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2일 (주님 승천 대축일) 루카 24,46-53, 사도 1,1-11

부활 대축일이 지나고 40일이 지난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승천을 기념합니다. 부활과 승천은 서로 다른 두 개의 사건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죽음에서 부활하셨다는 것은 죽음을 넘어 하느님 안에 살아 계시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부활은 곧 승천이기도 합니다.

마르코 복음서는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을 파견하고 “하늘로 맞아들여져 하느님 오른편에 앉으셨다”(16,19)고만 말합니다. 마태오 복음서는 마르코 복음서를 옮겨 적으면서도 이 부분을 삭제하고 승천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루카 복음서는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성령을 약속하고 베타니아 근처로 그들을 데리고 나가 축복하시고, 그들을 떠나 하늘로 올라가셨다고 말합니다.

오늘 우리는 제1독서로 사도행전을 들었습니다. 사도행전은 예수님의 승천 장면을 더 분명하게 묘사합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 40일 동안 자주 나타나셔서 사도들을 격려하시다가 예루살렘에서, 제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루카 복음서와 사도행전은 같은 사람이 집필하였습니다. 그 저자는 루카 복음서에서 예수님의 삶에 대해 기록하고, 사도행전에서는 그분의 뒤를 이은 사도들의 활동에 대해 기록하였습니다.

두 문서가 모두 같은 저자의 기록인데도 승천 이야기는 각각 다릅니다. 루카 복음서에서는 예수님이 부활하신 당일 승천하셨고, 그 장소는 예루살렘 근처 베타니아입니다. 예수님은 하늘로 올라가시고, 제자들은 성전에서 날마다 하느님을 찬미합니다. 그러나 사도행전에서는 예수님이 부활하고 40일이 지난 다음에 승천하십니다. 그 장소는 예루살렘입니다. 예수님은 구름에 싸여 올라가시고 제자들은 하늘만 쳐다보고 있습니다. 그러자 흰옷 입은 두 사람이 나타나서 예수님이 다시 오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승천에 대해 다른 복음서들이 보도하지 않는 것은 부활과 승천이 서로 구별되는 별 개의 사건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루카 복음서와 사도행전이 부활과 승천을 굳이 분리하여, 두 개의 사건으로 말하는 것은, 그 시대 사람들에게 부활을 더 효과적으로 설명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 시대 사람들은 우주가 하늘과 땅, 그리고 땅 아래 죽음의 나라, 이렇게 세 층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믿었습니다. 따라서 부활은 죽음의 나라에서 사람들이 사는 땅으로 돌아온 것이고, 승천은 땅에서 하느님이 계시는 하늘로 다시 올라간 것입니다. 사도행전이 부활과 승천 사이에 40일의 기간을 둔 것은 제자들이 예수의 부활을 믿고 복음 선포에 나서기까지는 상당한 시일이 걸렸다는 사실을 말하기 위해서입니다.

루카 복음서와 사도행전을 같은 저자가 집필하였는데, 두 문서에 승천을 서로 달리 기록한 것은 승천에 대한 사실보도가 중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셨다는 말은 그분이 제자들을 떠나 하느님에게로 가셨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 위에 군림하지도 않으시고, 당신의 초능력으로 제자들의 활동을 돕지도 않으십니다. 그분은 떠나가셨고,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남겨 놓은 것은 당신에 대한 기억이고, 성령이 곧 오신다는 약속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상대방의 자유를 무시하지 않는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예수님이 하신 기적이 경이로워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삶에 대해 제자들이 기록하여 남긴 성서는 우리가 예수님을 배워 그분의 제자로 살기에 충분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으로부터 배우는 것은 예수님의 초능력이 아닙니다. 신앙인은 다른 사람들이 하지 못하는 경이로운 일을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우리 곁을 떠나가셨습니다. 우리가 그분의 말씀과 삶을 본받아 실천할 때, 그분은 우리 안에 살아 계십니다. 요한 복음서는 말합니다. “이제 조금 있으면 세상은 나를 보지 못하겠지만 그대들은 나를 보게 될 것입니다. 내가 살아있고 그대들도 살 것이기 때문입니다”(14,19).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의 실천 안에 살아 계신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초능력을 과시하며 복음을 선포하지 않으셨습니다. 초능력을 과시하면, 사람들은 그 초능력에 매료되어 자유를 잃어버립니다. 그것은 하느님이 일하시는 방식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초능력으로 사람들 위에 군림하지 않으십니다. 하느님은 사람들이 당신의 생명을 자유롭게 받아들이고 실천하여 자유로운 당신의 자녀로 살 것을 원하십니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표징을 보여 달라고 요구하는”(마르 8,11) 바리사이들의 요구를 예수님은 거절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초능력을 과시하여 사람들이 당신을 따르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자유를 존중하셨습니다. 사람들의 자유를 존중하신 나머지, 악의에 찬 유다인들의 자유 행사에 압도당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셨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상대의 자유를 무시하며 그를 압도하여 자기의 뜻을 관철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상대가 자기의 사랑을 자유롭게 받아들이고, 그 사랑에 호응하여 사랑할 것을 호소하며 기다립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처신이었습니다. 그것은 또한 하느님이 섭리하시는 방식이기도 합니다.

그분의 이름으로 권위를 내세우지 마라

예수님이 승천하여 떠나가셨다는 오늘의 메시지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인 교회 공동체에서는 어느 누구도 사람들 위에 군림할 수 없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권위나 권한을 주장하지 마라는 말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떠나가셨습니다. 오늘 복음이 말하듯이, 당신 아버지께서 성령을 보내주신다는 약속을 남기고 당신은 가셨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성령이 일하셔서 나타나는 제자들의 실천 안에 살아 계십니다. 예수님은 군림하지 말고 섬기는 사람이 되라고 제자들에게 간곡히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예수님 제자들의 정체성은 섬김입니다. 성령이 살아계시면 신앙인 안에 섬김의 실천이 보일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하늘로 올라가셨다는 말은 하늘이 있는 곳이면 어디에서나 예수님을 볼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하늘이 보이는 곳, 어디에서나 섬김을 실천하는 사람들 안에 예수님은 살아 계신다는 말입니다. 자기 자신을 과시하지 않고, 스스로를 낮추어 하느님의 자비를 실천하는 사람들 안에 예수님은 살아 계십니다. 자기의 실수와 실패의 아픔, 곧 죽음을 넘어 하늘을 우러르는 마음으로 새 출발하는 사람들의 삶 안에 승천하신 예수님은 살아 계십니다.

예수님은 그분에 대한 우리의 기억 안에만, 혹은 전례가 거행되는 성당 안에만 계시지 않습니다. 넓은 세상 어디에나 그분이 가르치신 섬김을 실천하고, 그 섬김으로 말미암아 십자가를 지고 수고하는 사람들 안에 예수님은 성령으로 살아 계십니다. 억울함과 고통을 딛고 일어서서, 이웃을 섬기는 데에서 삶의 보람을 느끼는 사람들의 삶 안에 예수님은 살아 계십니다. 이제 예수님은 나자렛, 갈릴레아 혹은 예루살렘에 계시지 않습니다. 하늘 아래 어디에나 성령이 일하시는 곳에, 희생적인 섬김을 실천하는 그리스도인이 있는 곳에, 예수님은 그들의 주님으로 살아 계십니다.


서공석 신부
(요한 세례자)

부산교구 원로사목자. 1964년 파리에서 사제품을 받았으며, 파리 가톨릭대학과 교황청 그레고리안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광주 대건신학대학과 서강대학교 교수를 역임하고 부산 메리놀병원과 부산 사직성당에서 봉직했다. 주요 저서로 <새로워져야 합니다>, <예수-하느님-교회>, <신앙언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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