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사는 이야기 - 백동흠]

토요일 아침에 배낭 하나씩 짊어지고 아내와 함께 산나무 그늘 드리워진 목조 다리를 건넜다. 다리 아래로 짙은 옥색 강물이 유유히 흘렀다. 다리 중간에 서서 강줄기 위쪽을 바라보니 안개 덜 걷힌 모습이 한 폭의 수묵화였다. 한 발자국씩 천천히 화폭 속으로 들어가다 보니 생각도 느낌도 차분히 가라앉았다. 그저 앞만 보고 오르막길을 넘어 내리막길로 한 시간쯤 걸었다. 한 주일 동안 얽히고 맺힌 응어리가 땀으로 뚝뚝 떨어졌다.

햇살이 비치면서 안개가 걷히자 흑백의 수묵화가 알록달록 풍경화로 바뀌었다. 산길 사이사이에 노랗게 물든 나뭇잎들이 손짓을 했다. 개구쟁이 가을 햇살이 산길 나뭇가지랑 그림자놀이를 하고 있었다. 등산로를 비켜 오가는 키위 부부들이 그림자를 밟고 뛰었다. 한여름 햇살에 검게 그을린 얼굴이 펄럭이는 단풍이었다. 산길 위 고개에서 멀리 바라보이는 동네가 바다를 껴안고 있었다. 평화 물결이 넘실거렸다. 물 빠진 바닷가 모래 위를 말 두 마리가 사이좋게 걷고 있었다. 산책 나선 부부인지 친구인지 천천히 얘기 나누며 걷다가 마을 어귀로 들어갔다.

한참을 걷다 보니 억새풀 춤추는 들판길이 나왔다. 간간이 불어오는 산들바람이 땀으로 얼룩진 이마를 스치고 지나갔다. 곧이어 시야가 확 트인 바닷가 길이 펼쳐졌다. 수백 마리의 갈매기과 새들이 종친회라도 하는지 떼를 지어 모래밭에 앉아들 있었다. 제자리를 지키고 있는 산이나 바다는 움직이는 사람과 새들에게 맘껏 놀다 가라고 편하게 자리를 내줬다. 언제든지 생각나면 또 오라고 묵묵히 자리를 지키면서도 아무런 말이 없었다. 이렇게 토요일이면 부담 없이 발길 향하는 트램핑 코스가 주말의 쉼터였다.

ⓒ백동흠

두 시간을 걸으니 목적지 쉼터가 나왔다. 바닷가 절벽 아래에 나무 그늘이 기다리고 있었다. 샌드위치와 음료수를 꺼내 드는데 딸아이 생각이 났다. 불과 한 달 전만 해도 함께 걸으며 이 자리서 점심을 먹으며 담소를 나눴던 녀석이 훌쩍 고국에 일을 잡아 날아가 버렸다. 이젠 아내와 둘이 됐다. 아들 녀석은 몇 년 전에 고국으로 가 직장을 잡더니 짝을 만나 둥지를 틀었다. 연로하신 부모님은 전주에 계시고, 젊은 아이들은 서울에 자리잡고, 그 중간 대를 사는 아내와 난 오클랜드에 머무니 다들 사는 위치가 달라졌다.

함께 일하는 또래 50대 후반 동료들 중에도 비슷한 경우를 여럿 보였다. 아이들 초등학교 때 뉴질랜드로 이민 와서 아이들이 학업을 마치니 저마다의 꿈을 찾아 떠나갔다. 호주로, 고국으로, 영국으로, 일본으로……. 우리가 부모님 곁을 떠나 뉴질랜드로 왔듯이 아이들도 독립이라는 날개를 펴고 꿈과 가능성을 찾아 자유로이 떠나들 갔다. 이렇게 이민 사회의 현 주소가 바뀌었다.

아내에게 삶은 달걀 껍질을 벗겨 건네주며 싱겁게 중얼거렸다. “인생이란 게 뭔지…….” 아내가 달걀을 한입 베어먹다가 말없이 웃었다. 그러다 대수롭지 않게 한마디 던졌다. “삶은 달걀이잖아.” 어미 닭이 알을 낳고, 알이 부화되어 병아리가 나오고, 병아리가 어미 닭이 되고, 그리고 알을 낳고…….

가던 길을 되돌아 내려오다 보니 이 등산길도 우리 인생 코스를 닮았다. 올라가면 내려와야 하고 갔으면 되돌아오고……. 돌아오다 바닷가 큰 소나무에 매달린 그네를 탔다. 딸아이를 태워 태평양 바다를 향해 힘껏 밀어주던 그네에 아내를 태우니 멀리 밀지 말라고 손사래를 쳤다.

네 시간의 트램핑을 마치고 다시 산 입구 다리를 건넜다. 아내가 다리 아래 흐르는 강물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한마디 했다. “우리 함께 한 결혼 생활도 저 강물처럼 흘러 왔네.” 그러고 보니까 내일모레면, 그렇게 흐른 세월도 30년이 다 돼 간다. 숱하게 오르락내리락했던 희망과 의욕과 기대들이 내려 놓여졌다.

산을 내려와 북쪽에 새로 들어선 한국 음식점에 들렀다. 주인이 편안하고 음식이 맛깔스럽고 고향 맛이어서 또 찾았다. 땀을 식혀가며 얼큰한 순두부찌개를 한 그릇 뚝딱 비워냈다. 호호 불며 천천히 음식을 먹고 있는 아내를 지긋이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아들딸, 며늘아기 다섯이서 함께 식사한지가 2년이 다 돼갔다. 부모님이나 아이들이나 한 식탁에서 음식 함께 먹는다는 것! 그건 복이다. 큰 복이다. 그것도 맛있게 드시는 부모님 얼굴 뵈는 것은……. 아이들이야 말해 더 무엇 하겠는가.

집에 돌아와 등산 장비를 씻어 닦아 놓고 샤워를 하니 또 한 세상이 기다렸다. 마음에 작은 바람이 일었다. 어찌 다 함께할 수 있을까. 비록 떠나 있어도 자식들 잘 살면 됐지 싶어 더 욕심내면 안 될 것 같이 여겨졌다. 내려놓는 부모 마음이었다.

고향 전주에 계신 팔순 아버지, 어머니께 아내가 전화를 드렸다. 한참을 이야기한 뒤 아내가 아버지 전화를 내게 바꿔주었다. 아직도 몸이 불편하신지 목소리가 낮은 톤이었다. 아버지 특유의 목소리였다. “나다.” 이러저러한 안부를 묻고 나니 으레 하시는 말투로 아버지께서 말씀을 맺으셨다. “너희들 잘 있으면 됐다. 우리는 괜찮다.”

서울에 있는 며늘아기한테서 마침 전화가 왔다. 여러 안부를 주고받고 나니 며느리가 아들을 바꿔주었다. 아직은 젊어서인지 팔팔한 목소리로 기운이 넘쳐났다. 아들의 개성 있는 목소리였다. “저예요!” 집안일과 생활 이야기를 한참이나 주고받았다. 전화를 끊기 전 마무리 말이 여느 때처럼 내 입에서도 흘러나왔다. “너희들 잘 있으면 됐어. 우리는 괜찮아.”
 

백동흠 (프란치스코)
뉴질랜드에서 택시 기사로 일하며 틈틈이 글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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