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키리쿠와 마녀> 중에서
<키리쿠와 마녀>(미셸 오슬로, 1998, 프랑스) 라는 애니메이션 영화를 본 적이 있다. 아프리카의 한 마을, 엄마 뱃속에서 스스로 기어 나온 아기 키리쿠가 주인공이다. 키리쿠가 태어난 마을에는 큰 재앙이 있다. ‘카라바’라는 마녀가 마을의 샘물을 마르게 하고, 저주를 풀어달라고 찾아갔던 남자들은 모두 돌아오지 못했다. 모두가 절대악이라고 부르는 카라바에 대해 키리쿠는 의문을 품고 묻는다. “카라바는 왜 그렇게 못됐죠? 그녀에게 무슨 일이 있었나요?” 어른들은 대답한다. “원래부터 그랬어. 세상엔 그런 사람들이 있기 마련이란다”

마녀에 대한 호기심, 마을의 평화를 찾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키리쿠는 마녀를 찾아 나서고, 여정에서 만난 키리쿠의 할아버지는 마녀에 대한 비밀을 말해준다. “카라바는 원래부터 나쁘지 않았어. 그녀를 괴롭히던 사람들이 등에 독가시를 박은 후부터 그렇게 된 거란다” 이 말을 들은 키리쿠는 우여곡절 끝에 마녀의 등에 박힌 가시를 빼낸다. 마녀는 다시 아름답고 선한 여성이 됐고, 카라바의 진짜 모습을 알게 된 순간, 키리쿠는 어른이 된다.

“왜”라는 질문을 좋아한다. 고등학교 시절 스승으로부터 반문하는 법을 배웠고, 사회로부터, 언론으로부터, 부모로부터 일방적으로 주입된 지식에 대해 “정말일까? 다른 입장은 무엇일까?”라고 의도적으로 뒤집어 묻는 습관이 생겼다. 그러는 동안 예외 없이 숨겨졌던 다른 관점들이 보였고, 처음 나에게 주입된 ‘사실’ 또는 ‘진리’가 가진 의도들이 보였다.

'가난'이라는 단어에 너무나 익숙한 교회, 그러나...

‘교종’ 프란치스코는 선출 직후, “가난한 이들을 잊지 마세요”라는 클라우디오 우메스 브라질 대주교의 말을 기억하며 프란치스코라는 이름을 선택했다. 추기경 시절의 검박한 삶과 교종 선출 이후 보여준 파격적 행보와 “교회가 가난한 자들을 위해 더욱 낮아져야 한다”라고 전한 메시지에 수많은 사람들이 환호했다.

‘가난’, ‘가난한 이들’, ‘가난한 이들에 대한 우선적 선택’

가톨릭 신앙을 가진 이후, 오늘날까지 수없이 들어온 말이다. 교회는 스스로 가난해야 하고, 가난한 이들과 함께 해야 한다고 2천년 동안 가르쳐왔다. 그런데 그 특별할 것 없는 이야기, 어쩌면 당연한 소박함에 새삼 환호하며, ‘가난’이라는 말이 마치 신조어인 양 되뇌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교회가 그동안 진정 가난하지 않았기 때문이고, 가난을 피상적으로 대해왔기 때문이다. 가난한 이들을 돌보라고 끊임없이 이야기해왔지만, 사실 그들이 왜 가난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가난’은 동정과 시혜의 대상이 아니다. 당연히 누군가는 가난해서 가난하지 않은 이들을 돋보이게 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가난 구제는 나라도 하지 못한다고 했지만, 오히려 오늘날의 가난은 정부가 가담한 끊임없는 착취의 구조 속에서 생겨났다. 점점 양극화되는 사회 안에서 가난은 남보다 조금 덜 먹고, 덜 쓰는 것을 넘어 인간의 기본권과 목숨을 빼앗기는 원인이 된다. 먹을 것이 넘쳐나는 세상에서 발생하는 기아 문제, 하루아침에 일자리와 삶터를 빼앗기는 해고와 철거의 문제가 그렇다. 가난은 불평등하고 부조리한 사회경제적 시스템 속에서 생겨나는 구조악이다.

'예수'가 없다면 교회는 동정심 많은 비정부기구일 뿐

“부르주아의 부인들이 교회에 와서 눈물로 가난한 이들을 위해 기도하고 심지어 때로는 거리로 나서서 그 고운 손으로 몸소 먹을 것과 마실 것을 나누어 주지만 그들은 자신의 남편들의 공장에서 일어나는 부당한 해고와 인격 말살에 대해서는 아무런 감각이 없지. 그러고도 스스로 예수의 제자라 믿으며 미사에 참석하고 그리고 거기서 어떤 죄책감도 얻어가지 못해. 이게 우리의 현실이야” (공지영 연재 소설, <높고 푸른 사다리> 중에서)

교종 프란치스코는 첫 미사에서 “예수를 증거하지 않으면 우리는 교회가 아니라 동정심 많은 비정부기구(NGO)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교회가 ‘가난’과 ‘가난한 이들’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 그들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에 대한 한줄 평가와 같다.

가난한 교회가 된다는 것, 가난한 이들과 함께 연대한다는 것은 그들 앞에 몸을 낮추고 눈을 맞추며 물어보는 것에서 시작한다. “왜 가난하게 됐는가. 무엇이 당신들을 가난하게 만들었는가”라고 묻고,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 그것이 스스로 낮고 가난한 이가 되는 것이며, 그들과 연대하는 첫 걸음이다.

끔찍한 범죄를 저지른 이들의 사형도 막아야 한다는 입장을 갖는 것이 교회다. 언론과 공권력에 폭행당하고도 범죄자 취급을 받는 2중, 3중의 고통을 겪으며 울고 있는 이들이 있다면 물어봐야 한다. “왜 파업을 했습니까? 왜 망루에, 송전탑에, 성당 종탑에 올라가 있습니까? 왜 길에서 천막을 치고, 촛불을 들고 계십니까....”라고. 그리고 또 물어봐야 한다. "나는, 우리는 정말로 가난한가?"

나는 교회가 그들의 눈을 바라보고 묻기 시작할 때, 스스로도 가난해질 수 있다고 본다. 스스로 가난해지는 것, 그들과 연대하는 것은 서로 다른 길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다. 예수를 따르고 증거한다는 것은, 예수님과 똑같이 행하는 것이다. 아무도 곁에 가려하지 않고 공동체에서 내친 이들에게 나가가 말을 건네고,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치유하고 위로하는 그것이다. 프란치스코 성인을 따르겠다며 가난한 교회를 선포한 교종의 당부를 우리 교회가 어떻게 따를 것인지 궁금하다.

모두가 사악한 마녀라 불렀던 카라바의 고통을 보고, 그녀의 참모습을 찾아 준 순간 어른이 된 키리쿠의 이야기는 인상깊다. 모두가 광인이라 손가락질 할 때, 그 사람만의 고통을 알아보고 다가가 치유해 주는 모습, 바로 성경에서 만났던 예수의 모습이다. 우리는 언제 어른스러운, 진짜 신앙인이 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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