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 칼럼 - 강한]

아직도 남아 있었다. 인터넷 카페 ‘전두환 대통령을 사랑하는 모임’. 회원 수는 무려 18,400명을 넘는다. 혹시 누군가 장난으로 만든 안티 카페가 아닐까 하고 살펴보지만, 사뭇 진지하게 “전두환 대통령 각하”의 “치적”을 기리고 “명예회복”까지 주장하고 있는 진짜 팬 카페다.

몇 년 전 포털사이트에서 5.18에 관한 자료를 검색하던 나는, 5.18은 민주화운동이 아니라 북한 특수부대의 개입으로 벌어진 폭동이자 무장반란이라고 주장하는 글이 여러 편 실려 있는 이 카페까지 흘러들어갔다. 은행에서 사은품으로 나눠주는 달력에도, 십여 년 전 고등학생 시절에 보던 국정교과서에도 5.18은 ‘민주화운동’이라고 적혀 있는데, 아직도 이런 주장을 하다니…….

혀를 차면서도 한편으로는 마음이 복잡해졌다. 인간의 역사 서술이 완벽하지 않고, 세상일을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기록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또한, 너무나 많은 정보가 넘쳐흐르고, 그 중 상당수가 근거 없는 주장에 불과하거나 거짓말인 세상에 사는 우리는 남의 말을 쉽게 믿지 않는다.

이렇게 한 사건에 대한 견해와 주장들이 크게 엇갈릴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나? 공신력 있는 기관의 발표와 해석에 따라야 할까? 아니면 여러 사람의 의견을 들어보고 다수결로 결정해야 할까? TV조선, 채널A 등 종합편성채널이 5.18 북한개입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인터뷰를 그대로 내보내 떠들썩한 최근 상황에서 여전히 머릿속을 맴도는 질문이다.

▲ 요즘 같은 세상에 5.18이라는 날짜라도 기억하는 젊은이들이 있다는 게 정말 고맙다. 사진은 2012년 5.18민중항쟁 32주년 서울 행사에 참석해 희생자를 위해 묵념하고 있는 청소년들의 모습 ⓒ한수진 기자

한편 1990년 이후에 태어난 젊은이들을 생각하면, 5.18에 대한 ‘논란’을 알고라도 있으면 다행이라는 마음이다. 인문학 홀대의 결과인지, 아니면 물질적 풍요가 넘쳐나는 세상 탓인지 요즘 젊은 세대가 근현대사에 대해 놀랄 만큼 무지하고, 관심도 없다는 것은 꾸준히 제기되어온 문제다. 얼마 전 10대부터 30대 초반 젊은이들의 역사인식을 진단한 어느 언론보도에서는 “야스쿠니 신사를 아시나요?” 하는 질문에 “사람 이름 아니에요? 위인?” 하고 되묻는 사람을 볼 수 있었다.

몇 년 전 6월에는 서울 시내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대형 태극기를 펼쳐들고, 선두에 선 젊은 남자가 웃통을 벗고 달리는 장면을 연출했다. 1987년 6월 민주항쟁을 기리는 퍼포먼스였다. 내 옆에서 컴퓨터로 그 사진을 보던 젊은 여성 두 사람(그곳이 대학 캠퍼스였으니 아마도 대학생이었을)이 외쳤다. “아, 이거 했구나! 5.18!” 이들은 7년의 시차가 있는 5.18과 6.10을 구분하지 못했다. 이들에게 그 차이는 별로 중요한 게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보면, 5.18이라는 날짜라도 기억하고 있다는 게, 5.18과 6.10을 연결할 줄 안다는 게 그나마 고맙다.

10대 후반 들어 비로소 알게 된 5.18이라는 사건이 내 가슴을 뜨겁게 하던 순간을 기억한다. 1980년 5월, 열흘 동안 죽고 다친 사람들을 기억하고, 이들에게 부끄럽지 않게 살고, 이들이 바랐던 세상을 만들어 가야겠다는 다짐도 했던 것 같다.

그런데 요즘의 나는 이런 ‘기념일’들에 대해 시큰둥해졌다. 나아지는 건 없고, 오히려 점점 더 나빠지는 듯한 세상에서, 매번 마음에도 없는 소리만 반복하는 듯한 기념식이 싫어진 걸까? 끝도 없는, 수없는 그 기념일들이 정말 피곤하다고 해야 할까? (공휴일로 지정된 날이라면 정말 고마운 날이지만.)

며칠 있으면 5.18, 또 조금 있으면 6.10, 6.25가 돌아온다. 또다시 사람들은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거나 “아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날을” 하고 노래 부르며 가슴을 치겠지. TV 특집방송은 죽은 사람들의 얼굴과 살아남은 사람들의 얼굴을 번갈아 보여줄 테고. 종종 이런 모든 ‘기념’이 지겨워져서 그 따위 지난 일들일랑 다 잊고 살자고 외치고 싶을 때가 있다.

그러나 어떻게 잊겠는가? 5.18이라는 큰 그림 한 구석에 자리 잡았던 나의 아버지는 지금도 아프다. 그날의 상처를 이겨내고 씩씩하게, 늠름하게 살아오신 것처럼 보였던 그분이 겪는 아픔을 보며 나도 덩달아 앓아누울 것만 같다. 어휴, 마음을 굳게 먹고 눈을 부릅떠야지. 그리고 나의 아버지처럼 5.18 때문에 몸과 마음을 다친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고, 뭔가 작은 일이라도 해야지.

마침 다가오는 주일, 성령 강림 대축일 미사를 준비하며 <매일미사> 책을 보니 두 번째 보편 지향 기도로 제시된 것이 ‘5.18 민주화운동 희생자들을 위한 기도’다. 아마도 많은 성당에서 <매일미사>에 실린 대로 기도를 바칠 테니, 1천 개가 넘는 전국 성당에서 내 아버지 같은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는 셈이다. 그 기도문을 옮겨 적는다.

“5.18 민주화운동의 희생자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위로자이신 주님, 이 나라의 민주화를 외치다가 희생된 이들을 하느님 나라의 영원한 안식으로 이끌어 주시고, 아직도 그날의 상처로 고통 받는 이들을 위로해 주시며, 그들의 희생을 밑거름으로 저희 나라가 더욱 성숙한 민주주의를 실현하게 하소서.”


강한
(안토니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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