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중해 파노라마 - 16]

반원형의 해안선을 따라서 이집트 역사의 지난한 변천 과정을 적나라하게 반영하는 유적지가 산재해 있는 고도(古都) 알렉산드리아를 돌아 나와, 이집트 북동부 나일강 삼각주 끝에 위치한 항구도시 로제타((Rosetta)를 지나자, 드디어 다미에타(Damietta)에서 카이로행 기차에 올랐다.

다미에타를 출발한 기차가 알렉산드리아와 다미에타로 향하는 철도가 교차하는 지점인 탄타(Tanta)에 도착할 무렵이 되자, 기차 안에 타고 있던 대규모의 모슬렘 순례자 그룹은 서둘러 내릴 차비를 하기 시작했다. 도심을 가로지르며 구(舊)수에즈 운하와 지중해 파이프라인이 통과하는 도시 탄타는, 13세기 이슬람교 성자 아흐마드 알 바다위의 묘소와 사원이 자리하고 있어서, 아랍인들의 학문과 순례 중심지로 매우 유명한 장소다.

잠시 기차가 정차하고 있는 동안 간이매점에 들러 커피를 한잔 사들고 나오다 보니, 알렉산드리아 방향에서 달려오던 기차가 정차하면서 한 무리의 여행자들이 우르르 달려 나오며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눈앞에 붕붕 떠다니는 황사를 밀치며 얼결에 가까이 다가가보니, 바로 며칠 전 알렉산드리아의 ‘성 마르코 기념성당’에서 만난 이탈리아 순례자들이었다.

성 마르코의 순교 여정을 따라서 베니스 광장에서 출발한 이 순례자 그룹은 현재 알렉산드리아와 카이로 성당에 머리와 몸체가 각각 따로 안치된 마르코 성인의 유해(遺骸)를 찾아서 선교여행을 하고 있었다.

이집트 최대 면화 집산지인 탄타를 출발한 기차가 나일강 중류 지역인 카이로를 향해 힘차게 달려가는 동안 틈틈이 사진을 찍기 위해 객실 밖으로 나가 보니, 마른 흙먼지가 뿌옇게 이는 철길을 따라서 나일 삼각주 지역의 비옥한 농경지가 끝없이 펼쳐지고 있었다.

▲ 나일 삼각주 지역의 비옥한 농경지 ⓒ수해

서두에서 간략히 언급 하였듯이, 고대 이집트에서는 세계에서 가장 긴 강으로 알려진 나일강(총 길이 6,690㎞)이 정기적으로 범람했는데, 그것은 바로 에티오피아의 고원에서 흘러내리는 청나일과 아트바라강 때문이었다. 범람할 때마다 상류로부터 기름진 흙을 실어와 강 유역에 충적층을 쌓아올린 청나일의 퇴적물은, 질 좋은 천연비료가 되어 농경지를 기름진 옥토로 바꿔 놓는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이 검은 퇴적물을 캐미(Kemi, 검은 흙)라고 부르면서, 이를 두고 ‘하피 신의 선물’이라고 외치며 기쁨의 노래를 불렀다. 그러나 누대에 걸쳐 나일강이 범람 할 때마다 청나일강에 실려 온 기름진 천연퇴비를 바라보면서 모든 영광을 나일강의 신 ‘하피’에게 돌리며 풍년을 노래했던 이집트 농부들의 들뜬 함성은, 1971년 아스완 하이 댐이 건설된 이후로는, 더 이상 들을 수 없는 퇴색해버린 전설의 노래가 되어 영영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인공 댐이 완성된 이후로 나일강의 수위를 인위적으로 조절하기 시작하자, 해마다 아프리카 고원에서 떠내려 오는 천연퇴비와 함께 날아와 나일강의 범람을 알리며 길상(吉祥)을 예고하던 따오기 떼의 울음이 그쳐버린 강변에는, 더 이상 나일 강의 여신이 보내준 선물이라고 불리던 천연퇴비가 떠내려 오지 않는다. 현대문명의 등장과 함께 사라져버린 천연퇴비 대신, 이제는 나일 삼각주 곳곳에 트랙터를 몰고 인공비료를 뿌리는 농부들의 기계화된 모습만이 분주하게 시야에 들어오고 있었다.

나일 삼각주 중앙에 위치한 탄타를 출발한 기차는 약 1시간 30분쯤 지나자, 마침내 구슬픈 기적 소리를 울리며 카이로의 람세스역에 도착했다. 수많은 인파가 붐비는 람세스역 광장으로 걸어 나오자 잠시 망설여졌다. 성 마르코의 순교 여정을 따라서 자못 비장한 마음가짐으로 이집트를 방문하고 있는 순례자들은, 매우 진화된 의식의 소유자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러나 동행을 하기에는 무리였다.

막연히 나를 독실한 이슬람교도라고 단정해버린 가톨릭 순례자들이 건네는 과다한 질문에, 낱낱이 대답하기에는 나의 정신 상태는 너무나도 수습이 곤란한 상황에 직면해 있었다. 그야말로 플라톤이 <파이드로스>에서 ‘파르마콘(pharmakon)’이라는 단어를 통해 보여주는, 글쓰기의 어떤 ‘결정 불가능’ 상태를 뼈저리게 실감하고 있는 중이었다.

‘망각과 기억’이라는 모순된 기능을 통해 ‘독약과 치유제’의 역할을 동시에 하고 있는 글쓰기를 ‘자기 확인’의 수단으로 선택한 이상, 매순간 깨어있는 의식으로 감성과 이성을 적절한 비례로 조율해야만 한다. 그런데 동서양의 다채로운 문화가 활발하게 교차하는 이집트의 수도 카이로는, 다분히 감성적인 정서만으로 조우하기에는 너무 막막한 도시다.

특히나 십자가(콥트교)와 초승달(이슬람교)이 표방하는 거대한 양대 사상의 조류가 기묘한 불협화음을 이루며 공존하는 이 엄청난 문명의 용광로 앞에서, 올드 카이로의 초기 기독교 유적과 이슬람 지구의 중세 유적지를 순례하려면, 아무래도 좀 더 냉철한 사유구조로의 인식 전환이 필요할 것만 같았다.

한동안 이런저런 논의 끝에, 일단 사흘 후에 올드 카이로의 ‘바빌론 요새’ 앞에서 다시 만나기로 약속하고 이탈리아 순례자들과 헤어지자, 서둘러 멤피스(Memphis)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 카이로 시가지 중심부를 관통하며 지중해를 향해 유유히 흘러가는 나일강 ⓒ수해

카이로 시내를 뒤로 한 채, 허름한 승합버스에 올라 이집트의 대표적인 네크로폴리스 지역을 향해 출발한지 약 30분쯤 지나자, 우리나라 삼성전자 광고판이 좌우로 나란히 도열해 있는 긴 다리가 나타나면서, 카이로 시가지 중심부를 관통하며 삼각주 지대를 향해 유유히 흘러드는 나일강이 보였다. 뿌연 황사가 어지러이 흩어져 날리는 강변 저 멀리로, 나일강의 물살을 따라서 보일 듯 말 듯 흰 돛을 펄럭이며 한 송이 흰 백합처럼 떠다니는 펠루카를 보자, 문득 지금까지의 여정이 주마등처럼 뇌리를 스치고 지나가기 시작했다.

수단에서 페리호를 타고 이집트 최남단에 위치한 아부심벨로 들어와 내처 나일강을 따라 올라오다가, 몇 차례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사하라 사막 일대를 경유하여 최북단에 위치한 지중해의 항구도시 알렉산드리아를 지나서, 다시 나일 강과 만나는 지점에 도착하자 잠시 알 수 없는 격한 감정의 소용돌이가 일었다. 그러나 아직까지 회고풍의 감상에 젖어들기에는 갈 길이 너무나도 멀었다.

카이로에서 남쪽으로 약 25㎞ 떨어진 나일강 서안 미트 라히나(Mit Rahina) 지역에 위치한 멤피스는, 고대 이집트 왕조의 첫 번째 왕도(王都)이자 고대 이집트어로 ‘우주의 건설자’를 의미하는 창조신 프타(Ptah) 신앙의 중심지이기도 하다. 상(上)이집트와 하(下)이집트의 경계선상에 세워진 이 도시에는, 당시 이집트를 대표하던 왕궁과 멤피스의 창조신 프타를 모신 신전이 광범위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프타를 상징하는 성수(聖獸)는 황소다.

고대 이집트 초기 왕조와 고왕국 시대의 정치, 경제, 문화, 종교의 중심지였던 멤피스는, 중왕국이 시작되면서 이집트의 수도가 테베(지금의 룩소르)로 옮겨간 후에도 파라오의 대관식이 거행되는 등 정신적 왕도로서의 면목을 유감없이 발휘하였다. 그런데 13세기에 돌연히 발생한 홍수로 인해 당시의 유적은 모조리 유실되어 버렸다.

카이로를 벗어나 멤피스 유적지로 들어오는 길목에 드문드문 자리한 수공예품 가게를 둘러보고, 소떼를 몰고 가는 목동들의 피리 소리가 아득히 울러 퍼지는 대추야자나무 숲을 따라 교외로 한참 걸어가다가 보니 넝쿨장미가 우거진 담장이 나타나면서, 박물관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작은 규모의 건물이 한 채 나타났다.

바람결에 밀려오는 이름 모를 꽃향기를 맡으며 담장을 따라서 건물 안쪽으로 들어가자, 정면에 조각공원이 나타나면서 상 이집트의 상징인 흰 왕관을 쓴 높이 7m의 람세스 2세 입상(立像)과 웅크리고 앉은 한 마리 거대한 스핑크스의 뒷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 멤피스 박물관, 람세스 2세의 거상 ⓒ수해

고대에 프타 신전이 있었던 자리에 세워진 박물관 정원에는 왕도 시절의 화려했던 영화를 반영해주는 다양한 조각품들이 전시되어 있었고, 안으로 들어가 보니 박물관 내부에는 람세스 2세의 우람한 거상(巨像)이 뉘어져 있었다.

소규모의 1층 전시관 내부를 모조리 장악하고 누워있는 람세스 2세의 거상은, 2층에 별도로 마련된 난간에 올라서자 가까스로 한눈에 들어왔다. 이 거상은 기원전 3400여 년 전, 람세스 2세가 프타 신전을 확장하면서 신전 앞에 세우기 위해 조성했던 두 개의 거상 중 하나다. 거대한 석회암을 통째로 깎아서 만든 람세스 2세의 거상은 원래 길이가 15m였으나, 지금은 파손되어 12m만 남아 있으며 그 무게가 자그마치 80톤이나 된다.

이집트 역사상 가장 용맹한 정복군주로 알려진 람세스 2세는 이집트 전역에 자신의 기념물을 가장 많이 조성해 놓은 인물로도 유명하다. 그런데 한동안 2층 난간에 기대 서서 1층에 전시해놓은 람세스 2세의 얼굴을 내려다보니, 아무리 살펴보아도 전제군주(專制君主)의 흔적이라고는 그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가 없었다.

이집트 최남단 아부심벨 대신전 정면 출입구 앞에서 처음 마주친 이래로 이집트 전역에서 가장 많이 대면한 람세스 2세의 흉상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자신의 폭정을 미화시키기에 급급했던 대부분의 전제군주들이 그러하듯이, 마치 거룩한 종교적 열정으로 승화된 어느 이상적인 성자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어쩐지 보면 볼수록 약간 비릿한 역겨움의 정서를 자아내게 하는 람세스 2세의 교묘한 방법으로 위장된 미소를 뒤로하고, 멤피스와 사카라(Saqqara)의 경계지역에 있는 파피루스 전시관에서 일하는 누비아 화공을 찾아서 천천히 휘파람을 불며 걸었다.

▲ 아부심벨 대신전, 람세스 2세의 석상 ⓒ수해

항간에서는 아부심벨 대신전 내부 벽면을 장식하고 있는 ‘카데시(Kadesh) 전투’ 장면이 새겨진 부조에 근거하여, 람세스 2세와 모세의 출애굽 여정에 등장하는 ‘파라오’를 동일인물로 추정하는 견해도 있다.

기원전 13세기, 지금의 시리아와 터키 국경 인근에 자리한 카데시 지역에서 고대 오리엔트 세계의 패권을 놓고 람세스 2세와 히타이트제국이 무시로 격돌했던 카데시 전투는, 상호불가침 원칙과 기존의 양국 국경선을 인정하는 평화조약을 맺음으로써, 16년만에야 가까스로 매듭을 짓는다.

일명 ‘세계 최초의 평화조약’으로 알려진 이 ‘카데시 조약문’의 히타이트본은 현재 터키 이스탄불 고고학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고, 이집트본은 룩소르의 카르나크 신전 벽면에 매우 소상하게 기록되어 있다.

일전에 사진 촬영이 엄격히 금지된 아부심벨 대신전 내부에서, 카데시 전투 장면을 촬영할 수 있도록 은밀하게 나를 도와준 누비아 화공은, 황금 전차를 타고 활을 쏘는 람세스 2세의 모습을 가리키며 ‘모세를 괴롭혔던 악질 파라오’라고 거침없이 말했다.

구체적인 전거도 없이 신전 내부의 그림을 다분히 자의적으로 해석하며 열변을 토하던 누비아 화공의 순진한 모습을 떠올리면서, 뉘엿뉘엿 땅거미가 내리는 메마른 사막지대를 걸어가노라니, 일찍이 영국의 낭만주의 시인 퍼시 비시 셀리가 람세스 2세의 별칭을 주제로 ‘내 이름은 오지만디어스’라고 쓴 한편의 시가 천천히 뇌리를 스치며 지나갔다.

고대의 나라로부터 온 한 여행자를 만났네
그는 말했다네

몸뚱이가 없는 거대한 돌로 만든 다리가
사막에 서 있네.

그 곁에 모래 위엔,
부서진 얼굴이 반쯤 가린 채 묻혀있다네.

그 얼굴의 찡그린 표정, 주름 잡힌 입술,
싸늘한 명령의 냉소는
조각가가 왕의 정열을 읽었음이리라.

그 정열은 이 생명 없는 물체에 찍혀져
일찍이 그 정열을 비웃은 손과
그 일을 시켰던 심장보다 더 오래 살아있네.

묘지엔 이런 말이 씌어 있다네.

‘내 이름은 오지만디어스, 왕 중의 왕이로다.
나의 업적을 보라, 너희 강대한 자들아,
그리고 절망하라.’

그 외엔 아무 것도 없다네. 오로지 거대한 잔해뿐,
저 멀리 풀 한포기 없는 쓸쓸한 사막만이 열려 있다네. 


 
 

수해
기행문학가. 운문사 강원을 졸업하고, 오랫동안 세계 여러 나라의 명상사원과 문화유적지를 순례하다가, 동국대학교 대학원 철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하였다. 지은 책으로 시집 <산 두고 가는 산>과 동아시아 기행 에세이 <예정된 우연>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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