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은 오늘을 말한다 - 5]

북한이 핵실험을 강행하고, 한반도에서 남과 북 사이의 무력충돌의 위기가 한층 고조되었다고 언론은 연일 보도했다. 미국과 중국의 관계자들이 움직이는 가운데, 개성공단에서 일하던 사람들이 철수하였다. 텔레비전은 짐을 잔뜩 실은 자동차의 모습을 수시로 방영했다.

그리고 우리 정부는 150㎞ 상공에서 적의 미사일을 요격할 수 있는 미사일이나 공격형 아파치 헬기나 최첨단 무인정찰기 ‘글로벌호크’ 따위의 미국산 무기를 구입할 수도 있음을 밝힌다. 국민을 안심시키려는 것인지, 미국을 기쁘게 하려는 것인지, 그것까지는 모르겠다. 북한은 핵무기 보유를 기정사실화하려고 하고, 우리는 이에 대응하여 강한 무력을 갖춤으로써 북의 도발을 막으려 한다. 수많은 전망이 쏟아지고, 다양한 견해가 충돌한다. 그리고 어떤 매체와 단체들은 마침내 이 사태를 빌미로 하여 이른바 ‘종북 척결’까지 외친다. 이 자리에서 한반도 정세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고 시시비비를 가리고 분석하자는 것은 아니다.

필자는 지금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분위기를 ‘평화실현과 무력증강, 이해하려는 대화와 섬뜩한 증오의 혼돈’으로 보고 싶다. 평화를 갈망하면서도 파괴적 무력을 갖춰야 한다는 혼돈, 대화를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미움과 증오를 증폭시키려는 혼돈, 이 혼돈이 우리의 생각과 태도, 그리고 신념과 행동을 사로잡고 있다.

우리가 생각하고 실현하려는 ‘평화’는 무엇일까? 방어를 위한 무력과 파괴를 위한 무력 사이의 경계는 무엇이며, 누가 그것을 정의할 수 있을까? 대화를 원한다면, 그 대화의 목적은 무엇일까? 한쪽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으려 하는 대화라면, 그것이 다른 쪽에게 대화로 보일까, 강요가 될까? 한쪽의 미움과 증오가 정당한 분노라고 주장한다면, 다른 쪽의 미움과 증오는 무엇일까? 어쩌면 우리는 이 혼돈 속에서 하나를 선택하라고 강요당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내 편이 아니면 제거해야 할 ‘적’이 되는 극단의 상황으로 내몰리는 것은 아닐까?

▲ 지난 4월 28일, 개성공단을 둘러싼 남북한의 신경전이 계속되는 가운데 북한 땅이 바라보이는 강화도 연미정 둘레를 사람들이 걷고 있다. ⓒ강한 기자

강요는 폭력일 뿐이다

어쩌면, 예수님도 그랬을 것이다. 가깝게는 가족들로부터도, 멀리는 유다 민족과 제국이 강요하는 선택에 이르기까지.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일관되게 ‘아버지의 뜻’에 충실했다. 그 대가는 거의 모두로부터의 버림받음이었으며 마침내 죽음(처형)이었다.

가족들에게는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으로 그 혈연의 경계를 넘었다. ‘메시아’를 갈망했던 동족인 보통의 유다인에게 예수님은 실망스런 분이었다. 독립을 이끈 영웅이 되지 못했다. 예수님보다 바라빠가 그들에게는 영웅이었는지도 모른다. 지도자들에게는 로마 제국의 막강한 무력이 ‘백성과 성전’을 파괴할 명분을 주는 위험한 불순분자였다. 예수님의 죽음은 그들에게 ‘좋은 일’이었다.

로마 제국의 총독 역시 마찬가지였다. 유다인의 왕이든 아니든, 예수님은 환영받지 못할 인물이었다. 로마에도 충성하지 않고, 그렇다고 대놓고 로마법을 어기지도 않는, 그렇지만 식민지 백성 가운데 하찮은 이들을 몰고 다니는 그 예수님을 애써 미워할 이유도 없지만, 그렇다고 가만히 놔둘 형편도 아니었을 것이다. 예수님의 죽음은 어쩌면 극소수의 사람들을 빼고는 모두에게 후련했을지도 모른다.

예수님께서는 가족의 바람에도, 보통의 유다인의 갈망에도, 지도자들의 강요에도, 제국의 큰 뜻에도 응하지 않았다. 모두가 예수님께 선택을 강요했지만, 그 누구도 예수님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지 못했다. 강요는 폭력일 뿐 결코 선택이 될 수 없음을 예수님께서는 분명하게 보여주셨다. 죽음의 세력도 그분을 아버지로부터, 아버지의 뜻에서 떼어낼 수 없었다.

진심으로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를 원하나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도록 하여라.” (요한 14,27)

우리는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를 원할까? 세상이 주는 평화를 원할까? 역설이지만,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선택을 요구한다. 그 선택을 미루기에 우리는 마음이 산란해지고 겁을 내는 것인지도 모른다. 혹은 세상이 주는 평화를 쟁취하기 위해 모든 것을 다 바치지만, 그것이 결코 참 평화를 가져다주지 못한다는 것을 어렴풋하게나마 알고 있기에…….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와 세상이 주는 평화는 무엇이 다를까? 혹시 우리는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는 ‘천국에서 누릴 평화’이므로 추상적이며 영적이고, 관념적이며 이상적인 것이라고 간주하는 것은 아닐까? 그러니까 우리가 그 평화 실현을 위해 해야 할 그 어떤 것도 없다고 여기고, 쉽게 외면하고 아예 단념하려는 것은 아닐까?

대신 세상이 주는 평화는 구체적이며 현실적이고, 측량할 수 있기에 목표가 뚜렷하다고 여기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우리가 그 평화 실현을 위해 해야 할 일들이 많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 우리가 바라는 그 평화를 위협하는 폭력(악)의 세력에게 더 큰 폭력(악)을 가할 수 있음을 깨닫게 해서, 감히 도전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현실적인 선택이라고 믿는 것은 아닐까?

만일 그렇다면 세상을 너무 낙관적으로 보는 것이다. 이웃나라 일본을 보라. 북한의 핵 위협을 내세워 무력증강을 꾀하고 있지 않은가? 겉으로는 ‘진정한 독립국가’로서의 주권을 내세우지만 말이다. 여론도 매우 우호적이라고 한다. 불과 몇 십 년 전, 군국주의와 그 광기로 벌인 세계대전의 상흔이 아물기도 전에 다시 군사대국화를 꾀하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세계대전을 일으킬 당시 일본의 시민도, 독일의 시민도 열렬히 환호하고 지지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강력한 무력을 갖추고 정당한 방위를 위해 그 합법적 국가폭력을 선용(방어전쟁)하는 경우를 인류 역사에서 찾아볼 수 있을까? 그런 경우가 있기는 할까?

“평화로는 잃을 게 아무 것도 없다
전쟁으로는 모든 것을 잃을 것이다”

교회는 20세기에 이르러, 그것도 세계대전을 치르고 나서야 비로소 분명하게 선언한다. “평화는 단순히 전쟁의 부재가 아니며, 적대 세력 간의 균형 유지로 격하될 수도 없다”(<사목헌장>, 78항). 그리고 전쟁에 대해서는 보다 분명하게 밝힌다. “교도권은 ‘전쟁의 야만성’을 비난하며, 전쟁에 대하여 달리 생각할 것을 요구한다. 사실상 원자핵 시대에 전쟁을 정의의 도구로 이용할 수 있다고는 거의 상상할 수 없다. 전쟁은 재앙이고, 결코 국가 간에 발생하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적절한 길이 아니며, 지금껏 한 번도 그러지 못했으며, 앞으로도 결코 그러지 못할 것이다. …… 평화로는 잃을 게 아무 것도 없다. 그러나 전쟁으로는 모든 것을 잃을 것이다. …… 더 이상, 더 이상 전쟁은 없어야 한다”(<간추린 사회교리>, 497항).

한 걸음 더 나아가 교회는 ‘비폭력 평화주의’를 칭송한다. “현대 세계도 흔히 조소의 대상인 맨몸의 예언자들의 증언을 필요로 한다. 난폭하고 무자비한 행위를 포기하고, 인간의 권리를 옹호하기 위해서 가장 약한 사람들이 취하는 방어수단을 택하는 사람들은 복음의 사랑을 증언하는 이들이다”(<간추린 사회교리>, 496항).

예수님께서는 주저하지 않고 ‘가장 약한 사람들이 취하는 방어수단’, 곧 비폭력 평화주의를 선택하셨다.

박동호 신부 (안드레아, 서울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 신정동성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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