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은의 신학 오디세이아]

내가 가르치는 수업 중에 가장 커다란 의미로 남는 수업이 ‘생의 철학’ 수업이다. 이 수업은 한 학기동안 자기 삶을 돌아보고, 각자에게 의문이 되거나 도전이 되는 주제를 하나 정해서, 우리가 공부하는 철학 사상들에 접목하면서, 각자 답을 찾아가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그리고 가능한 한 수업 중 이런저런 묵상도 하고, 날씨가 너무 좋은 날은 15분쯤 침묵하며 캠퍼스를 걷다 들어오기도 한다.

숙제도 되도록 많이 내주지 않는다. 대신 주말에 꼭 인생을 즐기라고 당부한다. 더구나 이 수업의 과제물은 문법이 엉망이어도 괜찮고, 생각이 정리되지 않아도 괜찮다. 이 수업에서 내가 학생들에게 하는 주문이 있다면, 모든 과제물에 혼을 담으라는 것이다. 학생들이 장난스레 “수녀님이 내가 혼을 담았는지 아세요?” 하고 물으면, 나는 진지하게 대답한다.

“혼이 담긴 페이퍼를 읽을 때는 울림이 있어. 카페 같은 데서 너희들의 페이퍼를 읽다가 엉엉 운 적도 많아. 너희가 혼을 담으면, 문법이 틀려도, 생각이 엉성해도, 너희들은 멋진 철학자가 돼. 삶의 철학은 마음을 울리는 법이거든.”

내가 매 학기마다 가슴 두근거리며 이 수업에 들어가는 이유는, 거기서 숨겨진 보물 같은 생의 철학들이 엉성한 모습으로 나를 기다리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내가 철학 수업에서 A 학점을 받을 줄은 정말 몰랐다”고 이야기하는데, 내가 볼 때 소크라테스나 플라톤으로 시작하는 철학은 어려울지 몰라도, 자신의 체험에서 시작하는 철학은 어려운 작업이 아니라 의미를 찾아내는 진심을 가지면 누구나 잘 할 수 있는 쉬운 작업이고, 그것이 해석학의 핵심인 것 같다. 나는 학생들한테 모든 철학자의 내용을 알 필요는 없다고 이야기한다. 다만, 내가 이해할 수 있는 부분만을 이해하고 그 이해한 부분을 깊이 생각하라고 이야기한다. 다시 말해 철학은 깊이 사고하는 것이지 이것저것을 섭렵해서 암기하는 작업이 절대 아닌 것이다.

이 수업이 끝나는 날, 학생들은 한 학기동안 자기가 고민한 문제의 답 혹은 또 다른 질문들을 발표하고, 각자 생의 철학을 상징하는 심벌(symbol)을 가져온다. 우리는 서로의 철학을 음미하고 자축하며 수업을 마무리한다. 지난주에도 나는 엄청난 감동을 받으면서, 한 명 한 명 학생들과 포옹하며 이 수업을 마쳤다. 점수를 매기기도 참 쉽다. 물론 겨우 마친 학생들도 있지만, 한 학기 동안 자신의 문제에 충실한 학생들에게는 여지없이 A가 돌아갔다.

죽음이란 무엇일까? 성공이란 무엇인가?
학생들과 묻고 답하며

우리 학교가 있는 오클랜드(Oakland)는 폭력과 가난 문제가 심각하다. 그렇다고 오클랜드가 다 그렇다고 하기에는 문제가 있다. 오클랜드의 잘 사는 구역을 보면 정말 부유하고 평화롭다. 그러나 흑인, 히스패닉, 그리고 여러 이민자들이 모여 살고 있는 다운타운은 총싸움이 끊이지 않고, 마약 문제가 심각하다. 사회의식이 그 어느 곳보다 발전되어서 흑인인권운동 블랙팬더(Black Panther)의 고장이기도 하다.

내가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학생들의 인생의 질문 중에 가장 공통된 것 중 하나가 폭력과 죽음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처음 이 수업을 개설했을 때, 나는 학생들이 죽음에 관심을 갖는 것이 단순히 철학적 · 관념적 관심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들의 삶의 이야기를 적은 과제를 읽다가, 갑자기 하굣길에 함께 가던 친구가 총에 맞아 죽는 광경을 목격했다든지, 파티에 간 친구가 살해되었다든지, 갱에 연루된 가까운 친척이 여러 명 죽는다는지 하는 경험들은 학생들에게 도대체 죽음은 무엇이며,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묻게 하고 있음을 알게 됐다. 사회의 구조가 철학적 질문을 구성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폭력과 가난 속에서 자란 학생들, 대부분은 흑인인 학생들이 답을 찾는 철학은 놀랍게도 불교 철학이다. 내가 화계사의 꽁꽁 얼은 연못 위에서 스케이트를 타며, 스님들과 뜻 모를 이야기를 하며 자랐다고 하면, 나의 학생들은 무슨 옛날이야기에 나오는 이야기인 듯 흥미를 보인다. 그러나 가난과 어두운 환경에서 자란 그들에게 인생은 고해(苦海)이며, 고통은 삶이 영원하지 않고 늘 변하기 때문이라는 부처의 가르침이 커다란 위안을 주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불교의 명상을 가르쳐 달라고도 하고, 다른 책을 가르쳐 달라고 하기도 한다.

또 한 가지 학생들이 가장 자주 던지는 질문이 ‘성공이란 무엇인가’다. 미국은 성공 신화를 신봉하는 나라이고, 어려운 환경에도 불구하고 대학에 온 나의 학생들은 성공해야 한다는 생각이 너무 강해 강박적이다. 그래서 그들은 성공이 무엇인지 묻는 것이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성공의 의미를 깊이 새기지는 못하고, 대신 성공해야 한다는 데 대한 자신들의 두려움과 부담을 인식하는 정도인데, 가끔 진정한 성공에 대한 철학을 찾아내는 학생들도 있다.

이런 학생들에게 다가오는 이는 공자다. 가부장적인 유교 제도가 중국보다 훨씬 강한 한국의 여성인 나에게 공자님은 결코 매력적인 철학자는 못 되는데, 그분의 매력을 발견하게 도와준 것이 내 학생들이다. 나는 고백하건데, 처음 유교를 가르칠 때부터 아주 삐뚤어져 있었다. “그는 가정을 가장 잘 꾸려야 한다고 하면서 자신은 가정을 내팽개쳤다”, 뭐 이런 식으로 나의 모든 발언은 비판적이었고 심드렁했다.

그런데 학생들의 페이퍼에는 첩의 자식으로 태어나, 어머니와 살면서 혼자 학습하고 성공한 공자의 인생이 커다란 영감을 준다고 쓰여 있었다. 어떤 학생은 “선비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이다”라는 공자의 말을 평생 기억하겠다고도 적었다. 내가 못 본 공자님의 철학을 나는 내 학생들의 눈으로 다시 배울 수 있었다.

이제 점수도 다 매기고, 어제 졸업식을 했으니, 한 해의 학사 일정이 모두 끝났다. 입학해서부터 졸업할 때 까지, 나로서는 최선을 다해 아껴 주었던 학생이 인사 한 마디 없이 떠나가기도 하고,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학생이 너무 고마웠다며 자신의 할머니와 함께 사무실을 찾아와 초콜릿을 건네고 떠나기도 하고, 그렇게 학생들은 각자의 대학 생활을 마무리하며 떠나간다. 섭섭하기도 하고, 또 걱정스럽기도 하고, 또 한편 자랑스럽기도 하다.

학교는 이제 조용하다. 여름이 지나고 어느새 가을이 시작되려 하면, 새로운 학생들이 꿈을 안고 학교를 찾을 것이다. 지금 내가 하는 일은 어디서든 자신의 철학을 가지고 떳떳하고 행복한 삶을 살아가라고 기도하는 일이다.
 

 
박정은 수녀 (소피아)
홀리 네임즈 수녀회. 1990년대 후반부터 미국에서 연구하며, 이방인이자 경계인으로 살아가는 자기 정체성에 대한 물음을 신학적으로 해석하고자 시도했고, 지구화된 세상에서의 '이주' 문제, 동양 종교의 몸 수행에 관한 책을 써 왔다. 현재는 캘리포니아 소재 홀리 네임즈 대학의 영성학 교수이며, '여성의 원'이라는 피정도 지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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