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알청춘일기 - 하민]

봄바람이 나고 싶은 대학생의 마음으로, 출발~

4월, 5월 두 달은 프랑스의 대학생들에게 가장 가혹한 시기다. 매서웠던 겨울바람이 햇살을 가득 품고 녹아내린 봄이지만, 대부분의 학생들은 도서관 입구에 줄을 서서 책장을 넘기며 공원에서의 여유를 그저 상상하는 데 그치곤 한다. 5월 말, 6월은 특히 졸업을 앞둔 학생들에게 중요한 기말고사 기간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어딘가 가는 길에 일부러 공원을 가로질러 걷곤 하는데, 겨울 동안 다들 어디 숨었는지 궁금할 정도였던 빠리 사람들이 모두 나와 일광욕을 즐기고 있어 잔디 구경하기가 힘들 정도다. 하지만 이런 와중에도 잠시나마 여유를 즐길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진다. 명목상으로는 봄 방학, 사실은 다가올 시험들을 준비하는 2주간의 시간이다.

이 소중한 여유를 잠시나마 즐기기 위해 이틀간 벨기에 도시 앤트워프에 다녀오기로 했다. 영국에서 서양 미술사를 공부하신 아버지 덕분에 어렸을 때부터 화가들의 자취를 따라다니던 가족 여행이 생각나서였다. 예전에 앤트워프에 갔을 때, 루벤스 작업실은 공사 중이어서 문을 닫았었다. 매번 조금씩은 아쉬움이 남아야 다시 오는 거라며 달래주시던 말씀이 이루어지기라도 한 것처럼 몇 년이 지난 지금, 다시 앤트워프를 찾았다. 새벽 기차를 타고 온 여행객들의 발걸음을 멈추게 하는 달콤한 와플 향기부터, 공작새의 꼬리 모양과 비슷하게 만들었다는 중앙역의 구역사까지 모두 새로운 경험의 시작을 알리는 반가운 신호다.

▲ 구역사와 신역사가 조화롭게 이어지는 앤트워프 중앙역 ⓒ하민

왜 미술사 공부를 할까

일찍 도착한 덕분에 한적한 거리를 누비며 도시와 익숙해지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는데, 역시 고풍스러운 구시가지가 인상적이었다. 사진으로만 보던 건출물이나 조각상들을 직접 보면서 수업 시간을 떠올리기도 하고, 생각했던 것과 다른 모습에 놀라기도 했다. 바다 길목에서 세금을 받으며 사람들을 괴롭히던 거인의 손을 자른 영웅 브라보의 이름을 딴 브라보 분수 앞에서 앤트워프(손을 자른다는 말에서 나온 이름)의 유래를 되새기거나, 루벤스와 반다이크의 조각상 앞에서 마치 좋아하는 연예인이라도 본 듯 들뜬 마음에 사진을 찍는 모습을 보며 친구들은 역시 미술사학도라며 놀리기도 했다. 새삼 미술을 바라보는 다양한 시각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순간이었고, “넌 미술사가 재미있냐”던 한 친구의 질문이 떠오르기도 했다.

미술사 공부를 하다 보면 여러 가지 실용적인 학문을 공부하는 사람들에 비해 현실과의 괴리감이 클 수 있다. 생물학 연구로 생명 연장에 도움이 되거나, 여러 기계를 개발해 생활을 편리하게 해 주거나, 환경적인 연구를 통해 자연의 보존을 돕는 것도 아닌 미술사는 많은 이들에게 먼 나라 이야기이고 그저 뜬구름 잡는 이론적인 학문일 뿐이다. 또한 흔히 미술 하면 떠오르는 거장들의 작품은 미술관이라는 기관에서 접하기 쉬워서인지, 그 이름만으로도 고리타분하고 고압적인 인상을 받기 쉽다. 게다가 순수미술도 아닌, 미술의 역사라니 정말 지루해 보일만도 하다. 그런데 사실 어딘가에 가서 보는 것만이 미술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예술의 포괄적인 의미를 생각해 본다면, 우리의 일상과 이만큼 밀접한 관계에 있는 학문도 드물 것이라고 생각된다.

집을 떠나 고생하면서도 즐거운 이유

누군가 왜 굳이 빠리에서, 굳이 서양의 옛 문화와 예술에 대해 공부하는지 궁금해 한다면, 나는 사실 오늘 우리 사회의 모습을, 그리고 앞으로의 모습을 다양한 각도에서 바라보고 있는 거라고 대답해 주고 싶다.

빠리에서 지내다가 서울로 돌아가면 외관상으로 보이는 가장 큰 차이가 건물의 높이, 도심 속 공원 면적, 그리고 일률적인 깔끔함이다. 유럽 도시들의 낮은 수평선에 익숙해져 있다가 높은 건물들을 보면 새롭고, 알록달록한 보도블록을 밟다보면 촉촉한 잔디 냄새와 신발 위의 흙먼지 생각이 나기도 한다. 지하철역과 같은 공공장소들은 모두 유럽의 어느 도시와도 비교가 불가능할 정도로 깨끗하지만, 가끔은 동네마다 다른 중구난방 디자인, 현대적인 주택들 사이에 뜬금없이 튀어나와 있는 19세기 개인주택이 주는 신선한 즐거움을 찾기는 쉽지 않다. 가끔은 힘든 외국 생활이 길어질수록 살기 좋고 편한 한국이 좋은 이유가 늘어 가지만, 문화적인 다양성을 접하고 경험의 폭을 넓힐 수 있다는 게 유학의 매력인 것 같다.

풍요로운 항구도시로서의 과거가 유감없이 드러나는 앤트워프 구시가지에서도 역시, 장인들의 솜씨가 보는 이들의 감탄을 자아내는 작품들이 모여 고풍스러운 멋을 만들어낸다. 게다가 비교적 현대적인 아르누보 디자인이나 아르데코 양식의 건물, 동시대 디자이너들의 작품이 공공장소 곳곳에 흩어져 구시가지의 과거와 어우러지며 앤트워프 특유의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한 도시의 색깔, 여러 가지 형태나 다양한 소재의 질감을 인식하는 데 정식 명칭이나 배경지식은 필요하지 않다. 누구나 보고 듣고, 만지며 즐길 수 있다는 공공장소의 특성을 이용해 모두가 함께 예술을 즐기고, 그 안에 과거와 현재, 그리고 앞으로 추가될 미래의 자리까지 공존한다. 물론 미술품의 보호와 효과적인 전시를 목적으로 하는 체계적인 틀은 필요하겠지만, 미술은 결코 특정 기관의 소유가 아니라 자유로운 소통의 수단으로 존재할 때 그 진가를 발휘하는 것 같다.

▲ 앤트워프 성모 마리아 대성당에서 볼 수 있는 루벤스의 십자가 강하

여정을 마치고 돌아가는 순례객의 마음으로

때로는 미술품의 물질적인 특성상, 또는 문맥상의 의미가 변질되는 것을 막기 위해 전시 공간이 정해지기도 하는데, 그 예로 루벤스 미술관이 있다. 반다이크의 스승이자 네로와 파트라슈 이야기에 등장하는 작품을 그린 루벤스의 집과 작업실, 가족묘가 있는 성당을 보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앤트워프를 찾는다. (이번에는 성당 내부에서 2014년까지 이어질 어마어마한 공사를 진행 중이었다.) 천주교 순례객들에게는 산티아고 순례 여정의 출발점인 성 야고보 성당이,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루벤스라는 화가 덕분에 신자가 아닌 미술 팬들의 방문지로도 인기가 많은 것이다. 그런데 이 성당 주변 골목들에는 마치 게릴라식 전투를 하듯 곳곳에 그래피티가 숨어있다. 길바닥 곳곳에서 성 야고보의 조개 모형을 발견하고 반가워하듯, 숨은 그림 찾기를 하며 그래피티를 찾아다니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다.

건출물과 가구, 캔버스 위의 유화부터 길거리의 포스터뿐 아니라, 예를 들어 쓰레기통 모양의 아주 작은 변화들까지 모두 한 시대의 기록이자 그 시대를 바라본 한 개인의 시선이라고 생각한다면, 총체적인 의미의 미술사는 곧, 각 시대와 그 시대를 사는 사람들을 재조명하고, 미학적 분석의 역사를 통해 인간의 본질에 대한 연구까지 목적으로 하는 광범위한 학문이 된다. 실제로 미술사의 매력이 여기에 있다. 시각적 즐거움이 가미된 인류학이라는 면에서 미술사는 충분히 우리의 일상과 밀접한 관계에 있고 흥미로울 수 있다. 여행을 마무리하고 빠리로 돌아가는 기차 안에서 이번 여행을 되돌아보며, 그리고 곧 시작될 기말고사 기간을 떠올리며 새삼 지금 하고 있는 공부에 대해 자부심을 재충전해 본다.

▲ 앤트워프 성 야고보 성당 입구에 있는 산티아고 순례의 상징 ⓒ하민

 
하민   영국 런던에서 태어났다. 한국에 돌아와 초등학교까지 다니다가 일곱 살에 다시 영국으로 가서 3년을 살았다. 한국 초등학교와 중학교, 프랑스계 국제학교를 거쳐 프랑스로 유학 왔다. 고등학교 땐 이과였는데 언어와 미술에 관심이 많아 대학에서는 문학과 미술사를 공부 했다. 여행을 다니고 새로운 사람 만나는 것을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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