주문처럼 되뇌어 보지만
비대해진 몸은 지상에 던져지는 먹이를 향해
민감하게 반응한다
도시의 건물 아래쪽 허공만을 제 영토로 축소시킨 채
크고 푸른 하늘은 접어버린 비둘기
무리지어 몰려다니는 비둘기, 비둘기떼

슬프다. 비둘기의 처지가 딱하고 안쓰럽다. 비루하고 참담하다. 도시의 건물 아래쪽 허공만을 제 영토로 축소시킨 채 크고 푸른 하늘을 접어버린 비둘기 신세가 되지 않기 위해 나는 좀 더 긴장해야 한다고, 순간 생각한다. 가혹한 삶을 접어버리지 않으면서도 그 삶 안에 푸른 하늘을 분명히 심어두어야 할 것이다. 야무진 칼질로 또렷하게 내 봇짐 위에도 하늘을 새겨 넣어야 할 것이다.

그 비둘기 떼 가운데 한 마리가 유난히 눈길을 끌었다. 목에 비닐을 걸고 비닐을 끌고 다니는 녀석이다. 아마도 봉투 째 버려진 먹이를 머리 박고 부리로 뒤적이다가 손잡이 구멍에 목이 걸린 모양이다. 다른 녀석들에 비하여 수척한 그 비둘기는 아이들에게 손가락질을 당하였다. 불쌍하다. 사람들은 누가 가서 비닐을 그 놈 목에서 벗겨주기를 갈망했다. 나 역시 맘은 굴뚝같았으나, 여전히 함량 미달의 길이가 짧은 동정심 때문인지 선뜻 나서지 못하였다. 혹시 녀석을 잡다가 손등을 쪼이지 않을까, 걱정했다. 시골 살 때에도 닭 한 마리 제대로 잡지 못했던 것이다. 손끝에 와 닿는 살아있는 짐승의 물컹한 육질이 뒷골을 쭈볏이 세우는 까닭이다. 자리에서 일어나 볼 일을 보러 자리를 뜨는데, 내내 앉아서 먹이를 주던 아이들은 몰려드는 비둘기를 손으로 안아 올리기까지 하였다. 아, 동심의 위대함이여. 부끄러운 어른이여. 마흔살 넘은 사내가 쪼그라든 마음으로 걸어가고 있는 것이다. 사소한 두려움보다 동정심이 더 컸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날 나의 영혼은 구원받지 못한 채 자리를 옮겼다.

우리는 도무지 제 상처에 소금 뿌리는 일은 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당연하다, 고통은 현실적이므로. 비둘기들이 다시 하늘을 찾지 않듯이, 우리는 먹이를 놓치지 않기 위하여 시선을 땅 아래로 고정한다. 어려운 시절을 건너가려면 내 한 몸이라도 잘 건사해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 시절을 넘어서면 무엇이 기다리고 있으리란 기대도 없으면서, 당장의 작은 행복에 몰두하는 게 사람이다. 위험을 자초하지 않는 것이다. 대가가 분명하지 않은 투자는 삼가 해야 한다고 믿는 것이다. 내가 교회 안에 남아 있는 것도 대체로 그편이 안전하다고 믿는 탓인지도 모른다. 아니 그편이 익숙하기 때문일 것이다. 십자가는 사순절에 맡겨두고, 부활의 잔치에만 끼어들어 제 몫을 챙겨가려는 심산일지도 모른다.

우리에게 메시야가 필요하다면, 강력한 방패와 같은 존재일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하늘을 새카맣게 덮으며 고난의 화살이 날아오더라도 그 날개아래 숨어서 보신(保身)하고, 그분이 창공을 날아갈 때 덤으로 천상으로 묻어가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러하니 그분은 군주이며, 영광의 하느님이며, 세상을 향해 호령하실 분이어야 한다. 나의 성공을 축성해 주고, 내 앞에서 고난을 말끔히 치워주신다. 원수를 섬멸하시고 나를 부유케 하며, 내 행복의 보증이 되신다. 그러나 이렇게 믿는 자에게 정작 하느님은 “나를 너를 알지 못한다!” 하고 말씀하실까,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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