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원의 리얼몽상] <링컨>,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 2012년작, 현재 상영 중

▲ ‘링컨’,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 2012년작
가진 거라곤 말뿐이었다. 쉼 없이 이야기를 지어내고 귀기울이게 하여 듣는 이의 마음속에 생각의 씨를 뿌리는 재주뿐이었다. 그마저 상대방이 들어줘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그 생각의 씨가 자라나 상대가 더 나은 것, 더 좋은 쪽을 바라봐 주길 비는 것, 할 수 있는 건 그게 다였다.

설득은 언제나 어려웠다. 한 번도 쉽사리 얻어지지 않았다. 심지어 아내의 고통도 불면증도, 상처 입은 아들들의 마음도 말로써 위로하는 건 역부족이었다. 아들을 잃고 “그 애 관 옆에 같이 눕고 싶었던” 스스로의 슬픔조차 달랠 수 없었다. 그럼에도 해야 했다. 대통령이란 수시로 홀로 판단을 내려야 하는 자리였다. 말로 설득하고 말로 싸우고 마침내 말로써 승리해야만 했다. 대체 말이 아닌 그 무엇으로, 이 유혈(流血)을 끝낼 수 있단 말인가.

“노예제도가 잘못되지 않았다면,
세상에 잘못된 것은 하나도 없다”

스필버그 감독의 영화 <링컨>에서 링컨은 고뇌하는 존재다. 그는 19세기를 살다간 한 개인이 아니었다. 고뇌하는 고대 희랍의 철인(哲人)이자 중세인이자 르네상스인이었다. 서양 문명이 이룩한 모든 현명한 유산들, 법에 대해 순리에 대해 선현들이 고뇌 끝에 도달한 그 모든 사유의 힘을 빌리고자 했다. 유클리드의 공리와 공준 즉 “동일한 것과 같은 것은 서로 같다. 그게 정의와 공정성”이라는 대사 하나에까지 다 링컨의 고뇌가 배어 있다.

법의 적용이 자칫 신과 자연법의 순리를 거스르고 악법이 되는 것 또한 인간사의 오랜 질곡이기 때문이다. 소포클레스와 장 아누이가 2천년의 간격을 두고 이런 비극을 묘파한 희곡 <안티고네>의 주제이기도 하다. 영화 속의 링컨은 안티고네와 크레온의 대립―자연법과 국법의 딜레마까지 한 몸에 짊어지고 간다.

링컨은 온 인류가 걸어온 지혜의 발자취를 모아 자신의 당대를 깊이 통찰했다. 과거와 미래로 이어지는 시간의 한 지점에서 자신이 서 있는 현재 위치를 정확히 깨닫는 게 그의 지상과제였다. 아니, 모두가 살 길이었다. 어렵사리 그걸 깨닫긴 했으나, 자신의 모든 것을 다 걸어도 부여받은 사명을 이룰 수 있을지 여부는 암담했다. 뼈저리게 외로웠다. 그리고 사무치게 두려웠다. 2013년 아카데미를 휩쓴 이 영화에서 배우 다니엘 데이 루이스는 완벽한 링컨 그 자체였다. 살아 숨 쉬는 현대인인 동시에 예언자적 풍모까지 지닌 링컨을 구현해냈다.

 

전쟁이 끝나도, 노예의 삶은 끝나지 않는다

당대의 누가 봐도, 조만간 남북전쟁이 끝나는 건 기정사실이었다. 바라던 평화였다. 4년의 전쟁에서 60만명이 넘게 죽었다. 그러나 살아있는 사람들의 자유는 보장돼 있지 않았다. 노예제도로 혜택을 받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종전’만이 중요했다. 자유보다 평화가 우선이라며 기꺼이 북군의 푸른 제복을 입고 전장에서 죽어간 수많은 ‘흑인 노예’ 청년들의 희생은 그저 ‘전쟁 미담’으로 남고 말 것인가. 그들은 살아남아도 다시 노예로 살아야 할 팔자였다.

진짜 전쟁, 이 나라가 자손만대로 인간적 가치를 능멸하게 될 노예제도의 업보를 여기서 어떻게든 끊어야 했다. 역사의 기회란 그렇게 쉽게 다시 오지 않는다. 미처 준비가 되지 않은 사람들 앞에 그저 한 번 다가왔다가는 무정하게 가버리곤 한다.

링컨은 전쟁이 이대로 끝나면, 노예제 폐지 역시 물거품이 될 거라고 확신했다. 노예제도를 법으로 금지시키는 헌법 13조 수정안을 전쟁 종결 전에 의회에서 통과시키려면, 시간은 촉박했고 20표가 모자랐다. 링컨은 속이 타들어간다. “시간의 씨앗을 들여다볼 수 있다면, 어떤 낟알이 자라고, 자라지 않을지 알 수 있을 텐데.”

노예제도에 대한 링컨의 입장은 단호했다. 해낼 사람은 다른 어느 누구도 아닌 바로 자신이었다. “인간적인 가치나 의미가 있는 건 아무것도 추진할 수가 없소. 이 빌어먹을 노예제도나 전쟁을 끝내기 전에는! 그걸 끝내야 하는 건 바로 지금, 지금, 지금이오!”

 

현재를 직면하는 고통

중대한 전보를 앞두고 링컨은 망설인다. ‘거짓말’로 남측 협상단을 묶어둘 것인가, 그걸 하면 무슨 일이 벌어지게 될까, 하지 않으면 과연 무슨 일이 벌어질 것인가? 전보를 받아 치는 서기 두 명과 링컨이 나눈 대화는 의미심장하다.

“인간이 태어나는 것에 선택권이 있다고 생각하나?”
“…….”
“우린 시대에 맞게 태어난 걸까?”
“저희는 모르겠습니다만, 각하는 그런 것 같습니다.”

결국 그는 역사에 자신을 내맡긴다. 죽음까지도. 그 헌법 13조 수정안을 통과시키고 부부의 마지막 나들이 중일 때 아내는 말한다. “보통 사람한테 이게 얼마나 힘든 삶인지…….” 실은, 옆에서 지켜보는 것조차 힘든 삶이다. 역사의 무게를 짊어진 사람 곁에서 살아가는 가족들의 고통과 상처와 희생이란 이루 말할 수 없이 크다.

역사의 한가운데에 ‘총사령관’으로 서게 된, 어쩌다보니 유일한 결정권자가 된 한 개인의 고뇌는 처절하다. 영화 <링컨>은 그것을 직면하게 한다. 동시에 영웅주의를 철저하게 배제했다. 모두에게 가혹한 시대였지만, 동시에 그런 시국에서는 누구라도 잠시는 ‘영웅’이 될 수 있었다. 뿌리치기 힘든 유혹이었다. 링컨의 수정안을 거부하면, 저 역사에 남을 게 분명할 미래의 영웅 링컨에 정면으로 맞서면, 당의 환호와 칭송을 받을 것이었다. 한 순간이나마 ‘주목받는 생’이 될 수 있었다. 당시 야당이던 민주당의 분위기였다.

 

역사의 한가운데 선다는 것

그날 그 역사적인 의회에서 “Yes”와 “Of course”를 외친 소수의 민주당 의원들은, ‘반대’ 표결로 미래를 거스르며 역사에 이름을 남기는 대신 용광로의 불쏘시개로 자신을 던진다. 당대의 정치적 오명도 무릅썼다. 그날 모인 수백 명의 ‘주역’ 중에서 우리가(아니, 대중이 널리) 이름을 아는 ‘영웅’은 단 한 명 링컨뿐이다. 얼핏 생각하면 링컨을 위해 들러리가 되라는 것처럼 보여 정치인으로선 참기 힘든 수모였을 수도 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하면 공동체의 미래가 달린 중대한 갈림길이었다. 나의 한 표의 무게가 너무 커 도망치고 싶기도 했을 것이다.

역사가 개인들을 집어삼킬 듯한 시대였다. 그날의 의회는 상상속의 아테네 학당과 아크로폴리스를 방불케 하는 ‘신화’의 순간이었다. 불꽃이 튀었다. 하지만 그들은 겸허하게 시대적 사명을 받아들였다. 평생의 신념을 ‘수정’한 원칙주의자 스티븐스 의원(토미 리 존스 분)의 놀라운 지혜가 준 반전도 거기서 비롯되었다.

전쟁을 총사령관 혼자 수행할 수 없듯이 의회도, 정치도 마찬가지다. 자신의 시대와 세대 전체가 함께 이끄는 것이다. 누구나 한 번쯤은 이 세계의 조타수가 되기를 꿈꿀지 모른다. 스스로는 준비가 됐건 안 됐건, 그 방향타를 내 양손에 쥐게 되는 1인자의 꿈은 대다수의 욕망이다. 그때 올바른 선택을 내릴 수 있는 자는 어떤 사람인가. 역사의 수레바퀴가 자신의 온몸을 덮치고 지나가며 길을 내려고 할 때 기꺼이 길이 되어줄 자질은 어떻게 길러지는가?

영화 <링컨>을 보고나면 울컥한다. 가진 게 말뿐이었던 남자, 재주라고는 어떻게든 자신의 이야기에 귀기울여달라는 간절함뿐이었던 남자. 그런 남자를 영웅으로 만들기는 해도 끝내 지켜주지는 않는 세상에 대하여, 어리석은 우리들에 대하여, 지금은 저마다 깊이 숙고해야 할 시간이다.
 

 
 

김원 (로사)
문학과 연극을 공부했고 여러 매체에 문화 칼럼을 썼거나 쓰고 있다. 어쩌다 문화평론가가 되어 극예술에 대한 글을 쓰며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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