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리비아 선교 일기 - 마지막]

수녀원에 들어오고 나서 가장 많이 받아본 질문이 있다. 아마 많은 다른 수도자들과 사제들도 살면서 수없이 들었을 질문이다. 왜 이 길을 선택했는가, 왜 수도자가 되기로 결심했는가, 하는 물음말이다.

그 질문에 대해 신기하게도 공통적으로 나오는 대답이 있다. 수많은 수도자들이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고 나 또한 그렇게 대답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미리 말을 맞추어 두었거나, 무슨 수도자 가이드 같은 책이 있어서 그렇게 대답하라고 나와 있는 것도 아니다. 더욱 재미있게도 이것은 범세계적인 모범 답안이어서 30여개 국적이 모여 사는 나의 공동체의 수많은 수녀들도 같은 말을 한다. “무언가가 부족했어요.”

다들 나름대로 만족스러운 생활을 하고 있었지만 무언가가 빠져있었다고, 원하는 것을 가졌어도 채워지지 않는 무엇인가가 있었다고 말이다. 모두가 같은 답을 하니 믿기가 어렵지만 그것은 정말로 사실이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랬다. 나름 괜찮은 직업이 있었고, 자유로웠고, 편안한 생활을 할 수 있었다. 그런데도 뭔가 늘 아쉬웠다. 삶을 더 온전하게 만드는 나만의 진정한 의미를 찾아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수도자로 사는 이 삶을 선택했고, 그것도 사랑하는 가족을 비롯해 내게 익숙한 모든 것을 떠나 낯설고 먼 곳으로만 다니는 선교의 삶을 선택해 이렇게 살고 있다. 그래서 얻은 것이 무엇인지, 과연 그 부족했던 부분이 채워졌는지, 아직도 외동딸의 선택을 반가워하지 않으시는 어머니가 늘 물으신다. 그리고 나 자신도 스스로에게 묻는다.

나는 선뜻 대답을 하지 못한다. 정말 채워졌는가. 뭔가 빠진 것 같았던 그 조각들이 찾아졌는가. 혹은 찾아지고 있는가. 평생을 낯선 땅에서 낯선 말을 하며 영원한 이방인으로, 절대 주류(主流)가 될 수 없는 이 사회의 소수자로 살아가야 하는 이 삶에서 과연 나는 그 부족한 부분을 채워나갈 수 있을 것 같은가.

특히 이곳 볼리비아에서 끝이 보이지 않는 가난을 날마다 마주하며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식으로 끝도 없이 퍼주기만 하지, 뭐 하나 얻을게 있어서 나의 채워지지 않는 부분을 채우겠는가 하는 말을 들은 적도 있다. 딱히 뭐라 반박할 수 없기도 하고 뭐라고 설명하기도 쉽지 않다. 하지만 내게 늘 아쉬웠고 뭔가 부족한 듯 했던 부분은 조금 다른 방법으로 채워지는 것 같다.

▲ 공부방 아이들과 함께 ⓒ이윤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세례식, 그리고 우정

내가 일하는 교도소에 한 여성 수감자가 만삭인 몸으로 들어왔다. 많은 사람들이 말렸지만 병원비를 낼 형편이 못 돼 열악한 교도소의 의무실 안에서 아이를 낳았다. 몇 달 후 아이 엄마는 내게 “어미가 죄인인데도 아이가 세례를 받을 수 있을까요? 초 하나 살 돈도 지금은 없는데……”, 그렇게 걱정스럽게 물었다.

나는 아기의 세례식을 준비하며 한국의 여러 본당에서 경험한 아이들의 세례식을 생각해 보았다. 흰 드레스를 입은 천사 같은 아이들이 아름다운 성가대의 음악이 흐르고 화려한 꽃다발과 부모님들의 카메라 플래시가 터지는 가운데 예쁘게 장식된 초를 켜고 세례를 받는다.

지금 내가 준비하고 있는 세례식에는 성가대도 꽃도 카메라도 없다. 교도소 한 구석 허름한 경당의 죄수복을 입은 예수상 앞에서 작은 양초 하나만 켜놓고 아기의 소박한 세례식이 치러진다. 화려함도 없고 손님도 없고 가진 것도 아무것도 없으니 오직 성령만으로 그 자리가 가득 채워진다. 아이 엄마는 눈물을 훔치고 나는 힘껏 백 명, 이 백 명 손님 몫의 박수를 친다. 이렇게 아름다운 세례식을 나는 본 적이 없었다. 그곳에서 내가 느낀 충만함이, 가장 가난한 곳에서 느꼈던 충만함이 바로 내가 늘 아쉬워했던 무엇인가를 채워주고 있었다.

같이 사는 마가렛 수녀가 빈민가 아이들을 모아 공부방을 운영한지 몇 년째다. 그러다 어떻게 연이 닿아 미국에 있는 한 초등학교 한 학급의 아이들과 우리 공부방 아이들이 자매결연을 맺게 되었고, 얻어다 놓은 중고 컴퓨터에 인터넷을 연결해 양쪽의 어린이들이 이메일로 펜팔 친구가 되고 화상 통화도 할 수 있게 해주었다. 전에 이런 것을 경험해 본 적이 없었던 공부방 아이들은 마냥 신기해하며 신이 나서 어쩔 줄을 모른다. 경제적으로 풍요롭게 살고 있는 미국의 어린이들과 볼리비아의 빈민가 아이들이 잘 어울릴 수 있을까 걱정도 했지만 역시 아이들은 아이들이었다. 서로 신이 나서 재잘대는 모습이 너무나 예쁘기만 했다.

그 학급을 지도하던 선생님이 제안을 해왔다. 학부모들과 선생님들로부터 약간의 기금이 모아졌으니 그 돈으로 우리 공부방 아이들에게 태블릿 PC를 하나씩 선물하고 싶다고 했다. 그것은 우리 아이들에게는 복권이라도 당첨된 것 같은 엄청난 선물이 되겠지만,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우리가 서로 다른 환경과 조건에서 살고 있다 보니 필요한 것도 서로 다른 것 같아요. 우리 아이들이 지금 필요한 것은 손 씻을 비누와 화장지, 찢어지지 않은 공책과 연필이네요. 나중에 태블릿 PC가 필요할 때 부탁드려도 되겠지요?” 하고 마가렛 수녀가 웃으며 말했다.

나중에 우리는 그 선생님으로부터 긴 편지를 받았다. 서로 다른 모습의 우리 삶을 어떻게 서로 이해하고 존중해야 하는지 배웠다고 했다. 사는 방법이 다른 만큼 필요도 다르니 그것을 서로 존중할 때 우리의 존엄함이 지켜진다는 것을 아이들에게 설명하고 있다고 했다. 내게는 참으로 아름다운 소통의 순간이었다. 다르다고 생각했던 나와 다른 이가 한 마음으로 소통하고 일치를 이루는 이 경험은 뭔가 채워지지 않은 듯 했던 나의 삶을 조금 더 충만하게 해 주고 있었다.

▲ 마을 축제에서 춤추는 아이들 ⓒ이윤주

교회 떠나는 사람들이 남기는 메시지를 기억하자

생각해 보면 이러한 충만함의 경험은 수없이 많지만 언제나 이렇게 아름다운 것만은 아니다. 씁쓸하고 가슴 아픈 선교의 경험들을 통해서도 삶이 더 큰 깨달음과 교훈으로 채워지는 것을 나는 경험한다.

나에게 선교란 교회 신자 수가 몇 퍼센트 늘었다는 통계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것이 내가 그 누구에게도 내 종교를 가지고 가거나 소개하지 않는 이유이기도 한다. 오히려 그 반대로, 나는 실제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고 있으며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알고, 그래서 내가, 우리가, 교회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생각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믿는 사람이다.

내가 사는 가난한 마을의 가난한 본당. 성당 건물은 겨우 지어 놓았지만 돈이 부족해 신자들이 앉을 의자를 몇 년째 사지 못하고 있다. 여기저기서 주워 온 플라스틱 의자만 몇 개 있다. 그러니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서서 꼬박 한 시간이 넘는 미사를 드리다 힘이 들어 흙바닥에 주저앉으시고, 아기 엄마들과 장애우들이 몸을 가눌 곳이 없어 성당에 오고 싶어도 오지 못하고 있다. 의자를 구입하는 것이 이렇게 절박한데도 본당 예산의 큰 부분은 제대에 금칠을 하고, 더 화려한 촛대를 사고, 실크 가운을 두른 푸른 눈의 키 크고 어여쁜 성모상을 외국에서 공수해 오는데 쓰였다. 하루 종일 뙤약볕에서 고된 노동을 한 가난한 신자들이 한 푼, 두 푼 모아 준 귀한 돈이 그렇게 쓰이는 것을 보고 씁쓸한 마음에 돌아서 교회를 떠나는 그들을 나는 차마 붙잡을 수가 없다.

본당 관할 구역 내 학대받는 아이들을 돌볼 사회복지사가 필요한데 그 예산은 없지만, 본당 축일 행사에 시간당 몇 백 달러나 하는 밴드를 불러 성가를 부르게 하는 이 교회에 등을 돌리는 이들을 나는 이해하고도 남는다. 결혼하지 않고 아이를 낳은 여성들을 죄인이라 가르치고, 이혼했거나 동성애자인 이들에게 영성체를 허락하지 않는 이 교회로 나는 사람들을 초대하고 싶을까.

이렇게 아픈 경험들조차도 내 삶을 충만하게 해 준다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내가 그 안에서 그냥 좌절하고 마는 것이 아니라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배우기 때문이다. 기가 막히고 희망이 없는 것 같은 이 현실에 작은 변화라도 가져올 수 있다면 그 일에 온 힘을 다하고, 교회를 떠나는 이들이 우리에게 남기는 메시지를 기억해 우리가 더 이상 서로에게 상처주지 않도록 하고 싶은 열망을 일으켜 주기 때문이다.

선교의 삶은 이렇게, 애쓴 보람이 당장 나타나거나 눈으로 보이는 성과를 바로 기대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당장 상황이 나아지지 않으니 정말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것처럼 허무하게 보일 때도 있다. 그러나 그 선교의 삶 안에는 분명 나를 온전하게 채워주는 충만함이 있음을 나는 경험으로 안다. 그래서 그 충만함을 위해 나는 앞으로도 계속해서 이 밑 빠진 독에 기꺼이 물을 부으려고 한다.
 

이윤주 수녀 (아나스타시아)
메리놀 수녀회, 볼리비아 선교사

* 이번 회로 이윤주 수녀의 ‘볼리비아 선교 일기’ 연재를 마칩니다. 선교사로서의 생활과 성찰을 담은 따듯한 글을 보내 주신 필자께 감사드립니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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