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알청춘일기 - 여경]

▲ 룽타의 색깔은 눈 덮인 하얀 티베트의 설산들과 절묘하게 어우러진다. ⓒ여경

이곳에는 바람이 많이 분다. 높고 광활한 만큼 자유로운 바람이다. 그리고 바람은 티베트 사람들에게 가장 좋은 친구이자 예술가이며 신실한 믿음의 동반자이다. 이곳 사람들은 바람에 의지해 그들의 아름다운 삶을 꾸려가고, 바람과 어울려 노래하고 춤추며, 바람을 통해 믿음을 더욱 깊고 넓게 한다.

언덕에 바람이 불면 색색의 룽타가 나부낀다. 바람 한 자락에 한 결 나부낄 때마다 천 위에 적힌 부처 말씀이 멀리멀리 날아간다고 믿는 사람들은 바람이 좋아하는 길목마다 룽타를 매단다.

어느 마을에서 룽타로 온통 뒤덮인 산을 보았다. 아직 색도 글자도 선명한 새 룽타들과 하얗게 낡은 룽타들이 얽히고설켜 있는 언덕은 거대한 룽타의 무덤 같았다. 끝없이 닳아가고, 또 새로 다는 시간들이 축적되어 만들어진 세월의 지층 앞에서 나는 내 짧은 과거와 미래에 대해서 생각해본다. 그 시간 속에서 느끼던 번뇌의 무게도 다시 생각해본다. 흘러가고 또 쌓여가는 고민과 결심들은 지금 어디에서 무엇이 되어 있을지.

ⓒ여경

▲ 언덕 꼭대기에서 풍마를 날리는 청년들 ⓒ여경

또 이곳에는 소원을 싣고 날아가는 작은 종이 말이 있다. 바람을 타고 달리는 말, 풍마(風馬)다. 언덕 꼭대기에서 풍마를 날리던 청년들을 보았다. 그들은 흡사 말을 몰 때처럼 소리를 지르며 풍마를 높이, 높이 공중에 흩뿌렸다. 풍마는 눈꽃처럼 반짝이며 하늘로 날아갔다. 그 위에 실린 그들의 소원은 무엇이었을까?

가장 높은 곳에 올랐을 때, 나도 풍마를 하늘에 날려보았다. 바람과 공기를 느끼다가 “호이―”하고 소리 지르며 풍마를 손에서 떠나보내는 순간은 자유로움 그 자체였다. 풍마를 날리기 전 짧게 소원을 빌어보았지만, 바람을 타고 풍마가 손을 떠나기 시작할 때는 모든 것을 잊게 된다. 소원이야 아무래도 좋았고, 나도 날아갈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에 휩싸였다. 어쩌면 풍마의 진짜 역할은 간절히 지니고 있던 소망을 싣고 날아가면서 마음 한 켠을 비우게 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하여 뻥 뚫린 가슴과 자유로움을 안겨다 주는 것 말이다.

그렇게 티베트 고원의 공기는 말씀과 소망들로 가득하다. 믿음과 간절함은 바람으로 깊어지고 넓어지고 자유로워진다.

티베트의 춤과 노래 또한 바람을 닮았다. 우연히 한 사원에서 스님들의 법무(法舞)를 보게 되었는데, 느리지만 힘 있는 춤사위가 매서우면서도 다정한 티베트의 바람 같았다. 깊고 낮은 울림을 지닌 악기들의 소리와 자줏빛 옷자락이 휘날리는 모습은 아름답고도 장엄했다. 특히 눈을 감고 원을 그리는 느린 움직임은 마치 공기와 추는 춤 같았다.

한번은 티베트 전통 음악과 무용을 전공하는 친구들을 만나서 노래를 듣는 기회가 생겼다. 티베트 친구가 불러주었던 티베트 노래의 리듬과 진동은 참 특별했다. 끝없이 펼쳐진 초원 위에 홀로 서서 멀리 있는 누군가에게, 과거의 누군가에게 안부를 전하는 것만 같았다. 높고 떨리는 소리들이 아름답고도, 또 조금은 슬프게 느껴져 눈물이 났다. 물론 노래를 들려준 티베트여인들의 목소리와 웃음과 눈빛 탓도 있을 테지만 말이다.

▲ 노래를 불러준 친구들 ⓒ여경

모든 것이 바람만 같다. 언제나 바람이 지나가는 이곳의 길 위에는 내 눈엔 보이지 않는 정류장이 있는 듯, 초원을 달리다 문득 한 노인 곁에 커다란 버스가 선다. 또 길 한가운데서 누군가가 짐을 꾸려 내린다. 떠나오고 떠나가는 것도 바람의 일이라는 것처럼.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 없고, 어디가 나의 자리인지도 알 수 없어 방황하던 시간들, 그래서 떠나왔던 여행. 여기서도 방황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지만 조금은 더 흘러가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든다. 정류장이라고 정해진 것이 없어도, 목적지가 없어도 그저 내가 믿고 기다릴 수만 있다면 언젠가 내 자리를 찾게 되지 않을까.

초원. 둘러보아도 아무것도 없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그 자리, 그 순간에도 저 멀리에서부터 무언가가 나를 향해 부지런히 달려오고 있을 것이라는 희망, 혹은 내가 도착하게 될 어떤 곳이 저 너머에 존재할 것이라는 믿음, 그리고 또 어느 언덕에서 누군가가 나와 같이 방황하고 있을 거라는 위안. 이것이 바로 티베트의 고원과 바람이 나에게 가져다 준 가장 큰 선물이다.

높고 넓고 외로운 속에서도 티베트인들이 계속 살아나갈 힘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바람 덕분일지도 모르겠다. 바람을 통해 보고 듣고 노래하면서 말이다. 그렇기에 나도 여기, 바람의 땅에서 노래 한 자락을 당신에게 보낸다.

“착한 당신
피곤해져도 잊지 마
아득히 멀리서 들려오는 바람의 말을”
(마종기, <바람의 말> 중)

ⓒ여경

 
여경 (요안나)
서강대 국어국문학과 학생. 삶, 사람, 꽃, 벗, 별, 꿈이라는 단어를 좋아한다. 울림이 예쁜 말들에 이끌려 국어국문학과에 가게 되었다. 모두가 행복한 세상을 꿈꾸고 이를 위해 문학과 예술의 힘을 빌리려 한다. 시와 음악과 그림, 나무, 물이 흐르는 공간, 공동체를 만드는 것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고향 바다를 닮아 평온하고도 깊고 강인한 사람이고 싶어한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