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은 오늘을 말한다-4]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한13,34)는 새 계명을 당신의 제자들에게 남기신다. 사실 사랑만큼 쉽고, 사랑만큼 어려운 것이 있을까! 내 맘에 들고, 내가 속한 집단에 뜻을 같이하고 충성하면 사랑하지 말라 해도 사랑할 것이다. 희생하고 고통도 마다하지 않을 것이다. 내 맘에 들지 않고, 내가 속한 집단과 뜻을 달리하고 고분고분하지 않는다면, 더 나아가 나를 이기려 들고, 내가 속한 집단을 무너뜨리려 한다면, 사랑은커녕 적개심을 불태우고, 배제하고, 소외시키기 위해 힘을 소진하기까지 할 것이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예수님의 사랑은 우리의 인간적인 성향을 넘어선다. 예수님께서 사랑한 사람들은 인간적으로 사랑스러운 사람들만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렇지 못한 사람들, 그러니까 천벌을 받은 한센환자들, 눈먼 사람들, 더러운 영에 들린 사람들, 그래서 사람들이 철저하게 배제한 사람들을 사랑하셨으며, 사람들이 돌로 쳐 죽이려 했던 그런 사람들까지 사랑하셨다. 오죽하면, “이런 이들이 예수님을 많이 따르고 있었”(마르코 2,15)다고 했을까!

다른 사람의 처지를 헤아리고 돌보는 이타적인 태도 역시 마찬가지다. 내 마음에 들고, 나를 기쁘게 하는 사람의 처지, 내가 속한 집단의 처지는 헤아리지 말라 하고, 돌보지 말라 해도 돌보려 한다. 오죽하면 “우리가 남인가!” 했겠는가. 오죽하면 ‘00라인’, ‘000내각’ 하는 말이 버젓이 회자되겠는가! 어쩌면 인지상정일 수도 있다. 자기에게 기쁨을 주기 때문일 것이며, 서로 끌어주고 밀어줌으로써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으니 어찌 집단을 아끼고 돌보고 헤아려주지 않겠는가!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이타적 태도는 내 마음에 들지 않고, 내 기준으로 보아 나쁜 사람, 고통을 받아도 싸다고 여기는 사람, 무능한 사람, 내가 속한 집단과 경쟁적이거나 적대적인 관계에 놓여 있는 다른 집단에 속한 사람까지도 헤아리고 돌보는 것, 그것이야말로 그리스도인이 지녀야 할 이타적인 태도다.

예수님처럼 사랑하고, 예수님처럼 이웃(집단)을 특히 힘없는 이웃을 헤아리고 돌보는 공생의 삶이야말로 그리스도인다운 삶이며, 하느님의 은총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대화’와 ‘협력’을 강조한 것도 그 때문이다.

문제는 그렇게 살면 사람들 눈에 어리석어 보인다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 사는 세상은 이기심을 채우는 것만이 살길이라고 우리를 다그친다. 이타적 상생의 길을 찾기보다는 불의하고 부정한 수단을 써서라도 나와 우리 집단만 승자가 되려는 이전투구의 사투의 길만이 우리가 걸어야 할 길이라고 우리를 윽박지르기까지 한다.

이 각박함은 곧잘 나 아닌 모든 사람을, 혹은 우리와 다른 집단을 향한 맹목적인 폭력으로 드러난다. 이 폭력 속에서는 힘없고 약한 처지에 놓인 개인이나 집단은 속수무책으로 당할 뿐이다. 예수님 시절 대부분의 유대 민중은 마치 “목자 없는 양”처럼 이중의 폭력으로 신음해 왔다. 하였다. 로마 제국은 무력으로 억눌렀고, 유대의 지도자들은 로마제국에 부역하고 집단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백성을 사지로 내몰았다. 마치 우리의 일제 강점 35년을 보는 것 같다. 이렇게 폭력은 언제나 비겁하게 힘없는 이 혹은 힘없는 집단을 향한다.

▲ 지난 4월 25일 열린 고(故) 육우당 10주기 기도회에 그의 유품이 전시되었다.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던 육우당은 함께 활동했던 동성애자인권연대 회원들에게 성모마리아 상을 남기고 돌아올 수 없는 길을 떠났다. Ⓒ문양효숙 기자

우리의 현실은 이 비겁한 폭력의 지배를 정당화한다. 이 폭력은 성소수자를 고개조차 들지 못하게 하고, 이주노동자와 결혼이민자를 업신여기게 하고, 가난한 이들을 비루하게 살게 한다. 열거하기조차도 어렵다. 지난 25일, 육우당 10주기 추모 기도회가 정동 프란치스코 교육회관 4층에서 열렸다.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의 나이는 19살이었다.

그가 자신의 호를 육우당이라 지은 이유는 술, 담배, 수면제, 파운데이션, 녹차, 그리고 묵주라는 여섯 친구 때문이라 한다. 묵주가 친구였다. 유일하게 편안함으로 거처하고 일하던 사무실에 그는 십자가와 성모상을 두었다. 그는 천주교식으로 장례를 해달라는 유언을 남기기까지 했다. 2003년 국가인권위원회가 청소년보호법 시행령 7조에서 동성애를 삭제하도록 권고하자,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이 땅의 그리스도교의 어떤 연합회에서 강력하게 반발하며 인권위의 결정을 철회할 것을 공개적으로 요구하기도 했다. 10년 전의 이야기다.

이쯤해서, 육우당이 떠나기 10년여 전, 그러니까 1992년 새로 나온 <가톨릭교회 교리서>에서 밝히 교회의 가르침을 그대로 옮겨 소개한다.

“동성애는 동성의 사람들에게 배타적이거나 더 강하게 성적 매력을 느끼는 남자끼리나 여자끼리 갖는 관계를 말한다. 동성애는 기나긴 시대와 다양한 문화를 거치며 갖가지 형태를 띠어 왔다. 동성애의 심리적 기원은 거의 밝혀져 있지 않다. 동성애를 심각한 타락으로 제시하고 있는 성서에 바탕을 두어, 교회는 전통적으로 ‘동성애 행위는 그 자체로 무질서’라고 천명해 왔다. 동성애는 자연법에도 어긋난다. 동성애는 성행위를 생명 전달로부터 격리시킨다. 그 행위들은 애정과 성의 진정한 상호 보완성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동성의 성행위는 어떤 경우에도 인정될 수 없다”(2357항).

“상당수의 남녀가 깊이 뿌리박힌 동성애 성향을 보이고 있다. 그들의 경우는 스스로 동성 연애자의 처지를 선택한 것이 아니다. 객관적으로 무질서인 이 성향은 그들 대부분에게는 시련이 되고 있다. 그러므로 그들을 존중하고 동정하며 친절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그들에게 어떤 부당한 차별의 기미라도 보여서는 안 된다. 그들은 자신들의 생활에서 하느님의 뜻을 실현하라는 부르심을 받고 있으며, 그들이 그리스도인이라면, 자신들의 처지에서 겪을 수 있는 어려움들을 주님의 십자가 희생과 결합시키라는 요청을 받고 있다”(2358항).

“동성애자들은 정결을 지키도록 부름을 받고 있다. 내적 자유를 가르치는 자제의 덕으로, 때로는 사심 없는 우정의 도움을 받아서, 또한 기도와 성사의 은총으로, 그들은 점차 그리고 단호하게 그리스도교적 완덕에 다가설 수 있고 또 다가서야 한다(2359항).

어둠의 세력은 ‘세상에는 사랑할 사람 따로 있고, 무시할 사람 따로 있으며, 돌볼 사람 따로 있고, 내다버려도 될 사람 따로 있으며, 귀한 사람 따로 있고, 하찮은 사람 따로 있다’고 집요하게 우리를 길들이려 한다.

절대로 지지 말자!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는 주님의 새 계명을 새기며, 또 새기면서. 

박동호 신부 (서울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 신정동성당 주임)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