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소 주일 기획 ‘부르심’ - 3] 기도의 사도직 백 마리아 씨

“저는 별 거 없어요. 그냥 이웃들하고 잘 지내면서 사는 것뿐이에요.”

전화기 너머 작은 목소리는 한사코 인터뷰를 거절했다. 내세울 것 없고, 이야기해줄 것도 없다던 그는 인터뷰 대상으로 다른 사람을 소개했지만 그럴수록 그의 ‘별 거 없는’ 이야기가 궁금했다. 다음 날 다시 전화를 걸어 인터뷰를 하고 싶은 몇 가지 이유를 더 이야기한 끝에 어렵게 수락을 받아냈다. 그러면서 그는 혹시나 자신이 남들 앞에 너무 나서는 게 아닐까 하는 걱정에 꾸밈없이 있는 그대로 기사를 써달라고 당부했다. 그렇게 약속을 하고 2주 뒤 서울을 출발해 자동차로 꼬박 5시간을 달려 도착한 전라남도 강진의 작은 시골 마을 점방에서 ‘기도의 사도직’으로 살아가는 백 마리아 씨를 만났다.

▲ 백 마리아 씨 ⓒ한수진 기자

‘기도의 사도직’은 기도를 통해 일상의 삶을 온전히 하느님에게 봉헌하는 평신도 신심운동 단체다. 1844년 프랑스에서 시작돼 전 세계 4천만 명의 회원이 있고, 한국에서는 1993년 예수회 박문수 신부가 장애인 공동체 ‘사랑의 고리’를 중심으로 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최근에는 서울 마포구 예수회 센터에서 매월 미사와 피정, 기도모임을 열고 평신도들이 그리스도의 뜻에 따라 일상의 삶을 사도적으로 살도록 돕고 있다.

백 씨를 따라 들어선 방 오른편 벽에 기도 공간이 마련되어 있었다. 낮은 서랍장 위로 십자가와 성모상이 놓여 있고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와 주교들 사진 몇 장을 비닐에 싸서 서랍장 위에 테이프로 붙여놓은 게 보였다.

“1984년에 교황님이 광주에 오신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당시에 출판사를 하던 형부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관한 책을 주어서 인상 깊게 읽었는데, 책에 나온 그 교황님을 직접 보고 싶은 마음에 바로 공소를 찾아가 예비자 교리를 받았어요. 교황님이 살아있는 예수님이라고 생각했었거든요.”

본래 백 씨의 가족은 불교 집안이었다. 그래서 어린 시절 백 씨는 나이가 차면 절에 들어가 보살이 되기로 결심했었다. 11살에 앓았던 척추 결핵으로 허리와 등이 굽은 장애를 얻었기 때문이다.

“어렸을 때 텔레비전 드라마에서 장애인 여성이 아버지가 정해준 남자와 결혼을 했다가 고생하는 이야기를 보고 처음으로 혼자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나도 그 드라마 주인공처럼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요. 그런데 장애가 있으니 스님은 될 수 없고 보살로 살기로 결심을 했죠. 혼자서 고기도 조금씩 끊고요.”

‘믿음’에 마음이 끌려 주일마다 성당으로

반전은 우연한 기회에 일어났다. 한 지인이 병을 낫게 해주는 기도를 받으러 광주에 가보자고 했다. 병원에서도 고치지 못한 병을 기도로 고친다는 말을 믿을 수는 없었지만, 백 씨는 속는 셈 치고 따라나섰다. 그곳에서 처음으로 천주교의 존재를 알게 됐다.

“몇 번 기도를 받으러 갔는데 ‘믿음’이라는 단어가 마음에 들어왔어요. 왜 그런지 그 단어가 너무 좋은 거예요. 그래서 천주교에 마음이 가기 시작했어요. 물론 안수기도를 받고 병이 낫지는 않았지만요.”

아이러니하게도 백 씨는 믿지 않던 곳에서 ‘믿음’을 발견했다. 그는 미사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채로 주일에 성당을 나가기 시작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를 실제로 보고 싶다는 열망은 자라나던 신앙의 불씨에 바람을 불어넣은 것이었다. 그런 순수한 마음으로 백 씨는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고, 신앙은 그가 열심히 삶을 살도록 이끌었다.

“세례를 받고 십계명을 생각하니 깜깜했어요. 이불을 쓰고 죄를 지어도 다 보일 거고, 더 먼 곳에 숨어도 다 보일 텐데. 죄를 안 짓고 살 수는 없고 이걸 어떻게 해야 하나. 그래서 진짜로 이불을 써보기도 했어요. 그러다 결국 두려움을 포기하기로 했어요. 그래, 이왕 세례를 받았으니 죄 안 짓고 한번 살아보자.”

백 씨는 “내가 열심히 살아가는 모습을 이웃들도 좋아한다”고 말했다. 마을에서 유일한 천주교 신자였던 백 씨를 따라 지금까지 10여 명의 이웃이 세례를 받은 것이 그 증거다.

“누가 아프다고 하면 며칠씩 찾아가 기도를 해드렸어요. 마을의 한 할아버지는 대세를 받으시기 전에 ‘네가 와서 시불시불 해주면 안 아프니까 언능 와서 시불시불 해주고 가라’고 재촉하시기도 했어요. 후에 그 집 할머니는 할아버지가 마지막 순간에 그 심한 통증을 모르고 세상을 떠나셨다고 고맙다는 말을 전하셨어요. 그 뒤로 할머니와 자녀들도 세례를 받으셨지요.”

이웃들은 백 씨가 어렸을 때 마음먹었던 대로 집을 떠나 살지 않고 마을에 그대로 머무르면서 ‘기도의 사도직’을 가지고 살아가는 이유이기도 하다. 한동안 그는 ‘사랑의 고리’ 공동체에 서원을 하고 공동체 구성원이 될 생각도 했었다. 그러나 막상 공동체 생활을 체험해보니 원래 살던 곳에서 떨어져 살며 규칙적인 생활을 해야 한다는 것이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는 이웃이 연락을 해오면 밤중이라도 나가서 그를 만나야 했다. 또 집에 찾아오는 이들을 아무 때고 맞이하는 일도 포기할 수 없었다.

이웃과 함께 나누며 살라는 ‘하느님의 부르심’

마을 초입에서 작은 가게를 운영하는 그의 주변에는 항상 사람들이 많았고, 그도 사람들을 가까이 했다. 농사일이 한가할 때에는 오전 9시부터 가게로 마실 오는 할머니들의 말동무를 해드렸다. 공과금 자동이체 서비스가 나오기 전 까지 그는 농사일로 바쁜 어르신들을 위해 우체부에게 공과금을 대신 전달하는 일을 오랫동안 맡기도 했다. 또 도보여행객들이 가게에 들르면 시골 이모 집처럼 먹을 것과 마실 것을 내줬다. 그는 이런 일들을 ‘그리스도인의 당연한 임무’로 여겼다.

“흔히 남에게 나눠주다 보면 내 것은 안 남는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아무리 나눠도 제 몫은 많이 남아요. 저희 집을 둘러보면 나올 게 없어 보여도 누굴 주려고 뒤져보면 줄 것이 한 상자도 더 나와요. 내게 남는 것이 좋은 물건이 아닐지라도, 그 찌꺼기라도 늘 내 것이 더 많이 남아있더라고요. 오병이어의 기적처럼 말이에요.”

이웃과 나눌 때 하느님 안에 살아가는 기쁨을 가장 크게 느낀다는 백 씨. 만약 그에게 하느님의 부르심이 없었다면 삶은 어떻게 달랐을까.

“내 안에 갇혀서 힘들었을 거예요. 19살 때 추석 날 밤이었어요. 밝은 달을 위에 두고 담장 밑을 걷다가 순간 ‘이 세상에서 내가 설 자리는 어디일까’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 때는 지금보다 장애인에 대한 처우가 더 열악했잖아요. 내가 끊임없이 노력해도 결국 장애 때문에 제자리로 돌아올 수밖에 없을 거라는 게 속상해서 펑펑 울었어요. 들을 봐도 하늘을 봐도 내가 있을 자리는 없는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을 알고 나서는 다른 사람의 고통에 공감해 울기는 했어도 나의 아픔으로 인한 절망이나 슬픔으로 운적은 한 번도 없었어요.”

백 씨는 허리와 척추 장애 때문에 오래 앉아있으면 방광이 눌려 며칠씩 고생하고 조금만 힘들어도 쉽게 장이 꼬인다. 게다가 장애는 척추 측만증과 척추염, 역류성 식도염 등 여러 만성질환을 동반해 몸이 자주 아프다.

“많이 아플 때에는 기도도 할 수 없을 만큼 아파요. 그럴 때는 가만히 누워 십자가에서 고통을 당하신 예수님을 생각해요. 머리가 아프면 예수님의 가시관을 떠올리고 허리가 아프면 창에 찔리신 상처를 떠올려요. 그러면 고통에 대한 원망이 사라지고 고통을 그대로 받아들이게 돼요. 이렇게 누워서 온몸으로 고통을 받아들이는 것 또한 기도라는 생각을 하면서요.”

그럼에도 백 씨는 “장애를 벗어나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통증은 멈추게 해주면 좋겠지만, 장애가 없었다면 예수님을 몰랐겠죠. 세례를 받은 후에 어느 순간 나의 장애가 하느님의 사랑으로 받아들여졌어요. 절망하지 않고 희망으로 살게 해준 장애가 소중하고 사랑스러웠어요.”

백 마리아 씨는 인터뷰가 끝나자마자 부엌으로 가더니 종이가방을 들고 왔다. 가방 안에는 그가 직접 담근 매실 장아찌와 이웃집에서 덖은 녹차가 꼼꼼하게 비닐에 싸여 있었다. 서울까지 가는 동안 차 안에서 먹으라고 삶은 계란과 한라봉 여러 알도 들어있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더 줄게 없는지 집 안을 한번 돌아보더니 앞마당 텃밭에서 재배해 말린 약초를 봉지 가득 담아왔다. 묵직한 종이가방을 들고 그의 집을 나서면서 하느님이 인간의 마음에 심어 둔 부르심의 씨앗이 어떻게 사랑으로 꽃 피우게 되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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