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9일 (성령 강림 대축일) 요한 20,19-23, 사도 2,1-11

성령 강림 대축일은 예수님이 떠나가시고, 하느님의 숨결인 성령이 우리에게 오셨다는 사실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사람이 세상을 떠나면, 그 사람은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 안에 살아 있습니다. 그가 살아 있을 때, 사람들의 뇌리에 남겼던 일들이 이야기를 발생시키고, 그것이 역사 안에 남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삶에 대한 기억과 더불어 당신 안에서 일하시던 하느님의 숨결을 당신의 제자들에게 남기셨습니다. 제자들은 그 사실을 이야기로 만들어 역사에 남겼습니다. 그것이 오늘 우리가 복음과 제1독서에서 들은 이야기들입니다.

오늘 복음은 제자들이 모여 있을 때, 부활하신 예수님이 발현하셨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는 말씀과 더불어 당신의 두 손과 옆구리를 보여 주십니다. 손과 옆구리는 십자가에서 종말을 고한 당신의 삶을 요약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며,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초기 신앙공동체는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성령이 하신 일이었다고 믿었습니다(마태 1,20). 예수님이 제자들을 가르친 것도, 그분이 세례를 받고 성령이 내려오면서 시작한 일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부활한 예수님은 제자들을 파견하면서 같은 성령을 불어넣으십니다. 제자들의 복음 선포도 성령, 곧 하느님의 숨결을 받아 시작된 일이라는 말입니다.

성령은 죄를 용서하시는 하느님의 숨결

성령은 예수님이 사신 숨결, 곧 하느님의 생명입니다. 창세기(2,7)는 하느님이 인간을 창조하실 때, 진흙으로 된 인간 모상에다 당신의 숨결을 불어넣으시자 살아 있는 사람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오늘 복음은 제자들이 예수님의 숨결로 산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 예수님이 그들 안에 당신의 숨결을 불어넣으셨다고 말합니다.

성령은 죄를 용서하시는 하느님의 숨결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주면 용서 받을 것”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죄를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는 말은 유다인들의 화법(話法)입니다. 성령은 용서하신다는 사실을 긍정적으로 말하고 부정적으로 한 번 더 말하여 강조하는 화법입니다. 유다교는 이 세상의 모든 불행은 인간 죄에 대한 하느님의 벌이라고 가르쳤습니다. 예수님은 용서하는 하느님을 선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상상하는 하느님을 거부하였습니다. 예수님이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른 것은 자녀에게 선한 일을 하는 아버지를 상상하게 합니다. 악한 인간이라도 “생선을 달라는 아들에게 뱀을 대신”(루카 11,11) 주지 않는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선하고 자비로운 하느님을 믿고 가르쳤습니다. 하느님이 “자비로우신 것 같이”(루카 6,36) 우리도 자비를 실천하여 그분의 자녀 되어 살라고 가르쳤습니다.

하느님은 인간이 당신의 자비를 배워 자유롭게 실천하며 살 것을 원하십니다. 예수님도 그 자비를 실천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두루 다니며 좋은 일을 행하셨다”(사도 10,38)는 기억을 제자들에게 남겼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일들이 하느님의 것이었다고 믿는 초기 신앙인들은 그분을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중풍병자를 고친 다음,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지금도 아버지께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고 있습니다”(요한 5,17).

예수님 안에 살아 있던 성령이 우리에게도 주어졌다

오늘 제1독서에서 우리는 사도행전이 전하는 성령 강림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사도행전은 제자들의 선교활동을 소개하는 문서입니다. 그 문서는 시작하면서 두 개의 장면을 보여줍니다. 하나는 예수님이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는 것이고, 또 하나는 성령이 강림하는 장면입니다. 사도들이 복음을 선포하기 전에 예수님은 이미 그들을 떠나가셨고, 성령이 그들에게 오셨다는 말입니다.

성령이 강림한 장소는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부활하고 승천하신 예루살렘이었다고 말합니다. 때는 해방절 후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많이 모여드는 오순절입니다. 오순절은 유다인들이 소중히 기념하는 해방절 다음 50일째의 날입니다. 보리와 밀의 햇곡식을 하느님께 드리는 감사제인 동시에 이스라엘 백성이 시나이산에서 하느님과 맺은 계약을 기념하는 축일입니다. 13세 이상의 이스라엘 남자는 모두 이날 의무적으로 예루살렘 성전에 순례해야 합니다.

성령 강림 장면에 나타나는 ‘거센 바람이 부는 듯한 소리’와 ‘불’은 구약성서의 탈출기(20,18)가 하느님이 발현하셨다고 말할 때, 사용한 표상들입니다. ‘불꽃 모양의 혀들’은 교회의 복음 선포가 사람들의 임의에 맡겨진 일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에 기원이 있는 일이었다는 사실을 뜻합니다. 그리고 그 하느님의 말씀이 불길 같이 전파되어 나간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성령이 내려오시자 사도들은 복음을 선포하고, 언어가 다른 군중도 자기네 지방말로 그 선포를 알아듣습니다. 복음은 모든 민족을 위해 선포된다는 뜻입니다. 인류는 언어가 서로 다른 민족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인간 예수 한 분 안에 발생한 복음이지만, 이제부터는 언어와 문화의 차이를 넘어 모든 민족에게 전해진다는 뜻입니다.

성령 강림은 예수님 안에 살아 계셨던 하느님의 숨결이 우리에게도 주어졌다는 사실을 기념하는 축일입니다. 성령은 민족과 언어의 장벽을 넘어 복음이 전해지게 하십니다. 인간은 구실만 있으면, 서로 간에 장벽을 만듭니다. 민족과 문화의 다양함이 있고, 출신 지역과 직업의 다양함이 있습니다. 그런 다양함은 인류의 풍요로움을 말하지만, 인간의 좁은 마음은 그것들을 차별의 장벽으로 삼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숨결인 성령도 장벽과 차별의 구실로 삼으려 합니다. 교회 공동체 안에는 다양한 봉사가 있어 풍요롭지만, 우리의 좁은 마음은 그 다양함을 성령과 결부시켜, 하느님에게 기원이 있는 차별이라 믿으려 합니다. 성령을 받은 자와 받지 못한 자를 구별하여, 성령을 인간 차별의 주범으로 삼는 신심운동도 있습니다. 인간은 그렇게 장벽과 차별 만들기를 좋아합니다.

성령은 하느님의 숨결입니다. 하느님 아버지 안에 우리를 하나 되게 하는 숨결입니다. 그 숨결은 예수님 안에 살아 계셨고, 또한 예수님을 배우는 우리 안에도 살아 계십니다. 우리를 하느님의 자녀 되어 살게 하는 성령이십니다. 오늘 복음은 그 자녀 됨이 예수님이 살아 계실 때, 보여주신 용서를 하느님의 일로 받아들이며, 그것을 우리가 실천하는 데에 있다고 말합니다. 욕심, 허영, 질투, 미움 등은 우리가 지닌 한계, 곧 죄의 동기입니다. 하느님의 숨결이 우리 안에 살아 계시면, 예수님으로부터 배워, 하느님 자녀의 삶이 우리 안에도 발생합니다.
 

서공석 신부 (요한 세례자)
부산교구 원로사목자. 1964년 파리에서 사제품을 받았으며, 파리 가톨릭대학과 교황청 그레고리안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광주 대건신학대학과 서강대학교 교수를 역임하고 부산 메리놀병원과 부산 사직성당에서 봉직했다. 주요 저서로 <새로워져야 합니다>, <예수-하느님-교회>, <신앙언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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