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은 오늘을 말한다 - 6]

성령 강림 대축일을 교회는 기념한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제자들에게 당신의 교회를 맡기시며 승천하셨다. 그것으로 끝난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분이 가신 하늘만 쳐다보는 제자들의 심정을 헤아릴 수 있겠다. 함께 밥을 먹고, 함께 여행을 하고, 함께 아픈 사람을 고치고, 함께 사람들을 가르칠 때, 그때에는 모든 일(구원과 해방)이 이루어질 것만 같았을 것이다. 제자들뿐 아니라 갈릴래아에서부터 동행한 가난한 보통의 식민지 백성들은 모두 같은 마음이었을 것이다. 때로는 죽은 사람마저 살리고, 허기진 수천 명을 먹이는 일까지 일어났으니, 새로운 역사가 펼쳐질 것이라 희망하고 믿을 법도 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예수님이 이제 그들 눈에서 사라진 것이다. 그분이 사라진 하늘만 자꾸 바라본다.

흘러간 시간을 재구성해보자. 예수님의 출생, 어린 시절, 공생활,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과 승천, 이 모든 일을 입에서 입으로 전하다 글로 만들어 편집한 것, 그리고 어느 골수 유다인 바오로가 남긴 편지들을 한 데 모아 엮은 것을 우리는 성경이라고 한다. 27편의 성경 가운데 가장 앞선 것은 바오로의 서간으로서 50년대 중반으로 그 집필 시기를 추정하고, 가장 나중의 것은 요한 복음으로 90년대 중후반 경으로 추정한다. 예수님의 죽음의 시기를 30년대 중반으로 잡으면, 빨리는 20여 년의 시간, 늦게는 60여 년의 세월이 흐른 다음에 이 성경이 형성되었다.

그동안 하늘만 하염없이 바라보던 제자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성령 강림’이었다. 성령은 스승의 죽음에 두려움을 느껴 문을 닫아걸고 있던 제자들로 하여금 스승에게 일어난 일을 목숨을 걸고 전하는 ‘어리석고 불경한’ 일을 하도록 재촉하였다. 죽음도 이를 막을 수 없었으니, 마침내 베드로도 바오로도 스테파노도 예수님의 길을 걸었다. 그 이후에도 여전히 성령께서는 우리(교회)로 하여금 이 세상 한복판에서 예수님께서 하셨던 그 일을 계속하도록 이끄신다. 그 옛날 제자들처럼.

‘적당한’ 섬김은 받아야 한다는 태연함이 문제다

스승 예수님께서 하셨던 일이란 무엇일까? 성경이 이를 전하고 있지만, 세월이 훌쩍 지나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65)는 이를 다음과 같이 전한다. “교회는 결코 현세적 야심에서 움직이지 않는다. 교회는 오로지 하나의 목적을 추구한다. 곧 성령의 인도로 바로 그리스도께서 하시던 일을 계속하려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진리를 증언하러 오셨으며, 심판하시기보다는 구원하시고 섬김을 받으시기보다는 섬기러 오셨다.” (<사목헌장>, 3항)

‘현세적 야심’과 ‘성령의 인도로 그리스도께서 하시던 일’은 대구(對句)를 이룬다. ‘현세적 야심’에 대해서는 부가 설명이 없으나, ‘성령의 인도로 그리스도께서 하시던 일’은 다음과 같다. 진리를 증언하는 일, 심판하기보다는 구원하는 일, 섬김을 받기보다는 섬기는 일이다. 물론 이 모든 일은 바로 성령의 인도로 이루어져야 한다.

여기서 몇 가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현세적 야심으로 진리를 내세우는 일, 현세적 야심으로 심판하는 일, 현세적 야심으로 섬김을 받는 일을 추정할 수 있다. 물론 ‘현세적 야심’ 때문이라고 대놓고 하지는 않을 터이다.

교회가 역사의 여정에서 그랬던 적이 있었을까? 하나이고 거룩하며, 보편되고 사도로부터 이어온 ‘하느님 백성’으로서의 교회, ‘그리스도의 신비체’로서의 교회는 그랬을 리가 없겠지만, 제도로서의 교회, 죄인을 품에 안은 지상 교회, 그리고 지역교회를 생각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교회는 ‘현세적 야심’ 때문에 움직였던 적이 있다. 공의회가 “교회는 끊임없이 참회와 쇄신을 추구한다”(<교회헌장> 8항)고 고백한 이유다.

좀 더 구체적으로, 예수님께서 증언하신 진리, 예수님께서 실현하신 구원,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섬김은 무엇일까? 그것을 알아내기는 어렵지 않다. 너무나 단순하고 지극히 소박하기 때문이다. 구약과 신약을 관통하는 주제는 ‘하느님께서 인류(세상)를 구원하신다’는 것이다. 무엇이 구원인지를 말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나 무엇이 구원이 아닌지는 삼척동자도 안다. 억압, 폭력과 전쟁, 극심한 빈곤, 심각한 불평등, 미움과 증오를 드러내는 비참한 현실……. 그것이 정치적 억압이든, 경제적 빈곤이든, 사회적 분열이든, 사람을 비참하게 하는 모든 일들은 결코 ‘구원’의 상태가 ‘아니다’. ‘아니오’ 할 것은 ‘아니오’ 하는 것, 그것이 진리의 전부를 다 증언하는 것은 아닐지라도, 적어도 ‘진리’의 길에서 벗어나지는 않게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섬김을 받는 것과 섬기는 것의 차이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안다. 그럼에도 한 마디만 사족을 붙인다면, 현실에서는 ‘적절한’ 질서가 필요하고, 그 질서에 따라 ‘적당히’ 섬김을 받을 필요가 있다는 태연함 때문이다. 현세 질서에서는 당연히 ‘권위’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그 권위의 출처와 성격을 혼돈하지 말아야 한다. 예수님의 권위는 하느님에게서 온 것이며, 그 하느님은 가장 미천한 자를 당신의 사랑의 대상으로 삼으셨다. 예수님의 권위는 사회제도와 질서 유지를 위해 부여된 강제의 권력이 아니라, 사람, 그것도 미천한 사람을 사람으로 대함으로써 우러나온 그 무엇이다. 예수님의 섬김은 그런 것이다. ‘권위’를 내세워 ‘섬김 받음’을 당연히 하는 것은 교회가 할 일이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하시던 일을 계속해야 하는 교회

2천 년 전 성령 강림을 기념하는 교회가 ‘성령의 인도로 그리스도께서 하시던 일’을, ‘제2의 성령 강림’을 염원했던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사목헌장>은 다음과 같이 정리하였다. 첫째, 교회, 하느님 백성, 곧 모든 그리스도인은 현세 질서, 곧 정치, 경제, 법과 제도, 문화 안에 하느님의 정의와 사랑을 스며들게 할 책임이 있다(공동선 실현의 책임). 둘째, 모든 그리스도인은 사람들이(특히 사회적 약자가) 그 존엄성을 충분히 실현할 수 있도록 헌신할 책임이 있다(인간 존엄성 실현과 연대의 책임). 셋째, 이 공동선 증진과 인간의 존엄성 실현을 위해 주님께서는 교회를 세우셨고, 당신의 성령을 보내주셨다(신앙의 실천).

세상의 모든 일, 정치도, 경제도, 문화도, 제도와 법도, 모두 인간의 존엄성과 공동선 실현,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하느님의 거룩함과 결합을 목표로 한다. 이 목표를 실현하기 위한 정치 이념(제도) 가운데 하나가 비록 불완전하지만 바로 민주주의, 공화주의이며, 우리 정치공동체(나라)도 이를 채택하고 있다. 헌법 제1조에서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고 선언한 것도 그 때문이다.

소수의 사람이 지상의 재화와 모든 분야의 기회들을 거의 모두 독차지하고 대물림하면서, 나머지 대다수 사람은 적은 몫을 두고 죽기 살기로 싸워야 하며, 이 싸움마저 대물림하는 사회, 소수의 사람이 무제한의 권리와 자유를 누리며, 대다수의 사람이 숨막힐 정도의 많은 제약 속에 겨우 목숨을 부지하는 사회는 아무리 그럴듯하게 포장하더라도 결코 민주주의 사회도, 공화주의 정치공동체도 될 수 없다.

“주님, 당신 숨을 보내시어, 온 누리의 얼굴을 새롭게 하소서.” 아멘.


박동호 신부
(안드레아)
서울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 신정동성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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