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사는 이야기 - 백동흠]

딸아이가 고국에 새로운 일자리를 갖게 되었다. 뉴질랜드를 떠날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내심 흐뭇하면서도 왠지 가을 코스모스 가지마냥 마음이 흔들거린다. 원하던 학업을 마치고 일을 찾아 부모 곁을 떠나는 터라 이번은 감회가 다르다. 아들 녀석도 몇 년 전 고국에 가서 둥지를 틀었다. 이번에 딸까지 떠나면 아내와 둘만 남게 된다. 함께 추억여행 하나 만들자는 아내의 제안에 고개를 끄덕였다. “셋이서 가볍게 한 이틀 타우포나 타우랑가에서 바람 좀 쐬고 오지.”

함께하고 싶은 나눔에 즐겁게 몰입할 수 있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다. 이민 생활 18년째, 우리 30년째 결혼기념일에 셋이서 떠나는 오붓한 여행이다. 딸아이도 고국에 갈 준비하느라 바쁘면서도 엄마, 아빠와 함께 여행 간다니 흐뭇한 표정이다.

안개 기운을 느끼며 떠나는 일요일 새벽이다. 출발 차량 시동소리부터가 경쾌하다. 가볍게 떠나는 기분이 한가롭다. 먹을 것과 필요한 것을 싣고서 연료까지 가득 채우니 세상에 거칠 것이 없다. 부자가 된 느낌이다. 발길 닿는 대로 가기만 하면 된다. 쉬고 싶은 곳에서 쉬면 된다. 안개가 걷히면서 뉴질랜드 특유의 녹색 대자연이 펼쳐진다. 한여름이다. 하늘은 높푸르고 바다는 새파랗다. 차창 바람이 폐부를 시원스레 적셔준다.

가족의 가훈으로 삼아온 생활 지침이 가슴속에서 뭉클거린다. 지금 여기! Now & Here! 지금 여기에 모든 것이 있다. 기쁨도 슬픔도 있다. 행복도 불행도 있다. 현재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 작은 것도 감사히 여긴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겸허히 산다. 지금 여행도 마찬가지다.

먼저 발길 멈추는 곳이 해밀턴 가든이다. 여러 나라 정원을 뒤로 한 채 주변 다른 곳에 눈이 간다. 가든 옆쪽으로 도도히 휘돌아 흐르는 넓은 와이카토 강물에 시선을 두고서 한참이나 바라다본다. 내 인생의 강물도 반 이상은 흘러간 것 같다. 딸아이도 성장해서 제 앞길을 찾아 부모 곁을 훌쩍 떠나간다. 학창시절에 감동 깊게 봤던 영화 <흐르는 강물처럼>의 장면이 흐른다. 아버지와 아들간의 감동을 안겨준 대사가 자꾸 겹쳐진다.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어도, 온전히 사랑할 수는 있는 거야.” 그래, 어찌 다 이해할 수 있을까. 그저 사랑해야지.

ⓒ백동흠

유황온천 냄새 진하게 풍기는 로투루아에 들어서니 점심때다. 레드우드 삼림 캠프 사이트에 차를 세웠다. 취사도구를 꺼내 여유 있게 뜨끈뜨끈한 음식을 해서 먹으니 참 이채롭고 밥맛도 별미다. 아내와 딸이 친구처럼 삼림 속을 도란도란 이 얘기 저 얘기하며 겯는다. 깔깔대며 웃기도 하고 장난도 친다. 검은색 선글라스도 연예인같이 어울린다. 휴대폰 카메라로 몇컷 뒤에서 찍는다. 그늘을 드리우는 수백 년 된 삼나무들도 흐뭇한 미소를 흩날린다.

이어지는 쉼터는 푸른 옥 색깔의 타우포 푸카 폭포 앞이다. 언제 와 봐도 푸른 옥 비취 색깔의 폭포수와 우유빛깔 거품이 어우러지는 장관은 가슴을 확 뚫어 놓는다. 자연은 다 저마다의 자리에서 아름다움을 최대로 빛내고 있다. 면적이 서울시 크기와 같다는 타우포 호수 앞에 서니 넓고 푸른 바다다. 딸아이가 차에서 끓여온 커피 한 잔씩을 호숫가 벤치에 나란히 앉아 마신다. 석양 노을이 불그스레하게 얼굴을 붉힌다. 셋이서 말이 없다. 각자 바람을 목젖 아래로 삼킨다. 딸도 어디가나 소신껏 자연스런 모습으로 제몫을 다하며 살겠지.

오늘 숙소인 마지막 목적지 타우랑가로 향한다. 언덕을 넘고 가파른 재를 넘어 가자니 어둠이 몰려온다. 발이 뻐근할 정도가 되니 목적지 마운트 망가누이에 있는 홀리데이파크 지역에 도착한다. 뜨거운 온천물에 몸을 담그니 세상이 다 내 세상이다. 아내도 딸아이도 휴식의 편안함에 푸욱 잠겨있다. 서로를 보며 씨익 웃는다. 아내가 한마디 한다. “나중에 여기 오면 네 자리 생각나겠어.”

해변가 도로로 가니 캠퍼밴이 여러 대 경치 좋은 곳에 머물러 쉬고 있다. 그 옆에 가로등 불빛도 밝고 마침 빈자리가 있어 캠퍼밴을 대니 오늘 밤 쉬어갈 곳이다. 밤바다도 보이고 파도소리가 들려오고 시원한 바다 바람이 불어온다. 늦게나마 저녁을 만들어 파도소리 들으며 여유 있게 천천히 드니 꿀맛이다. 밤하늘에 별들이 눈을 뜨기 시작한다. 바닷가 벤치에 앉아 파도소리 들으며 바다를 바라다본다. 추억이 밤하늘 별 속에 하나씩 박힌다.

차 안쪽으로 들어오니 바깥 가로등 불빛도 따라 들어온다. 침대에 함께 앉아 이야기하기에 딱 좋은 조명이다. 방충망 창문을 여니 시원한 바람도 들어오고 파도소리도 들려온다. 누워도 좋고 앉아도 좋다. 셋이서 침대에 누우니 옛 시절 고향 시골 같다. 달빛이 들어오다 기울어 간다. 맛있는 간식에 밤새도록 셋의 끝없는 이야기가 활활 타다가 모닥불처럼 사위어간다. 이불을 내려 덮으니 아늑한 단칸방이다. 운전의 노독에다 마음이 편해서인지 아내와 딸 아이의 이야길 자장가 삼아 나 먼저 스르르 잠 세계로 빠져든다.

바다 갈매기 소리에 눈을 뜨니 이른 아침이다. 솜털처럼 몸이 가뿐하다. 새 하루가 붉은 쟁반 해를 바다 속에서 밀어 올린다. 낯선 곳에서의 동트는 희망의 새 아침이다. 검푸른 해면 위로 갈매기들이 끼룩끼룩 소리를 내며 힘찬 비상을 한다. 꿈을 찾아 떠나는 딸아이의 날갯짓도 가볍고 예뻐 보인다.

백동흠 (프란치스코)
뉴질랜드에서 택시 기사로 일하며 틈틈이 글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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