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5일 (부활 제6주일) 요한 14,23-29

오늘은 부활 제6주일입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 예수께서는 평화를 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이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요한 14,27)고 강조하십니다. 그렇다면 ‘예수의 평화’와 ‘세상의 평화’가 다르다는 말씀일까요?

평화란 ‘전쟁이 없는 상태’만을 뜻할까

요즘 세상에는 ‘평화’라는 말이 넘쳐납니다. 사람들은 평화를 원하고, 또한 이 평화에 거스르는 행위를 비난합니다. 또한 분쟁 지역에 ‘평화유지군’이라는 것도 조직해 보내기도 합니다. 이렇듯 우리는 ‘평화’를 ‘전쟁이 없는 상태’라고 생각하곤 합니다. 과정과 결과야 어찌되었든, 전쟁이 없는 평온한 상태를 평화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예수께서 말씀하신 ‘세상이 주는 평화’입니다.

예수와 관련하여 세상이 주는 평화의 대표적인 예가 있습니다. 로마의 초대 황제였던 아우구스투스(재위 기원전 27~기원후 14년)가 자신의 막강한 군사력으로 로마의 내란을 수습하고, 나아가 스페인과 갈리아 원정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로마로 돌아왔을 때, 당시 로마 원로원은 이를 기념하여 ‘평화의 제단’(Ara Pacis)을 건립하기로 결정하고 이를 ‘아우구스투스의 평화 제단’이라 이름 붙였습니다.

아우구스투스 황제 치세 이후 로마는 이민족의 침입이 없는 평화로운 시기를 약 200여 년 동안 맞이하게 됩니다. 이런 평화를 두고 로마인들은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평화’(Pax Augusta)로 부르게 되었고, 이를 다시 로마의 정치인이자 철학자인 세네카(기원전 4~기원후 65년)는 ‘로마의 평화’, 즉 ‘팍스 로마나’(Pax Romana)라 바꿔 불렀습니다.

하지만 이 평화는 로마인들에게는 영광스러운 ‘승리의 평화’지만, 피정복자의 입장에서는 피로 물든 ‘굴욕의 평화’일 뿐입니다. 외적인 평화, 겉으로만 보이는 평화였습니다. 이는 ‘평화’를 가장하여 상대방을 짓누르는 무지 막대한 ‘폭력의 미학’을 근거로 오직 ‘강제적인 일치’만을 목표로 삼은 ‘패권주의적 평화’입니다. ‘팍스 로마나’가 ‘위장된 평화’의 대명사로 기억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팍스 로마나’의 폐해 답습한 교회

이른바 ‘예수의 첫 번째 고별사’라고도 불리는 오늘 복음 말씀은 예수께서 십자가의 길을 걸으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남기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의 죽음 또한 이 ‘로마의 평화’와 밀접한 연관이 있습니다. 로마의 평화에 걸림돌이 되는 예수의 십자가 처형은 로마의 입장에서 보면 한편으로는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를 ‘평화’의 이름으로 합법적으로 제거한 것입니다.

이러한 로마의 평화는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교의 평화’, 즉 ‘팍스 크리스티아나’(Pax Christiana)를 로마의 평화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하려는 시도가 엿보였습니다. 이에 대한 결정적인 계기는 313년 ‘밀라노 칙령’으로 찾아온 ‘종교의 자유’입니다.

종교의 자유를 얻게 된 후, 교회는 핍박과 박해를 받던 ‘소수의 비주류’ 공동체에서 로마 제국의 ‘새로운 주류’ 공동체로 성장하게 됩니다. 그리고 ‘팍스 로마나’의 폐해를 답습하기 시작합니다. 자신들과 의견이 다른 이들을 ‘평화’와 ‘일치’라는 이름으로 몰아내고, 그들의 재산을 교회의 재산으로 몰수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국가권력을 ‘악의 징벌자’로 정당화하고, 그들의 권력을 종교적으로 뒷받침하는 ‘권력의 종교장치’로 전락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평화는 정의의 결과다

하지만, 예수께서 우리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그리스도의 평화’는 로마의 평화와 정반대의 길을 제시합니다. 로마의 평화처럼 힘과 압력으로 억누르고 얻는 위장된 평화가 아닌, 예수께서 몸소 보여주신 자기희생을 통한 용서와 화해의 평화입니다. 이 평화는 폭력과 그로 인한 보복의 악순환을 끊는 진정한 사랑의 평화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이러한 예수의 평화에 대해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몸으로 유다인과 이민족을 하나로 만드시고 이 둘을 가르는 장벽인 적개심을 허무셨습니다.” (에페 2,14)

용서와 화해의 평화, 폭력과 보복의 악순환을 끊어내는 평화는 결국 권력에 의해, 또는 사회로부터 소외되고 추방당한 작은이들을 위한 평화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또한 그들을 위해 예수께서 베푸신 선물로서의 ‘평화’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예수께서 평생 작은 자, 소외된 자, 그리고 가난한 자 등 사회적으로 ‘비루한’ 사람들과 함께 어울리셨고, 결국 당신 스스로가 그들과 다름없는 처지가 되셨음을 통해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또한 최후의 만찬에서 제자들의 발을 손수 씻기시는 예수의 모습에서 예수께서 의미하시고자 하셨던 평화의 진정한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단지 전쟁이 없는 상태에 있다는 것만으로 그 시대를 ‘평화의 시대’라 부를 수는 없습니다. 이에 대해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사목헌장>에서 “평화는 단순히 전쟁의 부재만이 아니다”(78항)고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또한 이사야 예언자는 “정의의 결과가 평화”이며 “정의의 성과는 영원히 평온과 신뢰가 될 것”(이사 32,17)이라며 정의와 평화를 연관 지어 설명합니다.

‘위장된 평화’에 과감히 맞서야

우리는 이 땅에서 벌어지고 있는 권력에 의한 수많은 위장된 평화의 상처들을 마주합니다. 그리고 그 생채기는 대부분 힘없고 소외된 이들을 향해 집중되어 있습니다. 교회는 이런 목소리 없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대변하여 진정한 평화를 위해 목소리를 높여야 합니다.

교회는 맹목적인 일치와 평화가 아니라 ‘정의’라는 이름으로 예수가 가르쳐 준 평화의 첫 걸음을 떼어야 합니다. 이사야 예언자가 말했듯이 평화는 ‘정의의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도 2002년 평화의 날 메시지에서 “정의가 없으면 평화도 없다”고 강조하셨습니다. 또한 “정의가 겸비되지 않은 대책으로는 평화를 담보할 수 없다”고 단언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들 또한 예수께서 말씀하신 ‘평화’에 주목해야 합니다. 미사에서 ‘평화의 인사’ 때 우리는 “평화를 빕니다” 하고 함께 미사에 참석한 신자들에게 인사합니다. “평화를 빕니다”의 라틴어 미사 경본의 원문은 ‘팍스 크리스티’(Pax Christi), 즉 ‘그리스도의 평화’입니다.

과연 우리는 그리스도의 평화를 이루기 위해 어떤 노력과 수고를 하고 있을까요? 혹시 팍스 로마나처럼, 위장된 평화를 갈망하며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아닌지 반성해 보아야 합니다. 위장된 평화에 그리스도인은 과감히 맞서야 합니다. 예수께서 주시는 평화가 세상의 평화와 다르다는 것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 이해해 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평화를 빕니다.
 

 
김홍락 신부 (프란치스코)
교부학과 전례학을 전공했고, 현재 필리핀 나보타스시 빈민촌에서 ‘가난한 그리스도의 종 공동체’를 설립하여 도시빈민들과 함께 지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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